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72화 (172/172)
  • #172.

    휴식

    [-로 보고 있습니다. 2차 대격변 대응 세계 연합은 현재 균열을 총 세 곳으로 축소하였고,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북극 지역 피난과 함께 진행했던 생태종 보호 프로젝트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전문가들은 재앙을 유도하기 위한 균열 중 가장 많은 수정을 설치한 지역인 북극에 이르면 올해 안으로 징조가 보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야생동물들 보호 프로그램…….]

    [강재윤 에스퍼 3주기 추모식이 어제 서울 시청 광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시민과 각성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싱가포르 상공에 예상치 못한 균열이 발생하여 시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으나, 2차 대격변 대응 연합팀의 작업 끝에 금일 새벽 3시 19분을 기준으로 균열이 소멸하였습니다. 싱가포르에 나타난 균열은 지난 2년간 무작위로 발생한 균열 중 가장 큰 균열이었으며, 2차 대격변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며…….]

    [2차 대격변 대응 연합에서 발표한 것처럼 북극 균열이 크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균열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로 인근 지대는 버석하게 마르거나 바닥이 갈라진 게 보입니다. 2차 대격변 대응 연합은 북극 균열 부근 대피령을 내렸습니다. 세계 연합도 필수 인원을 제외한 인력을 대피시켰으며, 현재 현장에는 김현아 에스퍼와 정하진 에스퍼를 포함한 S급 이상 에스퍼 총 일곱 명…….]

    변신 아이템을 사용해 건장한 남자 모습으로 변한 한지수는 정하진과 김현아 사이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그 두 사람이 제 허리를 받쳐 준 덕분에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었던 거였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태풍 같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라.’

    한지수 일행은 균열에서 최소 5km 이상 떨어진 허허벌판에 있었음에도 거센 바람에 휘청거리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만큼 저 거대한 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은 강력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2년 조금 넘는 시간을 균열에 매달리다시피 연구해 왔기에 이제는 모두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불길한 열기와 바람을 뿜어 대는 저 균열이 뜻하는 바를. 이제 정말로 2차 대격변이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푸른 별의 미물을 사랑하는 후원자 중 하나가 언질을 준 대로 바로 오늘이었다. 재앙의 등장이 당일로 다가왔다는 사실에 대해 인류는 동요하고 두려워하는 대신, 그동안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믿고, 기도하며 조율자의 강림을 기원했다.

    인류는 각자 자리를 지키기도 했고, 또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사랑하는 이들과 모여 함께 기도하기도 했다. 두려운 마음을 희망으로 승화하고,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부디, 이 별을 지켜 줄 조율자가 재앙과 큰 편차 없이 강림하기를.

    2년 넘는 동안 재앙이 나타날 것으로 점지해 둔 지역의 대피는 이미 마친 단계. 재앙이 난리를 치더라도 조율자가 빠르게 강림해 준다면 이 별은, 그리고 인류는 무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두가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균열이 불길한 바람을 내뿜기 시작한 지 정확히 32시간이 되었을 무렵. 끔찍한 상처가 무수히 난 손이 균열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임세주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에도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수많은 상처로 도배된 기괴하기 짝이 없는 손이 푸른 별의 하늘을 침범한 순간은 각종 장비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전 세계 주요 장소나 각자 집에 모여 있던 인류는 너나 할 것 없이 손에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이 덜덜 떨려 더 꽉 잡아 쥘지언정, 공포에 질린 손을 뿌리치거나 모르는 체하고 도망치는 이는 없었다.

    인류는 각종 매체에서 나오는 실시간 상황을 지켜보며 기도를 멈추지 않고 쭉 이어 나갔다. 균열 바로 앞에서 드디어 등장한 재앙을 지켜 보던 이들 역시 손에 손을 잡았다. 다른 게 있다면 기도하려는 게 아니라 거대한 힘에 맞서 버티기 위해, 나동그라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태풍과 같은 바람이 허허벌판을 휩쓸기 시작한다. 미리 주변을 정리한 덕분에 평소 주둔하던 천막이나 차 등 날아다닐 만한 위험한 물건은 없었지만, 한지수는 정하진의 품에 꽉 안긴 채 거의 줄에 걸린 빨랫감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준비한 S급 방어 아이템을 전신에 두르고 있어도 버틸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기운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하늘이 찢어지고 두 동강 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이 푸른 별을 부수기 위해 시동하고 있었다.

