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흐름 6
‘형은…….’
한지수는 육신이 존재하지 않는 꿈속임에도 눈꺼풀을 비집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현실의 육신이 대신 울고 있으리라. 이대로라면 안 그래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정하진에게 제 우는 모습을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한지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재윤이 형은…….’
이곳에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덕분에, 눈앞의 모든 장면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는다. 안식의 신이 강재윤에게 그럼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 모습도, 강재윤이 후련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도 전부 다 지독하리만큼 선명했다. 강재윤의 입가에 옅게 번진 미소를 본 한지수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나를 재구성하는 대가로……. 전부 다 바친 거구나…….’
안식의 신이 손을 뻗다가 머뭇거리며 다시금 굳게 맹세한다. 자신의 존재를 걸고. 꼭 네가 사랑한 그 녀석의 파편을 모아서 잘 빚어 주겠다며. 강한 속박으로 맺어진 맹세에 만족한 듯이 강재윤이 눈을 감고 끄덕인다.
‘그리고 내가 진실을 알면 상처받을까 봐……. 굳이 이런 대화를…….’
위대한 존재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 역시 완전한 소멸은 두려운 건지 잘게 떨리는 입술이 보였다. 한지수는 가슴께에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아프다 못해 누군가 제 심장을 움켜쥐고 쥐어짜는 듯,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런 한지수의 기분을 눈치챘을 리도 없는데, 천천히 눈을 뜬 강재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괜찮아. 너는 잘할 거야. 우리 지수는 늘 그랬잖아. 조금 돌아가더라도 결국 해낼 거야.’
온전한 소멸을 받아들이는 게 불안한 와중에도 강재윤은 자신이 사랑하고 늘 그리워했던 이를 생각해 마지막까지 웃는다. 제가 사랑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 주고 싶다는 듯이.
안식의 신이 나지막이 그에게 사과와 고마움을 전한 순간, 강재윤의 몸이 서서히 흐려졌다. 발끝부터 부스러지기 시작한 그의 형상이 푸르스름한 빛 방울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방울방울 은은한 빛 방울들이 안식의 신에게 흡수되듯 흘러 들어간다.
발, 다리, 허리, 배, 가슴까지 천천히 부서져 사라지는 순간에도 강재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안식의 신이 오기 전부터 올려다보던 하늘을 응시하며 미소한 채 말했다.
‘형이 언제나 곁에서 지켜볼게.’
한지수는 그가 거짓말하고 있음을, 이 순간이 지나면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이미 알기에 속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웃는 저 남자를, 오직 남겨질 제 생각뿐인 강재윤을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비록 그가 저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강재윤의 미소가 흐려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한지수는 복받치는 슬픔을 더는 억누를 수 없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다정한 기만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가 바란 대로 살겠노라 약속하고 또 약속하고. 몇 번이고 맹세했다.
빛 방울들을 어느 정도 갈무리한 안식의 신은 근처를 맴돌던 작은 빛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주 미량의 흐릿한 빛이었지만, 그의 흔적이자 기억이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하길 바라며 그 빛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렇게 안식의 신은 강재윤이 바라보던 하늘과 정확히 같은 지점을 응시한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한 얼굴로.
꽤 긴 시간 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한 한지수는 안식의 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지금은 안식의 신이, 아까까진 강재윤이 내내 올려다보던 하늘을 저 역시 함께 올려다봤다.
처음엔 기름 낀 것처럼 형형색색의 장막이 흐르는 것 외에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둘은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았던 걸까? 의아해하며 하늘에 집중하자 행성 하나가 보였다.
절반 정도 부서진 채 우주에 자신의 파편을 흩뿌리는 별이.
‘…….’
한지수는 저 별이 지구라고 불렸던, 생명이 가득했던 별일까 싶어서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집중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니 전혀 다른 별임을 알 수 있었다. 지구와 같은 푸른 별이 아닌, 짙은 회색과 보라색이 섞인 별이었다.
저 별은 어떤 별일까. 저 별에도 지구처럼 생명이 존재했을까. 강재윤은 왜 저 별을 계속 보고 있었을까.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 찰나. 안식의 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에서 뮈르테리아라고 부르는 별이다. 내 제자가 한 선배님과 거래한 대가로 지켜낸 별이지. 뭐……, 지켜냈음에도 결국 저 별의 주민들끼리 파국으로 치달아 저 꼴이 되었지만.’
‘……!’
한지수는 놀라 안식의 신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는 제가 보이는 걸까? 이 사건이 일어났던 순간 여기에 있지도 않았던 존재인데? 단순히 꿈을 통해 보여 주는 게 아닌 건가? 혼란한 와중에 안식의 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한다면 넌 지금 이 꿈을 보고 있을 거야. 실패한다면 이것 또한 의미 없는 짓, 의미 없는 희생이 되겠지만……. 길게 설명하면 윗분들에게 들킬 테니 네가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짧고 설명할게. 앞으로 네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
한지수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선 제가 소리를 낼 수도, 몸짓할 수도 없었기에. 그래서 슬픔을 억누르고자 노력할 때도 안식의 신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던 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식의 신이 바로 설명을 시작하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덕분에 한지수는 확신하게 되었다. 안식의 신이 저를 느끼고 기다려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믿고 한지수가 이 기억을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의 생각을 흘려보내고 계획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 둘은 굳이 이런 방법을 택했다. 오직 한지수 하나만을 위해.
