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04)

8화

나는 유세림이 순순히 내 말에 그러라고 한 것이 껄끄러워 속으로만 역겨워했다. 

‘내가 표유정에게 견제당하는 걸 의도하는 건가? 능구렁이 같은 새끼……. 예나 지금이나 무슨 생각인질 모르겠네.’

“감…… 사합니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유세림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어쨌든, 그런 해프닝이 있고 나서 우리는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몬스터들이 출몰했다. 던전 근처이니만큼 몬스터들이 많은 건 상식이라, 나도 준비를 단단히 했기에 다른 파티원의 짐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특히…….

“[무거운 걸음].”

“오! 고마워요.”

성규림 씨를 집중적으로 마크했다. 

그녀는 강력한 마도사이지만, 때문에 적들에게 가장 눈에 띄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규림 씨의 뒤에서 튀어나오는 놈들에게 디버프를 걸어 움직임이 느려지게 하거나 눈을 멀게 하는 등, 규림 그녀에게 몰리는 몬스터의 공격을 분산시키려고 노력했다.

“[도깨비 불]!”

규림 씨가 부채를 착―! 펼치면서 주특기인 불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운이 좋은 건, 이번 던전은 불 계열 마법이 아주 잘 먹히는 던전이라는 점이다. 화르르 숲에 불이 붙으면서 덤벼들던 ‘늪 고블린’이 양초의 심지가 된 듯 타올랐다.

짜악―!

물론, 유세림 새끼도 만만치 않았다. 놈은 성규림 씨의 두 배는 되는 몬스터를 해치우면서도 그리 어렵지 않은 기색이었다. 다른 파티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의 중심에서 디버프를 난사하며, 던전 초입까지 무사히 안착했다.

“굉장했어요, 한솔 씨!”

던전 초입에 들어서자 다른 몬스터들은 전부 사라지고 약간 숨 돌릴 틈이 생겼다. 그러자 성규림 씨가 내게 다가와 양 뺨을 붉히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어쩜 제가 스킬 쓸 타이밍을 그렇게 잘 아시는 거죠? 오늘은 한 번도 뒤를 걱정하면서 싸우지 않았어요. 대단하세요.”

“벼, 별말씀을요.”

그야 미우나 고우나 1년을 이 파티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고, 성규림 씨와도 두 달은 호흡을 맞춰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파티에 합류하자마자 시기적절하게 디버프를 날리는 모습이 신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괜히 나댔나?’

나는 힐끔, 내 쪽을 보고 있는 유세림을 의식하면서 속으로 약간 능력치를 조정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유세림은 가타부타 별말이 없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지만 말이다.

‘역시, 실수를 좀 했어야…….’

하지만 던전에서의 실수는 곧 심각한 부상이나 죽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팀을 아니, 성규림 씨를 마크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때, 유세림이 내게 말했다.

“한솔 씨는…….”

“네?”

“……아닙니다.”

놈의 싱거운 태도에 저절로 인상이 써졌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나는 성규림 씨 근처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유세림은 기름을 먹인 나무 등에 불을 붙이곤 거대한 동굴에 선두에서 걸어갔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고요의 늪’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에 들어왔다는 알림이 귓가에 울렸다. 성규림 씨도 알림을 들었는지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정면에 몬스터가 있습니다. 바깥에서 마주한 몬스터들에 비하면 몇 배는 더 강력하니, 조심하세요.”

그리고 유세림은 마치 나에게 말하는 것 같은 소리를 하면서 채찍을 엑스 자 모양으로 휘둘렀다.

‘쳇. 주절주절 말 안 해도 알거든?’

현재로선 너희보다 이 던전에 대해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게 나란 말이다.

나는 유세림을 아니꼬워하며 뒤에서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끼고 있던 반지를 왼쪽으로 돌렸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바늘이 튀어나오면서 손가락을 눌러 피가 살짝 나오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상태로 반지 보석에 적절한 게이지가 차오르길 기다렸다.

‘이 던전에서 등장하는 거미 몬스터는 이 정도면 충분해. 보스가 문제지.’

보석에 피가 절반쯤 차올랐을 때, 다시 반지를 오른쪽으로 돌려 잠갔다. 안 그러면 이 게걸스러운 반지는 내 피를 계속해서 빨아 마시니까 말이다.

나는 그 상태로 침착하게 전방을 주시했고, 곧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퀴이이익]

[퀴아아아악!]

컵에 넣어서 갈면 녹차 라떼가 될 것 같은 녹색의 거미, ‘퀴아노’ 다섯 마리가 나타났다.