    고작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균열을 비집고 나온 손이 둘로 늘었다. 균열 틈새가 점점 저 벌어지기 시작하고 얼마 가지 않아 양손 사이로 끔찍한, 얼굴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

    한지수를 품에 안은 정하진은 균열을 통해 나오는 재앙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재앙을 처음 보는 게 아닌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직접 마주했던 다른 시간 선의 재앙과 이곳에 나타난 재앙이 다르다는 것을.

    지금 균열을 찢으려는 재앙은 얼굴이라 불러야 할 법한 부위에 무려 수천 개의 눈을 달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뜨지 않고 있었지만 제대로 뜨고 있는 거대한 눈알은 정확하게 정하진을, 아니. 그 품 안의 한지수를 담고 있었다.

    힘을 계승 받은 존재가 누구인지 제대로 감지한 눈빛이었다. 거대한 눈동자의 시선을 오롯이 받은 한지수의 몸이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그의 몸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솔직한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한지수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한지수는 이곳에 자신이 꼭 있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고, 그 결정을 존중하기에 정하진 역시 그를 품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한지수의 결정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한 터였다.

    설령 지금, 이 순간이 두 사람이 맞이할 마지막이 된다고 하더라도 함께하고 싶었으므로.

    ‘전과는 다르게…….’

    오늘이 인류의 마지막이 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와 끝까지 함께하는 것. 오직 그것 하나면 된다고 정하진은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각오를 다지는 와중에도 정하진은 이상하리만큼 확고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제 품에서 벌벌 떠는 한지수가 겁에 질렸을지언정, 마음만큼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 때문일지도 모르고, 아까부터 당장에라도 이 땅으로 침범하려는 재앙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모습 때문일지도 몰랐다.

    “……망설이고 있군요.”

    이유는 모르지만, 재앙은 기세만 내뿜을 뿐. 바로 이곳으로 침범하지 않고 있었다.

    한지수와 임세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A급 이상 각성자들은 미묘한 재앙의 태도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균열을 살폈다. 잠시 후, 먼 거리여도 균열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시작한 몇몇 이들과 고글을 끼고 특수 장치를 통해 균열을 살피던 임세주 역시 입을 쩍 벌렸다. 똑같은 고글을 끼고 있던 한지수도 마찬가지였다.

    “한지수 가이드! 저기, 저 위쪽이요! 재앙 손 위에!”

    “보여요!”

    임세주가 말을 다 맺지 않았는데도 한지수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현상이니 다른 각성자들의 눈에도 선명히 보일 터였다. 그렇기에 임세주와 한지수는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그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한지수를 품에 안은 채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제 눈으로 보는 게 현실인지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깜빡이기도 하고, 자기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맞는가 싶어 그답지 않게 눈을 거칠게 비비기도 했다.

    마치 겪은 적 없음에도 뇌가 기억하는 선명한 데자뷰를 경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예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대재앙과는 확실히 다른 부분이 있었다. 바로 재앙이 미처 전부 나오기도 전 그 손 위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존재였다.

    ‘조율자가…….’

    생각이 미처 다 이어지기도 전,

    “왜 이렇게 늦었냐!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조율자의 정체를 아는 극소수의 멤버였던 김현아가 저 멀리 있는 그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그러다 강한 바람에 뒤로 휘청였지만, 다시 자세를 잡고 씩 웃으며 이번엔 더 크게 손을 흔들었다. 복잡한 감정으로 반짝이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김현아의 반응으로 조율자를 보고도 의심하던 이들의 반응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가 맞다는 것을,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이들은 놀라 눈을 크게 뜨다가, 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다시 눈을 반쯤 감고는 조율자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재앙에 대응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 사이에서 현재 3주기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는 주인공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주춤거리는 재앙의 손가락 위에 올라선 조율자는 지구의 복식과 약간 차이는 있지만, 멋지게 펄럭이는 코트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코트와는 다르게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재앙의 손가락을 발판 삼아 서 있을 뿐이었다.

