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흩어지십시오.”
우리는 유세림의 말에 따라 실드를 벗어나 흩어졌고, 레메스는 그 순간 ‘우웅―’ 하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검을 가로로 그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모든 것을 얼릴 법한 냉기가 엄청난 속도로 유세림을 덮쳤다.
“[보이지 않는 고통].”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 레메스가 쥐고 있는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날려 버렸다.
그러자 레메스는 잠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어그로가 유세림에게서 내게로 옮겨 오진 않았다. 왜냐하면 유세림은 레메스의 스킬에 얼어붙지도, 전혀 타격을 입지도 않은 채 놈의 턱 밑까지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즉, 내가 잠시 주의를 돌리게 한 그사이를 유세림이 훌륭하게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었다.
“[포박].”
유세림은 이번에도 스킬을 썼다. 레메스의 종아리부터 턱 끝까지, 마치 채찍이 덩굴처럼 감아올린 저 스킬 다음은 아마 분명히…….
‘결속이겠지.’
“[결속].”
으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레메스는 그대로 으스러졌고, 그렇게 우리는 간단하게 보스 몬스터를 토벌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여섯의 사도가 있었다. 나는 창을 들어 올린, 맨 끝의 사도를 예의 주시했다. 저 녀석이 바로 이전에 성규림 씨를 죽였던 놈이었으니까.
이전에 놈은 나를 향해 창끝을 겨누었고, 규림 씨는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날렸다. 하지만 지금은 놈의 창끝이 유세림을 향하고 있었다.
‘내버려 둬도 될까?’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지 않아서 다른 변수가 생길까 두렵다. 나는 날아드는 창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전처럼 놈의 이름을 불러 버렸다.
“세림아! 뒤!”
유세림은 뒤를 쳐다보지도 않고 날아오는 창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봤다. 다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말이다.
‘씨발…….’
그리고 나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왜 놈을 그렇게 불렀는지,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 * *.
[끄르륵…….]
마지막 사도까지 완전히 죽이고 나온 아티팩트, ‘설원의 단검’은 표유정이 가지게 되었다.
“가까이 접근하는 몬스터가 있다면, 이걸 휘두르시는 게 좋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유세림 한정으로 밝고 귀여운 소녀가 되는 표유정은 눈에 띄게 볼을 붉히며 단검을 받았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우쭐거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한쪽 입꼬리만 씩 올리는 게 아닌가.
‘너랑 유세림으로 기 싸움할 생각 전혀 없거든…….’
나는 대꾸하기도 귀찮아져서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섰다.
그렇게 모두 다 흩어져, 각자 다음을 기약하면서 ‘이쪽’ 세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내 짐을 챙겨 파티원 중 거의 마지막으로 ‘이쪽’으로 넘어갈 채비를 마쳤다. 이제 2주간은 자유 시간이었다.
‘예전엔 이 시간에도 유세림이랑 같이 있으려고 했었지만…….’
나는 씁쓸한 과거를 떠올리며 짐을 들춰 멨다. 그런데, 가만히 둬도 아파 죽을 것 같은 왼쪽 어깨를 누군가 뒤에서 강하게 쥐었다.
“악!”
“……미안합니다. 부상을 입었었나요?”
유세림이었다.
나는 말조차 나오지도 않는 아픔에 파르르 떨다가, 억지로나마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림은 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민망한 듯 행동했고, 나는 이를 악물고 숨을 내쉬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내 물음에 유세림은 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다가 “별건 아닌데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아까 세림아, 하고 부르길래. 생각해 보니 저보다 나이가 한 살 많지 않습니까, 한솔 씨가.”
나는 설마 놈이 이걸 걸고넘어질 줄은 몰라서 눈을 깜빡이다가 변명을 했다.
“……그건, 실수로.”
“그래서 앞으로도 편하게 불러 달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네?”
“부담스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김재호 씨도 개인적인 자리에선 저한테 반말하시니까요. 저보다 네 살 많으시거든요.”
“…….”
“그러니까……. 한솔 씨가 저를 좀 어려워하시는 것 같길래.”
