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하…….’
그때를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는 백희도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었음에도 그때의 심정이 계속 떠올라 눈물이 계속 턱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백희도는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병을 들더니 내 머리에 줄줄 뿌렸다. 그 기행에 몇몇 사람이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쳐다봤으나, 나로서는 백희도가 그렇게나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이 고마웠다.
나는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기다란 냅킨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런데…….
“좋아, 주술사. 널 데리고 예지의 성곽에 가 줄게.”
백희도가 믿을 수 없는 약속을 해 준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쪽팔려서 가만히 묻고 있던 냅킨에서 얼굴을 확 뗐다. 벌떡 고개를 든 나를 본 백희도는 웃지 않고 말했다.
“단, 내가 뇌령검을 입수했을 때의 얘기야. 너 같은 짐덩어리를 데리고 가려면 지금보다 더 높은 등급이 되어야 하니까.”
“뭐? 하지만, 뇌령검은 완전히 가짜…….”
“아니, 뇌령검은 존재해. 화령교라는 사이비 교단의 교주가 가지고 있어.”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으나, 백희도는 뭔가 알고 있는 듯 확신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난 화령 신전이라는 교단의 심처에 가서 뇌령검을 훔칠 거야. 성공하면 너는 나랑 예지의 성곽에 가는 거고, 실패하면 뭐…… 튀어야지.”
“그런 미친 짓을…….”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말리고 싶었으나, 백희도는 목을 양옆으로 으드득 꺾으면서 허세를 부렸다.
“지금 C등급 주제에 이 몸의 계획을 미친 짓이라고 했냐?”
“화령교라면 나도 알아! 거기 파티원만 300명이 넘잖아. 그런 곳을 털겠다는데, 당연히 미쳤다고 하지!”
화령교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각성자 파티인데, 이상하게도 파티원이 파티장에게 지대한 충성심을 보이며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사이비 단체였다.
파티장인 ‘이홍’은 자신들을 ‘화교인’이라고 부르면서 포교 활동을 했는데, 워낙 비밀에 싸인 게 많고 한번 화교인이 되면 ‘이쪽’ 세상으로 넘어가는 게 금지인지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화령교는 각성자들의 눈초리에도 개의치 않고 ‘저쪽’ 세계에 자신들의 화려한 성을 지어 그곳을 ‘화령 신전’이라 명명했으며 파티장인 이홍은 궁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워낙 그 파티에 가입된 숫자가 많고, 이홍과 이홍의 동생인 ‘이혜’가 각각 R등급과 S등급의 실력자인지라 뒤에서만 사이비라고 부르지, 앞에서는 섣부르게 말을 꺼낼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 단체의 보물을 털겠다니.’
나는 저번 생애에도 백희도 이 새끼가 분명히 이런 짓을 하다가 죽었을 거라는 데에 내 손목을 걸 수 있었다.
“가면 너 죽어. 농담 아니야.”
나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백희도는 양팔을 뒤로 넘겨 깍지를 끼곤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걱정해 준 거였어? 필요 없는데.”
“……젠장. 난 네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어! 근데 네가 죽으러 가는 꼬락서니를 그냥 지켜보라는 게 말이 돼?”
백희도는 내 말을 듣고 눈을 잠시 동그랗게 뜨더니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이 몸이 뇌령검까지 훔쳐 주겠다고 하잖아.”
“미친 새끼…….”
나는 결국 속으로만 하던 욕설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고, 백희도는 내 욕에도 개의치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놈은 불쑥 내 눈가에 손을 대더니 기분 나쁘게 살살 문질렀다. 나는 그 손을 팍 쳐 냈다.
“뭐 하는 짓이야!”
백희도는 내게 맞은 손등을 쳐다보더니 다시 내 얼굴을 봤다. 그러곤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주술사. 다시는 남 앞에서 울지 마.”
“뭐?”
“너 우는 게 좀 그래.”
“무슨……!”
“밥도 잘 먹고 다녀. 알았지?”
그렇게 말한 백희도는 먼저 계산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졌다. 나는 놈의 그 모습에 허탈해져 버렸다.
* * *.
‘아마 화령교의 교주, 이홍은 정신 계열의 각성자일 거야.’
그러니까 파티원이 교주라고 섬길 만큼 충성을 다하겠지. 그러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정도의 충성심이었다.