퀴아노는 패턴이 총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날카로운 다리와 이빨로 물어뜯기, 두 번째는 갑자기 다리를 집어넣고 핑글핑글 돌아서 등에 있는 독을 멀리 퍼뜨리기, 세 번째는 거미줄을 발사해서 옴짝달싹 못 하게 하기였다.

각자 공격 전조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성규림 씨한테만 신호를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퀴이익!]

먼저 튀어나온 거미가 앞발을 치켜들었다. 나는 성규림 씨에게 외쳤다.

“달려들 것 같아요! [무거운 걸음]!”

“좋아요! [도깨비 불]!”

갑자기 움직임이 느려진 거미 녀석은 도깨비 불에 오래 노출되었고, 단단히 구워진 채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곧 거미가 죽었고, 그만큼 경험치가 들어왔다. 

‘옛날엔 퀴아노가 돌격할 때 겁에 질려서 멍하니 있다가 김재호의 도움을 받았었지.’

나는 한쪽에서 도끼를 들고 거미의 다리들을 날려 버리는 김재호를 보면서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그때의 나는 파티에서 짐이 맞았으니까.

‘그냥 저 꼴리는 대로 하는 새끼지만, 뭐. 도움을 받은 건 받은 거니까.’

“[보이지 않는 고통]!”

[퀴아아아아악!]

그래서 김재호의 시야 뒤편에 있던 다른 거미 하나에게 저주를 내려 주었다.

김재호는 몬스터의 비명을 듣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고, 나에게 잠시 시선을 주다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거미를 도끼로 두 동강을 냈다.

그리고, 유세림은…….

휘리릭― 우드득―!

퀴아노 두 마리를 채찍으로 동시에 내려치고, 그대로 내장을 터트려 죽여 버렸다. 확실히 유세림 쪽은 도움이 필요치 않아 보였다.

“대단하세요, 세림 님.”

“감사해요, 유정 양.”

그리고 표유정은 그런 유세림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치유사라 전투에서는 쓸 일이 없으니, 유세림도 표유정을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표유정은 유세림에게 완전히 반한 얼굴로 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반짝반짝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 모습이 거북한 이유는, 나도 예전에 저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둘에게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퀴익…….]

이후 다섯 마리의 퀴아노를 모두 잡은 우리는 역겨운 냄새로 가득 찬 검은 늪에 도착했다.

치유사인 표유정은 약한 독무에 중독되어 눈이 시뻘게진 나는 무시하고 유세림에게만 실드를 걸어 줬다.

‘뭐, 이 정도는 견딜 수 있긴 하니까.’

하지만 유세림의 눈엔 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 모양이다. 놈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로 표유정에게 명령했다.

“실드는 저보단 한솔 씨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유정 양.”

“……알겠어요.”

마지못해 걸어 준 실드라고 해도 금방 독무가 날아가서 쾌적해진 것은 사실이라, 나는 묵묵히 유세림의 기분 나쁜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표유정은 날 죽일 듯 바라봤지만, 뭐 어쩌라고.

[던전의 주인, ‘아르실라’가 등장합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착실하게 던전 보스가 등장해, 그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늪지대에 사는 상체만 여성체인 이무기. 그게 바로 아르실라의 본모습이었다.

[샤오, 내 땅에 온 걸 환영하네.]

아르실라는 쉭쉭거리는 목소리를 내면서 빙그레 웃었다. 여기서 많은 각성자가 착각하곤 하는데, 사실 아르실라가 우리를 환영하는 이유는…….

[부디 내 아이들을 위한 신선한 제물이 되어 주기를……!]

바로 우릴 산 채로 잡아먹기 위해서이다. 

이후, 아르실라는 독으로 가득 찬 늪의 수면을 거대한 꼬리로 퍽―! 하고 쳐서 우리를 향해 날렸다. 

나는 재빨리 덩치가 가장 큰 김재호의 등 뒤로 도망쳤다.

“하……?”

김재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태도였으나, 아까 내게 받은 도움을 떠올렸는지 독무를 방어하면서 아예 나를 제 망토 자락에 넣어 주었다.

김재호는 키가 2미터쯤 되는 데다 덩치 역시 커서 대부분의 독은 놈이 제 상체만 한 도끼를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날아갔다. 

나는 김재호가 기브 앤 테이크가 되는 놈이라는 걸 알고 나선 마음이 편해졌다. 이후, 놈의 망토 자락에서 벗어나 놈과 닿았던 어깨를 탈탈 털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

김재호는 말없이 인상만 찡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