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흐름 4
‘형…….’
눈물 흘리며 오열하지 않았다 뿐이지, 강재윤 또한 마음으로 절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를 둘러싼 감정의 파동을 인지한 순간, 감히 한낱 인간이 품을 수 없는 거대한 그리움과 슬픔, 그리고 온갖 고통스러운 감정이 휘몰아치며 한지수를 덮쳤다.
‘허억!’
육신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이 한지수를 옥죄었다. 한지수는 언젠가 이런 고통을 느낀 적이 있었다. 기억을 삭제한 채 슬픔을 강제로 덮어 두며 지내던 어느 날의 끝, 스킬이 풀리자 숨겨 왔던 만큼 더욱 짙어진 감정들이 한순간에 자신을 잠식했었다. 너무 깊은 감정은 그 순간 고통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지금 이 감정의 파동은 그때 자신이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너무 짙은 슬픔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하찮은 미물인 제가 오롯이 견디기엔 너무 거대한 고통이었다.
이 꿈속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제 육신을 짓누르고, 정신을 제멋대로 터뜨리는 듯한 통증 탓에 호흡하지 않음에도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한지수는 이러다 제가 소멸하는 건 아닐까 싶어 긴장했다.
그러자 일순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난 것처럼, 마치 저 감정의 파도를 막아 주듯이 감정의 파동이 서서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이 꿈에서 넌 안전하다고 어르고 달래 주듯이 말이다.
‘……하.’
겨우 고통에서 벗어난 한지수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안식의 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제자 네게 숨겨서…… 정말 미안하다.’
‘…….’
그는 또다시 강재윤에게 사과했다. 다시 그가 건넨 사과에서 피를 토할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지만, 이 또한 무뎌졌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상쇄된 후에야 겨우 정신 차린 한지수가 천천히 두 사람 사이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자 강재윤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돌아갔다.
한지수는 새삼 강재윤의 눈을 보고 놀랐다. 안광이 꺼졌다는 말은 늘 피곤해서 그냥 농담처럼 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강재윤의 눈이 딱 그러했다. 정말로 죽은 것 같은, 그 어떤 빛도 담지 않은 눈동자였다.
안식의 신 역시 같은 것을 보았으니 알았을 것이다. 자신을 향한 강재윤의 눈동자에 그 어떤 빛도 서리지 않았음을…….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제자와 겨우 맞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진 슬픔만 토해 내던 안식의 신에게서 지금은 강재윤을 향한 미안한 마음이,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안식의 신에게선 저 모든 죄책감과 연민에 빗댈 수 있는 감정과 동시에 한편으로 어떤 분노 또한 느껴졌다.
다만 안식의 신은 제게 서린 분노와 별개로 강재윤에게는 오직 사죄만을 전했다. 진심으로 미안함을 담아. 한지수는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 속에서, 그들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시간 죽은 눈으로 안식의 신을 응시하던 강재윤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날 속였어.’
‘그래.’
‘당신이……, 그 애만큼은 지켜보겠다고 했잖아.’
‘그래……. 그렇게 약속했지.’
‘…….’
‘미안하다…….’
담담한 대답에 강재윤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미간이 조금 움찔하더니, 이내 주름이 질 정도로 표정이 변한다. 늘 다정하고 웃는 모습만 보였던 이의 얼굴이 야차처럼 일그러진 걸 본 한지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저 살기 어린 눈빛만으로도 하찮은 미물 정도는 죽여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어떠한 보호에 의해 곧 사그라들었지만.
안식의 신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강재윤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한숨을 꾹 참은 강재윤이 먼저 물었다.
‘……그래서…… 당신도 지키고자 했던 걸 전부 잃었나?’
‘…….’
안식의 신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 역시 전부 다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걸 확신했으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은 강재윤은 픽 웃더니 자조하며 물었다.
‘어땠어?’
‘…….’
‘지키고자 했던 걸 잃었을 때. 당신도 울었나? 그 정도 인간성은 남아 있긴 한가? 아무리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더라도…….’
‘…….’
‘이제야 다시 찾아온 이유가 있겠지. 당신은 그런 존재니까. 그런데 듣기 싫으니 그냥 꺼져. 당신이 무슨 입에 발린 말을 지껄여도 넘어가지 않을 테니.’
혐오가 뚝뚝 묻어나는 질문 덕분에 안식의 신의 몸에서 배어 나오던 슬픔이 보다 짙어진다. 모든 걸 느꼈으면서도 강재윤은 그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 안식의 신은 강재윤을 향해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리다가도 다시 다물었다. 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동요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런 모습만 보더라도 그가 이 상황을 얼마나 힘겨워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강재윤에겐 그런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저 안식의 신을 향해 달려들지 않는 것만으로 인내심을 다 소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잠시간 망설인 안식의 신이 강재윤을 똑바로 마주한 채 조심스레 운을 뗐다.
‘……내게……. 만약을 대비한 계획이 있어.’
‘…….’
‘네가 제자로 선정되기 직전까지 별의 데이터를 따로 보존해 뒀어……. 그걸 사용하면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
‘닥쳐.’
