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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20/104)

19화

백희도는 마침 침대 끝에 앉아 제 머리를 수건으로 꼼꼼히 말리는 중이었다. 긴 머리를 넘긴 그의 등 위로는 근육과 함께 이번에 새로 생긴 상처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백희도는 물기를 잘 말려서 물이 떨어지지 않게 되자마자 옆구리부터 등까지 길게 찢어진 상처에 포션을 발랐다. 

“……발라 줘?”

“뭐가.”

“등에 상처…….”

대부분 상처는 아물고 있었으나 일부는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베인 상처였다.

백희도는 내 말에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게 포션 병을 넘겼다. 하지만 포션을 건네준 이유는 내 예상과 달랐다.

“됐고, 너나 마셔라.”

“뭐?”

“너나 처마시라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빌빌거리지 말고.”

거의 쓰지 않은 새 포션이나 마찬가지라 얼떨떨하긴 했지만,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히는 우악스러운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해서 나는 사양하지 않고 포션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자 단번에는 아니지만 아릿아릿하던 속이 점차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백희도는 쿨하게 다른 포션 병을 하나 더 까선 배와 가슴에 남은 흉터를 지웠다. 나는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으로 다시 침대에 누워서 백희도를 쳐다봤다. 

“뭘 봐.”

백희도가 뚱하게 물었다. 나는 녀석의 맨살이 좀 거북했지만, 티 내진 않고 대꾸해 주었다.

“솔직히 쓸모 있었지, 나?”

“뒈지려고 작정한 거 아니었냐?”

“솔직히 말해 봐. 이 정도 디버프면 너한테 짐이 되진 않잖아.”

나는 자신만만하게 이쯤 되면 백희도라도 수긍할 거라 생각했으나, 놈이 뒤를 돌아보면서 내게 내뱉은 말은 예상과 달랐다.

“필사적으로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건, 유세림 때문인가?”

“…….”

나는 그 말에 목이 콱 메인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백희도는 내 표정을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왜 또 그딴 표정인데?”

“……내가, 무슨…….”

하지만 녀석은 기어이 다가와 내 눈가에 손을 댔다. 나는 놈의 손을 쳐 내려다 그럴 기운도 없어서 그냥 내버려 뒀다. 

백희도는 남의 눈가를 몇 번이나 꾹꾹 눌러 대다가 이를 악문 내게 물었다.

“유세림 좋아했냐? 너.”

“…….”

질문이었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말투였고,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백희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웃는 듯한 인상은 아니었다. 경멸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보는 눈이 없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여전히 유세림한테 얽매여 있으면서 나한테 비비는 거, 불쾌해.”

“…….”

나는 차갑게 말하는 백희도를 쳐다봤고, 백희도는 내가 몸을 일으켜 저에게 바짝 다가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는 백희도의 코앞에 서서 말했다.

“유세림을 죽이는 건 나야. 그게 집착이라면 집착이겠지. 이제 속이 후련해?”

백희도는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다.

“키스라도 하려는 줄 알고 주먹으로 팰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경멸을 담아 말했다.

“넌 내 취향 아니야, 절대로.”

“그렇겠지, 넌 눈이 낮으니까. 유세림 같은 거나 좋아하고.”

“……하. 아니라고 했지. 그리고 세상에 사람이 다 죽어 없어져도 너만은 아니니까 걱정 마라.”

“그 말 꼭 지키길 바랄게?”

우리는 그 말을 끝으로 서로 등진 채 침대에 누웠다. 왠지 괘씸하고 분한 기분이 들었다.

* * *

[오랜만이에요이~!]

2주간의 휴식 기간이 끝나고, 나는 다시 유세림 파티에 합류했다.

모이기로 한 장소에서 가장 먼저 나를 반겨 준 것은 공중에 둥둥 떠 있어서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안화영이었다.

“흥, 제일 등급이 낮은 주제에 왜 제일 늦게 오는 거야?”

다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표유정이 그다음.

“어서 와요!”

그리고 본인은 모르지만 지난 던전에서 죽음을 면하고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 성규림 씨.

“…….”

서걱서걱. 고개만 까딱한 후 제 도끼날을 가는 데 여념이 없는 김재호와.

“어서 오세요.”

마지막으로…… 유세림이 있었다.

나는 평소와 같은 듯 보이는 유세림을 보며 조금은 안도했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내심 걸렸었기 때문이다.

나는 슬쩍 유세림의 인사를 씹으며 파티원과 가까워졌다.