    “하…….”

    저도 모르게 탄식한 한지수는 장치로도 희미하게 보이는 흐릿한 인영의 그를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가 제게 손 흔들며 인사한 김현아에게 무어라 대답한 것인지, 다른 말을 한 것인지 몰라도 붉은 입술이 무어라 움직거렸다. 그러나 직후 그는 바로 한지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지수는 저 먼 곳에 있는 조율자가 어디에 있어도 자신을 알아봐 줄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비록 모습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나, 제 몸을 두른 기운으로 이미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 역시 알기에…….

    그렇기에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그리고 꼭 하고 싶었던. 해야만 했던 말을 꺼냈다.

    “----.”

    변변치 않은 시야로 겨우 구분하던 흐릿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마침내 균열이 벌어지며 하늘이 두 쪽 나듯 갈라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겁에 질려 도망가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날, 인류는 기도하고, 웃고, 울며 푸른 별에 강림한 절대적인 존재의 이름을 외쳤다.

    #에필로그

    “그렇게 긴 시간 푸른 별을 지켜 준 방랑자는 별의 영웅이 되었고, 재앙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을 때 다시 하늘로 날아가 여행길에 올랐단다. 아주 오랜 시간 만나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또 다른 푸른 별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지.”

    “…….”

    “…….”

    평소와 다르게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한 아이와 햄스터 한 마리가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게 방치하며 이야기를 들려준 안식의 신이 곁에 앉은 자그마한 아이들을 눈에 담았다.

    이제 막 4~5살 정도가 된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눈을 깜빡이며 안식의 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안식의 신은 아이의 곱슬곱슬한 크림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햄스터 귀라고 오해받을 법한 짧디짧은 토끼 귀가 손바닥에 꼿꼿하게 스치는 감각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이 작은 아이가 원한 탓에, 골든 햄스터 토토의 모습으로 곁에 앉아 있던 한지율은 이야기가 끝났음을 감지하고 벌떡 일어나 물었다.

    “아저씨! 그럼! 그럼! 이제 진짜로 재윤이 형이 오는 거예요!?”

    “응.”

    “언제요!?”

    “곧?”

    “곧이 언제!?”

    “음…….”

    안식의 신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이미 이 별의 궤도를 타고 진입하는 중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더 시간적 여유를 주기로 결정했다.

    “아마 내일?”

    “……!”

    내일이라는 말에 한지율이 변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펑-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했다. 여기에 왔을 때보다 제법 성장한 덕분에 옆에 앉은 아이보다 형 티가 났다. 한지율은 제가 아끼는 동생이자 안식의 신의 조카를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라비! 우리 당장 주방에 가야 해! 과자를 잔뜩 구워 달라고 해야 해! 내일은 파티해야 하니까!”

    “……파티!”

    라비라 불린 아이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지만, 제대로 이해한 듯이 발딱 일어나 무릎을 탁탁 털더니 한지율의 손을 꼭 잡았다.

    “큰아빠. 라비는 지유리 형아랑 파티 준비할래요.”

    “그럴까? 우리 파티 준비할까?”

    “네!”

    “네에에!”

    두 아이가 힘차게 대답하자 안식의 신은 “그럼 큰아빠도 도와줄게. 아저씨도 파티 준비에 끼워 주라, 지율아.” 장난스레 말하며 두 아이를 품에 안아 들고 놀이방을 나섰다.

    케이 후작 성의 본관이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갑자기(?) 시작된 파티 준비로 활기를 띠고 있을 무렵.