어마어마한 살기가 일어났지만, 안식의 신은 여전히 굳건히 서 있었다. 그가 보내는 살기를 피하지도 않고 온전히 본인이 흡수하면서. 하나, 그 모습은 오히려 강재윤의 투기를 불태우고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강재윤은 눈에 실핏줄이 다 터질 정도로 분노하고, 치밀어오르는 살욕을 잠재우지 못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억지로 침착함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짓씹듯이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들이 하는 시간의 장난질을 내가 모를 줄 알아?’
‘…….’
‘당신들은 늘 그런 식으로 일을 해결했나 보군. 실패하면 되돌리고……. 실패하면 덮어씌우고……. 또 실패하면 복사본 들고 와서 이걸 원본으로 삼자고 하고.’
‘…….’
‘그럼……. 그럼 없던 게 되나? 전부?’
‘…….’
‘난 이미 그 애를 잃었는데?’
‘…….’
‘당신도 지키고 싶었던 것을 전부 잃었잖아. 그런데. 대체품 복사품이 있으니까 그거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
안식의 신은 이번에도 강재윤이 내보내는 분노를 오롯이 받아들였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무던한 반응에 오히려 더 열이 오른 듯, 강재윤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검지로 그의 가슴을 꾹 찌르며 물었다.
‘아무리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당신에겐 이제 심장조차 없는 거야?’
‘…….’
‘그럼, 지금 이 안에서 고동치는 건 뭐야. 가짜인가?’
‘…….’
‘이 심장은 뭐 자위라도 하려고 만든 거야? 아직 당신이 사랑하는 존재와 같은 존재라고 혼자 골방에서 갖고 놀려고 만든 거냐고.’
‘…….’
‘당신은 사람의…….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가 아냐.’
‘…….’
‘당신이 적어도 나를 제자로 대했다면. 사람으로 대했다면. 그 애가 그렇게 떠난 걸 숨겨선 안 됐어.’
‘…….’
‘당신이 미처 지키지 못했었더라도 내겐 솔직했어야지. 내가 당신 밑에서 개처럼 구르는 동안 무슨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그 애가 살아온 별이라도 지켜 줄 거라는 희망?’
‘…….’
안식의 신의 가슴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더해졌지만, 안식의 신은 굳건히 서 있었다. 가슴이 뚫리고도 남을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며 그에게 제 고동을 들려주면서 말이다. 강재윤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러다 이내 안식의 신에게서 손가락을 뗀 그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필요 없어.’
‘…….’
‘당신이 만든 대비책이 뭔지 몰라도……. 내가 아는, 내가 사랑하는 그 애는 이미 없어…….’
‘…….’
‘나도 이대로 소멸할 때까지 여기에서 버틸 거야. 그러니 꺼져. 설득하려 하지 말고. 남은 별조차 가루로 만들기 전에.’
‘…….’
강재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진심이었다. 그걸 알기에 안식의 신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조금 전 자신의 제자가 제 가슴을 짓누른 것처럼 거친 손길이 아닌, 느릿한 손길로 부드럽게 제자의 이마에 손가락을 댄 안식의 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대비한 계획은 이거야.’
‘…….’
일순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숨죽인 채 둘을 지켜보던 한지수는 꿈이 끝난 건가 싶어 두리번거리다, 이내 강재윤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그게 아님을 알았다.
안식의 신을 통해 뭔가를 보고 있는 건지, 강재윤은 눈을 크게 뜨기도 하고, 중간중간 흠칫 놀라기도 하고, 주먹을 꽉 쥐기도 하고,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까득 소리 나게 깨물기도 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을 짧은 시간 동안 격한 감정의 동요를 보인 강재윤에게서 손을 거둔 안식의 신이 다시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넓혀 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듯 가만히 응시했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이 천천히 뜨이기 시작한다. 강재윤의 눈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환희에 차지도 않았다. 그는 허탈하다는 듯이 ‘하하…….’ 하고 작게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넌 미친 새끼야…….’
‘…….’
‘……그 애를 모아서……. 그 세계에 붙여 넣겠다고…….’
‘그래.’
‘…….’
‘온전하게 모으긴 힘들겠지. 이미 우주로 흩어졌으니까. 그래도 이것만큼은 약속할게. 그 녀석만큼은 내가 꼭……. 그 어떤 왜곡 없이 모아 내겠다고.’
‘…….’
‘네가 사랑하는 그 녀석은 너를 기억할 거고. 추억할 수 있을 거야. 슬픔이 무뎌질 만큼 긴 기다림 끝에 새 삶을 시작하면서.’
안식의 신이 말을 잠시 끊자, 강재윤이 심호흡하며 그를 노려본다. 안식의 신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잇기 위해 몇 번이나 망설였다. 달싹이는 그 입술을 응시하던 강재윤은 거친 손길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조율자 정도는 되는 존재의 생명을 대가로 말이지…….’
‘……그래. 네게 잔인한 말이지만……. 그렇게 해 준다면 내 존재를 걸고 맹세할게. 네가 사랑한 그 녀석과. 저쪽 시간 선의 그 녀석 둘 모두에게 최선의 방법을 찾아 주겠다고.’
‘…….’
‘그러니…… 정말로 소멸할 각오가 되었다면……, 그 녀석을 위해 소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