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69화 (169/172)

#169.

흐름 5

‘지금……,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한지수는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에 정신적으로 휘청였다. 안식의 신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 순간, 정신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혼란한 상황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가 뱉은 허무맹랑한 말을 듣고 납득했다는 듯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강재윤의 모습이었다. 안식의 신이 보여 준 게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강재윤은 더 분노하거나 화내는 대신 진지한 얼굴로 상황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률은?’

‘충분히 성공할 만큼 높아.’

‘그건 당신의 존재를 걸고 맹세할 만큼 높다는 의미인가?’

‘그래.’

‘후우…….’

강재윤이 재차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한숨을 뱉었다. 그 역시 혼란한 게 분명했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한지수가 이해한 게 맞다면, 안식의 신은 지금 조율자라는 막강한 존재의 생명력을 걸고 또 다른 도박을 하려 하고 있었다.

강재윤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때, 안식의 신이 강재윤을 응시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언가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짓이었다. 강재윤은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물끄러미 마주 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암묵적인 허락을 들은 안식의 신은 이번엔 손을 가져다 대거나,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그저 강재윤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강재윤은 조금 전처럼 안식의 신을 통해 무언가를 보는 듯이, 초점 없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럼……. 미래를 위해 그 애가 내 생명력을 사용하긴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아예 지워지는 건 아니란, 그런 거군.’

이미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음에도 굳이 말로 짚고 넘어가려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안식의 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 조율자로서의 생명력을 대부분 끌어다 쓸 거긴 하지만. 너라는 존재는 세상에 남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처럼 제구실은 못 한다는 뜻이고?’

‘맞아. 넌 여전히 우주에 존재하겠지. 다만…… 그렇게 되면 너는 녀석과 함께할 수 없어. 네 형태는 사라지게 될 테니까.’

‘…….’

안식의 신의 말을 들은 강재윤이 피식 웃더니,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리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듯 묻는다.

‘그건 상관없어.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그 애는……, 결국엔 행복해질까?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녀석도 너를 기억하겠지.’

‘나를…… 기억할 수 있다고…….’

‘평생 기억할 거야. 그 녀석을 이루는 조각을 다 모아 형태를 갖출 때쯤이면 조금 아픈 추억으로 남겠지만……. 그래도 잘 버틸 거야.’

안식의 신의 대답을 들은 강재윤이 고개를 젓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는다. 그리곤 피곤한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싶더니, 곧 진지한 눈빛으로 안식의 신을 향해 질문했다.

‘그럴 바엔…… 어차피 그 애가 재구성되는 거라면, 그 과정에서 차라리 나라는 존재를 완벽하게 지워 버리지 그래.’

이번엔 안식의 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파편을 모으는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그 녀석이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될 때까진 이쪽 시간으로 상당한 세월을 흘려보내게 될 거고, 그 긴 시간 내 곁에 두고 직접 보호할 거야. 나도 이 문제를 다른 이에게 맡길 생각은 없어. 그때쯤이면 그 녀석도 조금은 유연해졌을 테니까. 괴롭지 않을 순 없겠지만, 딛고 일어설 수 있겠지.’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데?’

간절하고, 또 간절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정말 장담할 수 있냐는 그의 바람에 안식의 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위에 계신 대선배님들이나 나나 다를 거 없이 억겁의 세월을 그렇게 버티며 살아왔으니까.’

‘…….’

강재윤은 안식의 신과 잠시 눈을 맞추다 피식 웃으며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지금까지 당신이 내게 지껄인 말 중 가장 진실된 말 같군.’

‘…….’

‘……좋아. 그렇게 하지. 당신이 보여 준 결과라면……. 그 올곧은 인간이라면 분명히 그 애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야.’

‘…….’

‘하지만 이건 꼭 정확히 해. 당신들 시간 놀음의 희생양이 된 또 다른 나도, 또 다른 그 애도. 당신이 책임지고 끝까지 지켜 주겠다고. 당신의 존재를 걸고 맹세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래. 내 존재를 걸고 맹세하겠어.’

안식의 신이 ‘맹세’를 입에 담은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쉽게 부서지지 않을 듯한, 그렇게 단호하게 주변을 감싸 안는 그런 기운. 주변 공기가 달라지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차원이 달라지는 것 같은 기이한 힘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한지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거대한 힘이 강력한 족쇄가 되어 안식의 신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초월자 중 하나인 안식의 목을 언제든지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막강한 힘이었다. 강재윤 역시 이를 선명히 느꼈는지 다시 안식의 신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하나 더. 그 애가 지금 우리가 나눈 대화를……, 아니. 이 사실 자체를 모르게 해 줬으면 좋겠어.’