    후작 성 근처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지수는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한 것을 보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밤 늦게나 오려나…….’

    지수는 바로 어제 안식의 신, 그러니까 케이 후작의 말로 오늘이면 그가 이곳 필리스에 도착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니, 좋게 말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거고, 사실은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혼자라면 정신 나간 행동을 보여도 괜찮겠지만, 제겐 모범을 보여야 할 어린 동생이 있었기에 오늘 하루만큼은 든든한 케이 후작에게 동생을 맡기고 홀로 산책을 나온 터였다.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든 억누르고자 육체적 피로를 쌓기 위해 하염없이 걷고, 걷고. 그러다 지치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그 순간들조차 내내 지수의 시선은 오직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맑고 푸르렀던 하늘은 어느덧 노을 지기 시작했고, 저 멀리 보랏빛과 군청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엔 벌써 별의 바다가 은은한 파도가 되어 밀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

    빠르게 어두워지는 하늘을 응시하던 지수는 불만스레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니, 보통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 딱 저렇게 하늘이 예쁘게 분홍색도 있고 보라색도 있고 까맣기도 하고, 하여간에 별이 아름다운 시간인데. 이럴 때 딱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야?’

    필리스에서 계절이 바뀔 동안 수많은 하늘을 보고 바다를 봤지만, 오늘의 하늘은 유독 다양한 색을 품고 있었다. 예쁜 색 물감을 잔뜩 풀어 둔 것 같은 아름다운 하늘엔 벌써 별이 가득했다.

    아직 다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저리 별이 선명하고 밝은 걸 보면 오늘은 몇 겹의 은하수가 하늘을 밝힐지 기대될 정도였다. 터덜터덜 걷던 지수는 결국 모래사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흥분이 주체 되지 않아 일부러 몸에 힘을 빼려고 밥도 굶고 종일 걸었더니 더는 기력이 없었다.

    ‘여기 와서 몇 년간 뒹굴며 지내서 그런지 체력도 거지가 됐어…….’

    운동은 나중에. 나중에. 계속 미루며 지내길 몇 년. 예전에도 종이 인형이라고 불렸던 지수는 지금 거의 물먹은 기름종이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계속 빠지는 체력과 근육에 회의도 들었지만, 오늘만큼은 다행이라 여겨졌다. 덕분에 강제로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으니까.

    ‘형이 들으면 웃겠지.’

    이젠 체력 빠진 몸이 슬슬 칼로리를 섭취해 달라고 시위하는 건지 손가락이 떨렸다. 조금 더 버텨 보기 위해 가볍게 메고 온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단맛 나는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셨지만,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고정한 채였다.

    강재윤이라면 저 하늘 어딘가에서 나타나 자신이 있는 곳으로 곧장 날아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한지수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 순간마저도 행복했다.

    다만, 오래 유지하고 싶은 행복은 아니었다. 강재윤에 비할 것은 아니나, 한지수 역시 오랜 시간 그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다. 인내심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지금 당장 강재윤을 만나고, 만지고, 끌어안고 싶었다.

    그동안 계속 꿈에서 그렸던 이가 아닌 진짜 강재윤을 만난다면 다신 그 어디에도 보내기 싫었다. 24시간 떨어지지 않고 오직 제 곁에만 두고 싶은,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

    내내 앞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뀐 탓에 놀란 지수가 펄떡거리다시피 뒤를 돌아봤다. 유감스럽게도 변한 건 없었다. 새로운 이의 등장도 없었고, 드라마틱한 감동의 재회도 없었다.

    “…….”

    실망감을 가득 안고 다시 앞으로 돌아앉은 지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통 영화에선 뒤돌아봤다가 실망하고 다시 앞을 봤을 때, 딱- 하고 나타나 있던데…….’

    인생은 역시 영화와 다른 법이라며 실망한 지수는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턱을 괴었다. 잔잔한 파도를 보고 있자니, 차라리 지금 잠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면 좋겠다고, 그리고 자길 깨워 주는 사람이 강재윤이면 좋겠다고 바라며.

