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분노라거나 한심하다는 감정은 일절 없이 자애롭기만 한 목소리였다.
“형님 미안해요……. 후아…….”
이혜도 제 형님 앞에서는 계속 막무가내로 술을 더 가져오라는 둥 고함을 치거나 역겨운 입맞춤을 하지는 않았다. 술이 살짝 깬 듯한 목소리로 기어들어 가듯 눈치를 보는 게, 평소 형님을 상당히 어려워하거나 존경하는 듯 보였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마시고 궁으로 돌아가자.”
“……예에.”
“너무 취했다. 알지?”
이홍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고 말이다.
이홍은 이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그의 귓불을 슬쩍 만졌다. 나는 그 손짓을 보고 조금 의아해졌지만, 휘청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혜의 모습에 시선이 더 쏠렸다.
‘저 녀석, 팔이…….’
이제 살펴보니 이혜는 한쪽 팔이 기형이었는데, 마치 몬스터의 팔을 몸에 붙인 것처럼 거칠고 투박했다.
하지만 이홍은 그 팔을 스스럼없이 붙잡으며 이혜를 부축했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말이다.
‘형 동생 사이 맞아?’
나는 나와 성훈이 형 사이를 생각해 보면서 뭔가 봐선 안 될 걸 본 듯한 기분이 들어 살짝 불쾌해졌다.
하지만 어쨌든 들키지 않고 이홍과 이혜를 관찰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나는 다시 살금살금 내 방으로 돌아왔다.
“여긴 왜 왔냐, 주술사?”
“으…… 읍!”
“소리 내면 안 되지.”
그런데 내가 내 방에 들어가자마자 백희도가 떡하니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는데, 백희도의 큰 손이 내 입을 먼저 틀어막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눈짓으로 백희도에게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놈은 그제야 내 입을 틀어막은 손을 거뒀다.
녀석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설마, 이 몸이 걱정돼서 쫓아온 건 아니지?”
“……혼자 가는 건 미친 짓이라니까.”
“그래서, 널 데려가는 건 뭐 퍽이나 도움이 되는 일이고?”
“…….”
분했지만 백희도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만히 보니, 내 짐들도 이미 다 풀어헤쳐 본 듯 방 안이 아주 엉망이었다.
나는 백희도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남의 짐을 왜 다……!”
“주술사,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몸을 빼는 건 쉽지만, 너 같은 짐덩어리까지 챙겨서 빠져나오는 건 아주 성가신 일이거든.”
하지만 백희도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안하무인이었다. 나는 그 말에 울컥해 놈을 밀치고 가서, 내가 가져온 짐을 다시 챙겼다.
백희도는 그런 나를 보며 팔짱을 낀 채 지켜봤다. 그러더니 한다는 소리가 더 가관이었다.
“삐졌어?”
“가서 콱 죽어 버려.”
“말이 너무 심하잖아.”
백희도는 그렇게 말하더니 뒤에서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돌려세웠다. 그러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우는 건 아니지?”
“꺼져.”
나는 역시 저번에 백희도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우는 모습을 보여서 백희도, 이 새끼가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
그러나 백희도는 기어이 내 눈가에 제 손을 올려다보더니, 손을 탁 치려는 것도 그 무식한 힘으로 막고는 가만히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곤 저가 뭐라도 된 양 내게 거만하게 말했다.
“울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지랄하지 말고 손 치워.”
“근데 너, 좀 귀엽긴 하다.”
“무…… 뭐?”
“이딴 것들로 화령 신전에 잡입하려고 한 생각이 말이야. 너무 깜찍해.”
백희도는 저가 어지럽힌 내 물건들을 보면서 말했다.
퍽―!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놈을 걷어찼다. 백희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인상을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얼굴은 귀여운데, 행동은 난폭하네.”
“안 닥쳐!?”
양팔이 잡힌 채로 부들부들 떨자, 백희도는 그런 나를 보고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뭔가 말을 안 듣는 어린이를 대하는 듯한 재수 없는 웃음이었다.
“읏차.”
그 순간, 백희도가 나에게 갑자기 가까이 붙더니 내 허리를 잡고는 방에 있던 두 개의 침대 중 깔끔한 침대 하나에 나를 눕혔다. 그리고 제 무릎으로 내 다리를 누르고, 한 손으론 내 두 손목을 붙잡았다.
완벽하게 포박된 자세였다. 내 얼굴 위로 백희도의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쓸렸다.
“무, 무슨 짓을……!”
“한솔.”
놈이 갑자기 무게를 잡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이미 뇌령검이 화령 신전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말라고. 내 걱정해 주는 것까진 고맙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녀석은 갑자기 허리띠를 끌렀다. 나는 이 자세에서 갑자기 제 허리띠를 끄르는 놈의 태도에 공포를 느꼈다.
“미, 미친놈아! 뭘 하려는……!”