그렇게 말하는 유세림의 표정은 덤덤했고, 나는 그런 놈을 보며 진정 팀워크를 중시하는 참된 리더…… 라고 생각할 리가 있냐? 그냥 거북하고,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예전엔 내가 그냥 한 살 많다는 이유로 성을 떼고 먼저 제멋대로 이름을 부르며 한심하기 그지없이 굴었지만, 이번 생애까지 유세림한테 친한 척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젠 그저 흑역사일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깐 급해서 말이 헛나간 거고요.”
“…….”
“저는 존댓말이 편하니까, 그냥 앞으로도 존댓말 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유세림은 잠시 먼 곳을 보는 듯하더니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몰라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으나, 곧 나를 빤히 쳐다보는 보라색 눈동자를 피할 길은 없었다.
“그러시다면 뭐.”
“……네.”
나는 이제야 이 숨 막히는 대화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저만 반말하죠.”
“뭐…… 뭐요?”
“나만 한다고.”
나는 유세림의 반말을 전 생애까지 통틀어 처음 듣는지라 순간 머리가 굳어 버리고 말았다.
유세림은 그런 나를 쓱 훑어보면서 웃었다. 썩 기분 좋게 느껴지는 웃음은 아니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거슬리는 듯한 삐뚤어진 미소였다. 그러나 평소에 짓던 그림 같은 미소보다는 훨씬 더…… 놈의 본질에 가까워 보였다.
“어깨는 던전에서 다친 거 아니지?”
이어진 자연스러운 반말과 곤란한 질문. 나는 입을 다물고 놈을 노려봤다. 하지만 유세림은 이번엔 웃지 않은 채 물었다.
“백희도가 그랬어?”
“……!”
“새벽에 살금살금 나가는 소리, 들었거든.”
나는 이제 완전히 굳어 버렸고, 유세림은 표정에 별반 변화도 없이 다친 내 어깨에 다시 손을 얹었다.
아까처럼 힘을 주진 않았지만, 충분히 오싹해 소름이 끼쳐 왔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툭. 투툭. 그래서 나는 유세림이 내 방한복의 단추를 뚝뚝 뜯어낼 때에도 얌전히 있었다.
유세림은 시커멓게 부어 있는 내 어깨를 보고, 처음으로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구하기 힘든 포션을 하나 꺼내 한 손으로 밀봉된 뚜껑을 딴 뒤, 멍 위로 포션을 부었다.
문제는 포션이 상처 입은 곳엔 흡수되지만, 아닌 곳에선 그냥 물처럼 흐른다는 것이다. 포션이 흘러 안에 입은 평상복이 젖어 가는 느낌은…… 이상하게 수치스러웠다.
“나랑 선 지키고 싶으면 백희도랑 얽히지 마세요, 한솔 씨.”
“…….”
놈은 그렇게 포션 하나를 다 부어 내 어깨를 치료해 준 뒤, 그제야 다시 가증스러운 존댓말로 돌아갔다.
톡톡, 어깨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태도가 어제의 백희도를 연상시켰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쪽’ 세계로 성큼 건너가는 유세림을 노려봤다.
* * *
‘유세림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나는 이쪽 세계로 넘어와서도 계속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방한복을 툭툭 뜯어내던 손길, 내리깐 눈과 차갑게 부어지던 포션 따위를 말이다.
‘백희도와 내가 만난 걸 알면서도 묵인한 이유는 뭐고……. 그러면서 이제 와서야 기분 나빠 하는 이유는 또 대체 뭔데?’
나는 변덕스러운 유세림의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의도를 파악하느라 애를 썼다. 물론, 애쓴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그냥 포기했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음에 백희도와 만난다면, 유세림이 알아차려선 안 돼.’
였다.
다음엔 갑자기 말을 놓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위험하다고 할까?
하지만 백희도는 뇌령검 사건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유세림을 견제할 수 있는 내 유일한 인맥이다. 좀 변태지만 말이다.
“하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는 인상을 쓰면서 그간 못 본 메일 함을 살펴봤다.
그런데, 백희도에게서 온 메일이 있었다.
[***―****―****]
내용엔 낯선 번호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메일 주소가 놈이 내게 적어 줬던 그 주소여서 확실히 백희도가 직접 보낸 게 맞는데…….
‘하루 만에 뭔가 알아낸 건가?’
결국, 나는 낯선 그 번호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뚜르르― 뚝.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딱 한 번만 들렸을 때 바로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놈의 소름 끼치는 저음이 수화기 너머에서 분명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