    차라리 그게 낫겠다고 생각한 지수는 무릎에 한쪽 볼을 괴고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 냄새, 그리고 파도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인식됐다.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밀려 나가고, 물이 찰방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따스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간혹 코끝을 간질이기도 하는 동안에도 지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강재윤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쭈뼛거리며 소속사 실장을 따라갔던 연습실에서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 서로 이름을 소개하고 잘 지내보자며 먼저 손을 내밀던 어른스러운 모습. 어린 나이에 생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악수를 했던 날.

    지금처럼 혼자 쭈그리고 앉아 어딘가에 홀로 처박혀 있을 때면 조용히 곁에 다가와 어깨를 빌려주었던 날도. 굳이 말로 위로하지 않아도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제게 그 무엇보다 큰 힘을 주었던 사람과의 시간.

    함께 연습하고, 함께 노력하고, 함께 꿈을 이루고, 서로가 ‘함께’인 게 당연했던 나날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들과 대격변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곁을 지켜 주었던 사람. 세상이 안정되었을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늘 제 곁을 지켰던 이와 나눈 모든 것이 너무도 소중했다.

    불가피하게 저만 두고 사라져 버린 이후에도 늘 어떻게든 제 안녕을 기원하며 안식의 신을 쥐고 흔들었을 이를 생각하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쿡쿡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문득. 한지수는 강재윤의 어깨에 기대앉아 그를 가이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손끝이 살짝 저린 것 같은 감각이 퍼지며 손목, 팔, 어깨까지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번지고. 이내 그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은 전신에 퍼져 마치 파도치듯, 아니. 심장 고동처럼 일정하게 몸을 두드리곤 했다.

    소중한 사람. 내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에게 제 모든 것을 내주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그와 손을 잡고, 입술을 맞대고, 그의 목을 끌어안고, 너른 품에 안겨 이 충만함을 나누어 주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완벽히 하나가 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이딩이란 그랬다. 굳이 접촉하지 않아도 할 수 있지만, 함께 몸을 맞대고 있으면 훨씬 더 강한 기운을 끌어낼 수 있었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수는 강재윤과 있을 때면 늘 그런 기분을 느꼈다. 굳이 몸을 포개지 않아도 손을 잡거나, 아니면 그의 곁에 앉아 있기만 해도 말이다.

    마치 지금처럼.

    “…….”

    눈을 감고 있는데도 뜨거운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옆으로 괸 머리를 돌려 무릎에 이마를 박은 채 다리를 끌어안고 있으니, 몸을 가득 채운 충만한 기운이 흘러넘쳐 한곳으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바로 제 몸의 왼편으로.

    처음엔 은은하게 흘러가던 기운이 점점 정도를 모르고 흘러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부족하다는 듯이, 더 필요하다는 듯이 갈급해진 흡수를 느낀 지수는 눈물로 제 허벅지를 적시며 어깨를 떨었다.

    “흐윽…….”

    눈을 떠야 하는데. 이게 다 착각일까 싶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제 몸이 그저 그리움에 반응하고 혼자 멋대로 가이딩을 방출하는 거면 어쩌지 싶어서. 흐느끼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해 몸을 더 웅크린 순간.

    늘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지수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지수의 둥근 머리통에 날렵한 턱날이 느껴진다.

    “으, 으흑…….”

    그 어떤 대화도 없었고, 지수를 달래 주는 흔한 말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수는 이 품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어으, 으흡……, 흐윽…….”

    어서 오라고. 정말 보고 싶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을 벌린 순간 울음만 터졌다. 준비한 인사는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이제 그를 보고 웃어 주기라도 하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상대 역시 억누르기 힘들 만큼 북받치는 감정 탓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어.”

    지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춰 나오지 못하고 뭉개져 흘러넘쳤으므로. 그렇기에 지수는 대답 대신 제 곁에 나란히 앉은 이를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잘 돌아왔다고.

    <끝.>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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