타당한 요구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이었으나 안식의 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자기가 어떻게 재구성됐는지, 그 과정은 녀석도 알아야 해.’

‘굳이 그 애가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어째서? 그 애 마음에 짐밖에 되지 않을 텐데?’

강재윤이 반박해도 안식의 신은 단호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그럴 필요가 있어서 결정한 일이라고만 말하는 대신 그답지 않게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였다.

‘네게 보여 준 것처럼 그 녀석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곳의 미래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 그리고 그 일을 행할 때쯤이 되면 내가 만든 대부분의 편법은 위에서 막을 확률이 높아. 직접적으로 그 녀석에게 알려 줄 방법이 없어지겠지.’

‘…….’

‘그러면 그 녀석을 다른 시간 선으로 삽입할 때, 필요한 얘기는 하지도 못하고 그저 넌 별다른 일을 할 것 없이 편하게 지내기만 하라고 말해 줄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지금……. 네 혼에 새겨 넣은 기억을 통해서 그 아이에게 보여 줘야 해. 우리가 뭘 하려는지. 그래야 그 녀석도 제대로 행동할 수 있을 거야.’

이미 어둑하던 강재윤의 얼굴에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조금이나마 풀어졌던 분위기도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강재윤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안식의 신을 노려보았고, 안식의 신은 예상했다는 듯 오롯이 그 모든 살기를 받아들였다.

‘필요한 일이야. 그 녀석은 우리와 같지 않아. 자기가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한낱 인간일 뿐이고,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해.’

‘당신이 그 애의 파편을 모은다며. 보호하겠다며. 그럼, 차라리 그 애를 보호하는 기간에 직접 설명하는 건…….’

‘내가 편법을 다 빼앗긴 상황에서 이 계획을 입에 담는다면, 그 순간 선배님들도 아시게 되겠지.’

‘…….’

‘거기선 이 계획의 존재 자체도 내색할 수 없어. 미안하지만, 선배님들 아래 있는 내 능력 안에선 이게 최선이야.’

‘하아……. 너도, 그 선배들이라는 놈들도 보면 은근히 무능한 새끼야. 행성 대가리 새끼도 그렇고.’

신랄한 비난을 들었음에도 안식의 신은 부정하거나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다는 듯이 한번 씁쓸하게 웃고는 다시 덤덤한 얼굴로 돌아올 뿐이었다. 상대가 오히려 겸허히 받아들이자 강재윤 역시 더 욕할 의지가 증발해 버린 듯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내게 받은 힘을 그 애가 사용한다는 건…… 결국 그 애가 받은 생명력을 소진한다는 게 아닌가?’

‘조율자인 네가 가진 생명력과 한낱 인간의 생명력을 두고 비교하면 안 되지. 그 녀석이 네 생명력으로 할 일을 다 마친다고 해도 절대로 부족하진 않을 거야.’

강재윤이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안식의 신이 혀를 차며 설명을 이었다.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에 하나 그 녀석이 힘을 다 써서 먼지 한 톨만 한 생명력만 남는다 쳐도, 그 녀석은 인간치곤 상당히 장수하게 될 거야. 세계 기네스에 오를 정도로 살걸?’

‘…….’

둘의 대화를 듣는 내내 강재윤의 얼굴을 응시하던 한지수는 문득, 이 대화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설명을 담고 있음을 느꼈다. 어째서일까? 안식의 신은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제가 그린 미래를 언급 없이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였다. 강재윤 역시 이 장면을 보여 주는 시점에선 조율자라는 대단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된 상태니 두 존재 사이에 이 정도 의사소통은 이처럼 자세한 설명 없이도 가능할 터였다.

그런데도 안식의 신과 강재윤은 굳이 대화로 주고받으며 합의점을 찾고 있었다. 몇 번이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그 녀석이 해야 할 일’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조율자의 생명을 통해 자신을 재구성하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한 한지수는 다음 순간, 저 둘이 이런 불필요해 보이는 대화를 이어 나가는 이유가 오직 자신을 위한 것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강재윤을 오랫동안 잘 알아 왔던 만큼……. 그를 너무도 사랑했던 덕분에,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 덕분에, 늘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그의 수많은 표정을 그렸던 덕분에 한지수는 알 수 있었다.

강재윤이 지금 무리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대화에서 그가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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