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들르는 마을마다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유세림의 파티원이 되어서 그런지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가는 것도 편해졌고, 마을 사람들에게 일단 어느 정도의 환대와 존경을 깔고 들어가니 사실상 전보다 형편이 나았다. 아니꼬워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다들 유세림이 현재 가장 강한 R등급 실력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내가 봐 온 바로도 유세림이 전력을 다한다거나 지쳐 있다는 느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받은 적이 없었다. 아주 얄밉게도 말이다.
유세림은 필드에 나타난 몬스터를 처리할 때도, 마을에서 환대를 받을 때도 항상 태연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정도 실력이면 혼자 다녀도 될 텐데, 굳이 C등급인 나까지 귀찮게 챙겨 다니는 이유가 뭘까…….’
심지어 애완조인 핑까지 데리고 다닌다. 나는 저 핑이라는 애완조가 내가 죽을 때까지도 저 모습 그대로라는 걸 알고 있다.
즉, 핑이 뭔가 최종 병기 같은 것도 아니라는 셈이다. 예전에 한번 놈에게 핑을 대체 왜 키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놈이 했던 대답이 가관이었지…….
‘좀 귀찮은데, 이 정도는 살면서 감수해야 할 것 같아서 키우고 있어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고, 유세림은 또 그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맹한 미소만 지어 댔었다. 답답한 새끼.
지금도 놈이 했던 말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R등급쯤 되면 세상이 다 단조로워 보여서 일부러 자극을 좇거나 고상한 취미라도 하나 생겨야 한다는 걸까?
하지만 형을 찾아야 하는 내 입장에선 저 신선놀음이 죄다 나를 약 올리는 것처럼만 보였다.
왜 진짜 힘이 필요한 나 같은 사람은 C등급 거지로 각성하고, 유세림처럼 나사 하나 빠진 인간은 R등급으로 각성해서 핑 같은 거나 돌보며 사는 걸까?
‘하……. 생각할수록 열 받으니까, 그냥 생각을 말자.’
나는 애써 마음을 도닥이며 두 번째로 가야 하는 던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성규림을 잃으면 안 돼.’
이번에도 나 때문에 그녀가 죽는다면, 그것만큼은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유세림의 뒤통수를 칠 거긴 하지만, 성규림 씨만큼은 살리고 떠날 생각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번에 설령 누군가 이상하게 생각하더라도 이 던전에 대해 잘 아는 척할 예정이다. 변명거리야 나에겐 무적의 한성훈, 잘나가던 형이 있으니까 말이다.
‘왜 이렇게 잘 아냐고 물으면, 형이 알려 줬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래서 던전과 가장 가까운 마을에 들르자마자 내가 한 일은…….
“방한복을 입으라고요?”
“냉기 저항 아티팩트가 있으면 더 좋지만, 없으면 방한복이라도 입어야 합니다.”
나는 지나치게 얇고 가벼운 파티원 복장을 지적하면서 미리 ‘이쪽’에서 주문해 온 방한복을 우르르 짐에서 쏟아 냈다.
“대체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오셨나 했더니…….”
성규림 씨는 감탄하면서 내가 매직으로 써 놓은 ‘성규림’이라는 글씨에 살짝 감동 받은 듯 보였다.
“어머, 제 것까지……. 설마, 저희 파티원 것 모두 사 오신 건가요?”
“네.”
사실 성규림 씨 것만 준비하려다가 뭔가 이상한 오해를 받거나 할까 봐 미리 그냥 다 주문했다. 돈은 아까웠지만, 이래야 설득력이 생길 테니까.
다른 녀석들도 성규림 씨처럼 제 이름이 적힌 방한복을 하나씩 챙겨 갔다. 유세림만 빼고.
“방한복은 왜 필요한 건지, 설명을 들어도 될까요?”
“앞으로 가게 될 던전의 이름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놀란 표정의 파티원과 여전히 방한복을 챙기지 않은 유세림. 나는 놈이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어떻게 알았냐, 등등 추궁할 줄 알았으나…….
“알겠습니다. 날씨가 추운 곳인가 보네요.”
“…….”
“아, 그리고 방한복은…… 저는 냉기 저항 아티팩트가 있어서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훌쩍 뒤돌아섰다.