사실, 오늘 나는 유세림에게 일방적으로 파티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이후부터는 백희도와 파티를 맺고 다녀도 상관없었으니까. 아니면, 유세림의 머리털이나 좀 얻어 놓고 튈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백희도가 화령교에서 입수한 특별한 아티팩트 설계도가 발목을 잡았다.

‘혈갑이라고 하는 건데 핵심 부품은 못 훔쳤지만, 설계도는 내가 손에 넣었어.’

‘설계도?’

‘제작하려면 필요한 재료가 있는데, 너도 모으는 데 협력해. 내가 강해지면 너도 좋잖아?’

‘…….’

재수 없는 소리에 인상이 확 구겨졌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백희도는 이런 말도 했다.

‘혈갑은 너랑 비슷해, 주술사.’

‘뭐가?’

‘제물을 필요로 하는 아티팩트야. 어쩌면 완성됐을 때 너 같은 직업만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백희도는 그렇게 되면 나에게 기꺼이 ‘혈갑’을 양보해 주겠다고 말했다. 

빈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더구나 만약에 그 아티팩트를 내가 쓸 수 없어도 도와준 만큼 확실한 보상을 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놈의 ‘혈갑’ 만들기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혈갑’ 제작 퀘스트에 동참하시겠습니까? (1/2)

―보상: 혈갑

―우선권: 백희도]

백희도는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더니, 확실한 건지 나에게 퀘스트까지 공유해 주었다. 퀘스트를 공유하면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재료와 진행 상황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여, 나는 [수락]을 눌렀다.

[게나우의 말총 0/10]

[노아의 관 조각 0/10]

[바크라의 하프 줄 0/10]

[이시스의 찢어진 성경책 0/10]

.

.

.

들어가는 재료가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어쨌든 개중에선 내가 모을 수 있는 눈에 띄는 재료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노아의 관 조각’이었다. 

[노아의 관]이라는 던전은 클리어 한 경험이 있으니까. 게다가 내 기억이 틀리지 않으면 아마도 이번에 유세림 파티에서 향하게 될 던전이 바로 [노아의 관]이었다.

그래서 나는 백희도에게 ‘노아의 관 조각’을 모아 오겠다고 말했다. 물론, 유세림 파티에서 말이다.

‘유세림 파티에 계속 있겠다고?’

‘어.’

‘…….’

‘너랑 나, 따로 움직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잖아.’

하지만 백희도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팍 찡그렸다가 내가 쳐다보자 ‘그러던가.’라는 괴상한 대답을 했다.

……설마, 내가 저와 파티를 하지 않아서 삐진 건 아닐 테고.

‘유세림이 그렇게 싫은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만 생각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개인사를 물을 만큼 백희도와 친밀한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어쨌든, 그리하여 지금 이렇게 이 파티에 와 있는 것이다. 유세림은 나까지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에 우리가 향할 [노아의 관]이라는 던전의 브리핑을 했다.

“노아의 관은 A등급 던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함정에 빠지면 보스 몬스터, 노아를 죽일 때까지 좁은 관에 갇혀 있어야 한다더군요.”

그 말에 안화영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안화영을 몰래 살펴보면서 녀석을 구해 줘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이번 기회에 안화영에게 빚을 지워 두면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러나 [노아의 관]은 A등급 던전이고, 자칫하단 나까지 관에 갇혀서 재료도 수급하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이다. 

나는 결국 ‘상황을 봐서.’라고 생각해 두고, 안화영의 뒤에 슬쩍 서서 유세림의 브리핑을 들었다.

* * *.

우지끈― 쾅!

[노아의 관]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오르크’라는 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들이 공격을 해 왔다.

“[도깨비 불]!”

[채소도 먹어야지, 냠냠냠!]

더구나 오르크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어두워진 눈동자]!”

[실패.]

“젠장…….”

더구나 마법 저항도 꽤 높아서 스무 번쯤 저주를 날려야 한 번 먹힐까 말까? 나는 그래서 같은 스킬을 몇십 번씩 날리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다 간신히 몇 마리가 스킬에 걸리면 김재호가 눈먼 오르크들을 도끼로 수월히 잡기는 했지만 말이다.

휘리릭― 퍽!

편안하게 채찍으로 오르크의 뿌리까지 뽑아 내동댕이치는 유세림을 보고 있자면 울컥 화가 치밀기도 했다.

‘……진정하자. 어차피 유세림을 이용해서 백희도에게 아이템이나 얻어 낼 생각이었잖아.’

나는 치미는 박탈감을 백희도와의 약속으로 애써 가라앉히고 드디어 던전, [노아의 관]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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