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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2/104)
  • 11화

    그날, 우리는 던전 클리어를 포기하고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던전은 하루 한 번 리셋이 되기 때문이었다.

    백희도가 먼저 올라갔으므로 (그리고 그의 던전 클리어가 확실하므로) 이튿날 던전을 돌기로 하고 내려온 것이다.

    나는 숙소에 틀어박혀서, 다시 한번 품속에 넣어 둔 수첩을 꺼내 들었다.

    [ㅇㅅㄹㅈㅇㄱ]

    [3. 백희도]

    그리고 백희도를 떠올리며 그의 이름 석 자를 썼다. 기분이 요상했다. 이름을 쓴 것만으로 뭔가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느낌이랄까.

    휙, 휙.

    나는 머리를 저으며 백희도에 대한 다른 생각을 떨쳐 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뇌령검 사건에 밑줄을 그으며 내 계획에 백희도를 이용하면 어떨까, 하고 궁리해 보았다.

    유세림이 워낙 대외적인 이미지를 잘 가꾼 터라, 사실상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니까. 그러니 한 명이라도 유세림을 나만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이해서 나쁠 게 없었다.

    왜 여태껏 생각을 못 했지? 싶을 정도로 백희도는 어쩌다 유세림과 마주칠 때면 죽일 듯 달려들곤 했다. 무슨 사연 때문인진 몰라서 당시엔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 마음이 뭔진 알 것 같달까.

    그리고 과거, 백희도는 뇌령검 사태에 휘말리지만 않았어도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뇌령검 사태는 지금으로부터 약 3개월 뒤에 일어나니까, 백희도를 살리려면 그 전에 만나서 설득을 하든가 아니면 뇌령검엔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뇌령검이라는 아티팩트에 관한 이야기도 다 구라였고.’

    뇌령검을 손에 넣고자 혈안이 된 수백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갈 때까지도 유세림은 그게 가짜라는 걸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놈이 아티팩트를 찾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유세림이 굳이 뇌령검을 얻으려 하지 않은 것은, 그 아티팩트가 진짜가 아니라서일 확률이 크다는 뜻이다.

    유세림처럼 진위를 구별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등급을 올려 준다는 소문이 있는 뇌령검에 홀릴 수밖에 없겠지. 나도 소문만 들었을 땐 엄청나게 가지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백희도에게 그 뇌령검이 가짜라는 걸 알려 주고, 겸사겸사 놈과 파티까지 맺은 뒤, 유세림을 처리하는 데 협조해 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가능할지도?’

    또 유세림이랑 백희도가 싸울 때 내가 유세림을 저주한다거나 해서 백희도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줄 수 있잖아?

    게다가 유세림이 직접 ‘같은 스승 아래서 수학했지만, 사이가 나쁘다’라고까지 말했으니 둘을 싸움 붙이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

    그렇게 생각하며 넌지시 숙소 창밖을 내다보던 때, 나는 어렴풋이 저무는 노을 아래서 키가 큰 남자가 후드를 뒤집어쓰고 천천히 마을로 내려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걸음걸이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리 봐도 백희도였다.

    ‘혼자서 반나절 만에 혹한의 성전을 클리어 하다니…….’ 

    나는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백희도가 머무는 숙소와 이어 불이 켜지면서 확인한 그의 방까지 알아낸 뒤에는 자꾸 긴장되어 방 안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늘이 백희도를 만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그래. 백희도를 오늘 새벽에 만나야겠어.’

    결국, 나는 그렇게 결심하고선 품속에 있는 돈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 * *.

    그날 새벽. 나는 살금살금 발에 힘을 주고 숙소를 빠져나왔다. 

    유세림이 머무는 숙소 앞을 지날 땐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움직였으나, 낡은 나무 바닥은 끼익끼익 음산한 소리를 오랫동안 냈다. 그래도 다행히 유세림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재빨리 백희도가 머무는 숙소로 갔다. 

    사실 아까 저녁에 이곳 숙소 주인에게 돈을 좀 주고, 백희도에게 쪽지를 하나 전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 부탁이 제대로 먹혔고, 백희도도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면 나왔겠지만…….

    끼이익―.

    새벽, 바(Bar)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바에 나와 있던 숙소 주인은 내 표정을 보고는 꽤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그 양반이 쪽지를 읽곤 살벌한 얼굴로 쫙쫙 찢어 버리더라구요. 뭐…… 더 말도 못 붙였습니다.”

    “……네.”