심지어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가마득한 미래를, 그것도 다른 시간 선에 자신을 붙여 넣고 이 모든 걸 보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한지수는 슬픔과 두려움, 그 모든 감정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식의 신이 지금부터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으니까.
안식의 신 역시 한지수가 어떤 상황일지 예상한 듯이 바로 말을 시작하는 대신 추스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곤 드디어 한지수가 겨우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이 정도면 너도 울 만큼 울고 추슬렀겠지. 만약 아니라면 더 지체할 수 없으니 정신 차리고 잘 들어.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일종의 용접이라고 보면 돼.’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 * *
“지수 씨. 잘 잤어요?”
다정한 목소리로 건네는 아침 인사가 듣기 좋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가 밝아진다. 뿌연 시야가 불편해 찌푸린 채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막 방으로 들어서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
한지수는 자는 내내 얼마나 운 건지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앉았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자, 은은한 커피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눈을 거의 감은 채 받아 든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어으.”
그래도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아 커피를 두 모금 더 마시고 눈을 비빈 다음 겨우 인사를 꺼내었다.
“으으……. 그럭저럭요. 하진 씨는요? 오늘은 좀 잤나요?”
정하진은 밤새 조슈아와 취하지 않는 술을 마시며 앞으로 일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한지수는 그가 건넨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멍하니 있다가, 다시 몇 모금 더 마셨다. 커피가 연한 건지, 꿈자리가 범상치 않아서였는지 카페인이 영 느리게 돌았다.
그대로 몇 분 정도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든 한지수는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화창하다. 용접하기 딱 좋은 날이네…….’
머리가 멍했다. 꿈에서 주입 받은 내용을 한지수가 홀로 곱씹는 동안 정하진도 더 말을 걸거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지수의 옆에 나란히 앉아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남자의 눈동자에 푸른 하늘이 담겼다.
“…….”
“…….”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은 평온했다. 별다른 불편함 없이 유지되는 고요함을 먼저 깬 것은 한지수였다.
“하진 씨. 정말 미안한데요……. 이번 휴가도 조금 미루고, 균열 유도 지정 구역으로 가야겠어요.”
거긴 갑자기 왜 가야 한다는 건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정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면 됩니까?”
“음, 아뇨. 그보단 임세주 에스퍼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최대한 빨리 이동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일정도 휴가를 유지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루도 못 갈 줄은 몰랐네요.”
여름을 한가롭게 무인도에서 보낸 이후 지금까지 중간중간 다른 일을 수행하긴 했지만, 그사이 최소 2~3일의 휴식은 있었다. 지금처럼 하루 만에 휴가가 번복된 건 처음이었기에 멋쩍어진 한지수가 괜히 커피를 들이켠 후 해명하듯 말했다.
“2차 대격변 대비가 끝나면 그땐 정말 쉬어요. 푹. 아주 푹. 누구보다 쉬고 싶은 사람이 저라고요. 가능하면 평생 놀고먹고 싶고요.”
“하하. 저는 몰라도 지수 씨는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네. 꼭 그래요. 하진 씨도 그땐 같이 쉬어요. 알았죠?”
“예. 생각만 해도 정말 좋군요. 아, 임세주 에스퍼는 지금 현아와 라스베이거스에 있습니다. 준비되면 바로 이동하도록 할까요?”
“좋아요. 그리고…….”
그 어떤 의구심도 없이 자기를 지지하고, 모든 결정을 이해해 주는 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 한지수가 그에게 고맙다고 감사의 마음을 다시금 전하려는 찰나, 열린 방문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집주인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조슈아 에스퍼. 저, 이미 다 들리셨겠지만, 저희가 바로 해야 할 일이 생겨서…….”
한지수는 어제 만난 그의 집에서 신세만 지고 바로 돌아가게 생겼다며 양해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그리곤 방 안에 성스러운 기운을 마구마구 흩뿌리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두 사람의 여정에 동행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괜찮다면 말입니다.”
“……! 아, 그…….”
잠시 당황한 한지수가 눈을 깜빡이며 조슈아를 바라봤다. 농담이 아닌 진심이라는 듯이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당황스럽긴 했으나 확실히 S급 에스퍼이자 신성력을 가진 그가 동행한다면 계획을 좀 더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듯했다.
“저희야 너무 감사한데……, 그런데 이게 좀……,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아니다. 중간에 귀국하셔도 괜찮으니, 조슈아 에스퍼가 가능한 만큼만 함께해 주시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하하. 다행입니다. 아, 참고로 나는 장기 휴가를 받았습니다.”
“오…….”
한지수는 이 일이 단순히 장기 휴가로는 부족할 거라 말하는 대신 그저 고맙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어차피 시일이 오래 걸릴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기에 중간중간 도움을 줄 사람은 필요한 때에 추가로 구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있을 무렵, 조슈아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휴가 기한은 2차 대격변이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