백희도는 씩 웃으면서 끄른 허리띠를 내 손목에 묶었다. 그리고 침대까지 연결해 둔 듯, 아무리 움직여도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대하는 건 나중에 해 줄게. 그럼, 난 이만 가 본다?”
“닥쳐엇! 이거 빨리 안 풀어? 너, 너 신고한다?”
“어떻게 하게?”
이어 놈은 내 입술을 억지로 벌려선 제 손수건을 물리기까지 했다. 나는 읍읍거리면서 놈을 저주했으나, 끝내 백희도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쾅―!
백희도가 문을 나서자마자, 나는 입에 쑤셔 넣어져 있던 손수건부터 퉤 하고 뱉어 버렸다.
“씨발. 깜찍하고 귀여운 건 너다, 이 멍청아.”
입을 막으면서 그냥 손수건만 무식하게 집어넣고 가다니. 한 번도 사람 감금해 본 적이 없나 보네. 그리고 나는 손목뼈를 우두둑 꺾었다.
백희도는 나를 정말 C등급 정도로만 봐서 그런지 참 허술하게도 묶고 갔다. 나를 얼마나 나약하고 얕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고 할까? 그래서 놈이 대충 묶어 둔 허리띠를 벗어나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했다.
나는 지난 1년여간 열두 개의 던전을 클리어 하면서 충분히 여러 상황을 겪었고, 그때마다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를 익혀야 했다.
아무리 유세림이 잘나간다고 해도 파티원을 노리는 도적 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 때문에 이렇게 묶였을 때 빠져나오는 정도는 눈감고도 가능한 것이다.
‘다행히 짐도 그냥 풀어 보기만 했지, 가져간 건 없고…….’
나는 재빨리 짐을 챙긴 뒤, 필요한 물건들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백희도가 향했을 화령 신전을 향해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 * *
스킬은 몬스터를 대상으로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에게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몬스터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할 때가 더 쉬웠다.
“[뒤집어쓴 가죽]!”
나는 화령 신전의 입구 앞을 지키고 선 문지기에게 스킬을 걸었고, 다행히 먹혀들었다.
나는 경계심 가득하던 문지기의 눈이 곧 친근감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하곤 가까이 갔다. 그가 내게 웃으며 물었다.
“어디 다녀왔어?”
“잠깐 마을 근처에. 나, 들어가 봐도 되지?”
“어어, 그럼.”
그렇게 순조롭게 진입한 나는, 안에 이미 건물들이 다 세워져 있고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걸 깨닫고는 최대한 얼굴을 가린 채 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은 없지만, (각자 저들이 하는 일로 바빠 보였다) 언제 눈에 띌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면서 진짜 ‘궁’이라고 할 수 있는, 화령 신전의 중심부에 세워진 가장 큰 건물을 눈여겨봤다.
아마도 여기가 진짜 뇌령검이 있는 ‘화령 신궁’일 것이다.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문지기는 아까 그 문지기처럼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 같았다.
‘스킬이 통할 상대인지 아닌지, 눈대중으로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
나는 일단 정문으로 통과하는 것은 보류하고 근처 덤불로 가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최대한 날이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혹시나 백희도가 먼저 소란을 피울까 염려가 되기는 했다. 그러면 놈을 무사히 빼내는 데 차질이 생기니 말이다.
다행히 백희도 역시 어둠을 틈타고 있는지 아직은 모든 것이 고요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밤이 왔다. 또한, 백희도의 짓으로 보이는 소란도 함께 시작되었다.
펑―!
“누구냐!”
“불이야!”
이걸 찬스라고 봐도 되는 걸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만만치 않아 보이던 자도 자리를 비우고, 소란스러운 곳을 향해 뛰어갔다.
나는 이때를 틈타서 재빨리 반지의 보석을 왼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온몸을 까맣게 덮은 옷을 입고, 건물 처마 밑으로 전력으로 달렸다.
‘피는 다 찼고.’
나는 반지를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 잠그고, 연기가 나기 시작한 건물과 반대되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반대편으로 달려오고 있던 화령교의 신도 하나를 기습했다.
“[보이지 않는 고통]!”
“컥!”
나는 정신을 잃은 신도를 질질 끌어 내가 머물고 있던 덤불로 데려간 다음, 옷을 벗겨 냈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그의 옷을 훔쳐 입었다.
다행히 내가 옷을 훔친 상대가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면갑을 착용한지라 곧장 내가 외부인임을 알아보진 못할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이번 한 번 기습으로 피가 다 날아갔네, 젠장.’
상대가 나보다 등급이 높은 인간이었나 보다. 모아 둔 피가 전부 증발했다.
‘하기야, 여기서 C등급을 찾는 게 오히려 희귀한 일이겠지. 그나마 기습이 통한 게 다행이려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다시 반지의 보석을 왼쪽으로 돌렸다. 그러곤 피가 차오르는 걸 잠시 보다가, 내성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