    나는 깊은 실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뒤를 돌았는데…… 그러자마자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줄 알았다. 어느새 엄청난 덩치의 백희도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이익!”

    숙소 주인도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백희도를 보고 놀랐는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우왁!”

    나 역시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고, 백희도는 그런 내 멱살을 잡았다. 이어 백희도는 그 상태로 내 입술에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술 처먹은 것도 아닌데. 헛소리를 주절주절 잘도 써 놨더라, 너.”

    혹시 술을 마셨나 냄새를 맡는 건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백희도가 입을 열었다. 나는 공포와 알 수 없는 미묘한 긴장에 목울대를 꿀꺽 삼켰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백희도도 분명 내 쪽지를 읽고, 찜찜한 구석이 있으니까 내려온 게 분명한 것일 테니 말이다.

    “……제가 쪽지에 쓴 건 전부 사실이고, 백희도 씨를 도우려고 하는 제 마음도 마찬가지로 진실합니다.”

    “그 복장을 하고 와서?”

    백희도는 유세림의 파티원복을 힐끔 보곤 비웃었지만, 나는 그때 오히려 백희도의 까만 두 눈을 쳐다볼 수 있었다. 아니, 노려보는 것에 더 가까웠다.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시선이었으니까.

    “믿어요. 왜냐면 나는…… ‘유세림을 죽이고 싶으니까’.”

    마지막 말은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지만, 백희도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백희도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나를 마치 짐짝처럼 내팽개치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그렇다는 놈이 유세림 새끼 파티에 들어가 있어? 왜? 이건 진짜 이유가 궁금한데?”

    “……그쪽이 협조하기 전까진 전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유세림한테 배신이라도 당했나?”

    “……!”

    백희도는 창백히 변한 내 표정을 보곤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설마, 고작 그런 일로 날 찾아와서 유세림 좀 죽여 주세요~ 징징하려고 쪽지까지 보낸 거야? 하아……. 이래서 등급 낮은 새끼들하고는 말도 섞기 싫다니까.”

    “무, 뭐라고?”

    “네 쬐깐한 머리통에 든 생각이야 뻔하지, 뭐. 네 힘으로는 안 되니까 나를 네 검으로 쓰고 싶다, 이거 아니야. 근데, 나는 좀 비싸.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내 사용료를 지불할 수 없을 만큼.”

    “…….”

    “그러니까, 복수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그 새끼 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주워 먹고 살아. 네 등급에 걸맞게.”

    나는 백희도의 폭언을 들으며 손을 벌벌 떨었다. 그래, 내가 착각했다. 유세림의 적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R등급 새끼들은 전부…… 형을 제외하면……. 

    ‘이 개 같은 놈들……!’

    인성이 돼먹지 못한 새끼들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손등 뼈가 튀어나올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가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아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쉰 끝에, 여전히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백희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 얼굴만 반반한 입에 걸레 문 새끼야. 너도 어디 한번 실컷 욕이나 처먹어 봐라.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백희도.”

    “호오.”

    “너 새낀 뇌령검인지 뭔지를 찾으러 가서 개죽음당할 운명이야.”

    “……뭐?”

    백희도의 표정이 삽시에 변했다.

    이대로라면 3개월 뒤에 죽을 녀석이다. 지금쯤이면 뇌령검 소문은 아는 이들 사이에선 암암리에 이미 퍼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백희도의 반응을 보고 그게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놈이 뇌령검을 진심으로 탐내고 있다는 것까지 말이다.

    “너, 그 소문을 어디서 들었지?”

    “알 것 없어.”

    “하……. 내가 대화 몇 마디 나눠 주니까, 지금 장난하는 거 같냐?”

    “아니? 하지만, 내가 말한 건 사실이야. 넌 뇌령검 근처도 못 가서 뒈지고 남 좋은 일만 실컷 해 줄 테지. 적어도 네 목이 잘리면 좋아할 인간이 한 명. 아니, 두 명은 있으니까.”

    “…….”

    내 말에 백희도는 피식 웃었다가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다가와 내 목을 콱 붙잡았다.

    고작 그 정도 동작에도 나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꼈으나, 백희도가 내 목을 조르거나 꺾진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갈 순 있었다. 물론, 말이 끝나면 놈이 내 목을 꺾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백희도. 뇌가 있으면 뇌령검이 진짜인지부터 생각을 해 봐. 그리고 그게 진짜면 ‘우리’가 왜 안 움직이는지도 한번 생각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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