나는 남은 한 벌의 방한복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배낭에 다시 넣어 두었다. 참 별것도 아닌데 사람 기분 망치는 데 재능이 있는 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 *
[성스러운 곳에 침입자가…….]
[불경하도다.]
우리는 방한복을 입고, 눈이 덮인 설산을 올랐다.
두 번째로 가는 던전의 이름은 바로 [혹한의 성전]. 말 그대로 얼어붙은 옛 신전이 이번에 우리가 클리어 해야 할 던전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전보다 가는 길에 몬스터가 많이 줄어 있었다.
‘뭐지? 전에는 엄청 많은 사도와 성기사가 공격해 왔는데……. 지금은 한두 마리 정도밖에 없잖아?’
보통 필드에 몬스터가 가장 많이 분포한 곳이 던전 근처였기 때문에, 나만 이상함을 느낀 건 아닌 것 같았다. 유세림은 처음으로 밋밋한 미소를 거두고, 무표정이 되어 설산에 남은 흔적들을 유심히 살폈다.
“우리보다 앞서간 파티가 있나 본데?”
김재호가 의심쩍은 듯 말하자, 유세림이 인상을 구기며 대답했다.
“파티가 아닙니다.”
유세림이 그 말을 마치는 동시에 희미하게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고 긴 머리칼을 펄럭이며 우아하게 검을 휘두르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왠지 익숙해…….’
그런데 내가 저 남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남자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와 나는 과거에 분명 만난 적이 있었다.
곧 잠시, 그가 모든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천천히 나를 향해 뒤돌 때 내 머릿속도 전구가 켜지는 것처럼 ‘아!’ 하고 그가 누군지 기억나기 시작했다.
‘저자는 분명……!’
[죽어라―!]
하지만 내가 너무 그를 보는 데 집중했기 때문일까? 순간 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성기사 한 명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놈은 내게 검을 찌르듯 내밀었다.
이대로 가면 개죽음이었다. 하지만 쌓인 눈 때문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해서 뒤로 피하려다 멍청하게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자 몬스터, 성기사는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려 검으로 나를 내리치려고 했고.
“[뒤집어쓴…… ]!”
나는 어떻게든 막아 보고자 디버프를 시전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스킬을 시전하기도 전에 이미 검이 내 이마 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챙!
휘리릭―!
그런데 그때, 내가 지켜보고 있던 검은 머리 남자가 어느새 성기사의 검을 내 코앞에서 막아 주고 몬스터의 심장을 빠르게 찔렀다. 뒤늦게 날아온 유세림의 채찍도 성기사의 양손을 포박한 상태였다.
나는 심장이 덜덜 떨리는 걸 느끼며 검은 머리 남자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것을 보았다.
“……뭐야, 유세림의 파티원이었냐? 괜히 구했네.”
남자는 그야말로 옥처럼 아름다운 미인이었는데, 그 예쁜 얼굴과는 정반대로 소름 끼치는 저음의 소유자였다.
동시에 나는 그간 내가 어떻게 이 남자를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었을까 싶었다.
‘백희도…….’
유세림의 유일한 라이벌이자 뇌령검 사건 때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진…… R등급의 전사.
“가, 감사합니다.”
“……됐어. 꺼져라.”
백희도는 기분이 나쁜 듯 내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사박사박 눈을 밟고 사라졌지만, 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흰 도화지에 그 혼자만 먹물처럼 시선을 빨아들이는 느낌이었으니까.
“……괜찮습니까?”
그때 대체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소리도 없이 다가온 유세림이 내게 안부를 물었다. 나는 백희도의 절도 있는 걸음걸이를 보다가 유세림의 목소리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놈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밋밋하거나 상냥한 체하는 미소와 거리가 먼, 눈을 내리깐 차가운 얼굴.
아니지. 나는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유세림이 나를 버렸을 때.
“……괜찮, 습니다.”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유세림이 내민 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세림은 아무런 말 없이 무례하게 구는 나를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한번 백희도가 있는 곳을 힐끔 쳐다봤을 땐, 마치 경고하듯 말했다.
“저 남자는 백희도라고 합니다. 같은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죠.”
“…….”
“그래서 그와 나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아요. 아마 내 파티원이라는 것만으로도 무시당하거나 심하면 공격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도 점이 되어 사라져 가는 백희도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지금까지 가슴이 계속 뛰고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