게다가 그의 동생 이혜는 화령교의 행동 대장으로, 상당히 강력한 전사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건 내가 정보 단체에 돈을 지급해 알아낸 하급 정보들로, 나는 ‘저쪽’의 화령 신전 위치까지 알아냈다. 그리고 원래는 한 달 정도의 휴가를 받았지만, 바로 ‘저쪽’ 세계로 넘어왔다.
‘그 멍청이가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나라도 놈을 도와야 해.’
즉, 한배를 탔으면 백희도의 계획이 아무리 허무맹랑한 것이라도 죽게는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뜻이다.
하여 나는 전 재산을 탈탈 털어, 화령 신전에 몰래 잠입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곧 그곳 근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온통 건물이 시뻘겋게 칠해져 있는 마을을 보고 위축되고 말았다. 이미 이 마을도 화령교에 지배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네.”
나도 혹시나 싶어 붉은색 옷을 입고 오긴 한지라 옷차림은 그리 튀진 않았는데, 역시 외부인이 자주 오는 곳은 아닌지 나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이 마을에서 하루 숙박할 방을 얻고, 일단은 거기에 처박혀 있었다.
‘벌써 시작된 건 아니겠지?’
대낮부터 움직이진 않을 테니 밤에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다행히 화령 신전 쪽은 잠잠했다.
백희도도 무작정 덤벼들 생각은 아닌가 보다 하고 안도했던 것도 잠시, 나는 약간의 소란스러움을 감지하고 숙소 아래로 살금살금 내려가 보았다.
“술 더 가져와! 술!”
“이, 이혜 님……. 이러다 이홍 님이 아시면 또 크게 혼이 나실 겁니다.”
“형님이 나를 언제 크게 혼내신 적이 있냐? 너희가 혼나는 거지.”
“…….”
“술 더 가져오랬잖아! 어이, 안 들려?”
이미 술을 진탕 마신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했으나 이혜 님이라고 불린 사내의 목소리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혜? ……설마, 화령교의 이혜?’
나는 슬그머니 계단을 조용조용 밟고 내려와, 왁자지껄한 술자리를 가만히 살펴봤다. 그리고 거기서 중앙에 앉은, 안하무인의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저자가 이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그의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을 땋아 길게 내린 모습에 아티팩트로 보이는 큼지막한 귀걸이까지 잘 어울리는, 상당히 유려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자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이 벌겋게 물든 고주망태 상태에서도 벌컥벌컥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인가.’
“더 가져와! 더!”
게다가 주변 사람들은 결국 그를 말리지 못하고 술을 가져다주었는데, 이혜라는 남자는 술을 거의 물처럼 마시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한잔 마시라고 강요했다.
외관만 봐선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완전 젊은 꼰대 아냐.’
“야! 너희는 왜 안 마셔?”
“저, 저희는 괜찮습니다…….”
같은 파티원임에도 역시 사이비 종교 단체라 그런지 상하 관계가 분명한 듯했다.
나는 이혜를 상대로 쩔쩔매는 나이 든 남자들을 보면서 대체 종교 단체라는 건 뭘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안 앉을 거야? 정말로?”
“죄, 죄송합니다. 이홍 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하셔서…….”
“형 말만 말이고, 내 말은 말도 아니냐?”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오호, 파티장인 이홍도 온다니. 이건 괜찮은 수확인데?’
나는 실랑이를 벌이는 자들의 대화 속에서 이홍이 온다는 말을 듣고 나선 계단을 한층 더 위에 올라가 최대한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아래층을 쳐다봤는데…….
“우, 우웁!”
그러자마자 충격적인 장면을 봤다. 완전 취해서 꼴아 버린 이혜가 갑자기 턱에 털이 복슬복슬하게 난 장대한 기골의 남자를 붙들고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미, 미친…….’
술버릇이 저래서 사람들이 다 곁에 안 앉은 거였구나.
나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사람들을 보고, 나 역시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진짜 저게 무슨 추태냐고.
그런데, 그때였다.
“이홍 님!”
“이홍 님이 오셨다.”
“이홍 님…….”
갑자기 주변이 싸하게 조용해지더니 여기저기서 이홍의 이름이 불렸다. 동시에 무척 화려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등장했다.
백희도 못지않게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는 술주정뱅이인 이혜와 똑같은 붉은 머리 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조금은 닮았다. 기세는 완전히 달랐지만 말이다.
“어라? 형님…….”
그리고 털보에게서 막 입술을 뗀, 이혜가 실실 웃으면서 그에게 팔을 벌려 왔다.
나는 동생의 추태를 본 이홍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홍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동생에게 말했다.
“요 며칠 잘 버티더니. 많이 갑갑했나 보구나, 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