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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67화 (167/172)
  • #167.

    흐름 3

    정하진과 조슈아가 취하지 못하는 밤을 보내던 시각, 한지수는 꿈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보통 꾸는 꿈처럼 불명확한 꿈이 아닌, 모든 것이 선명한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 세계를 둥실둥실 날아다니던 한지수는 불과 얼마 전까지 육신이 없는 상태로 안식의 신 주변을 이렇게 따라다녔던 걸 떠올리며 존재하지 않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립네…….’

    무슨 일인지 오랜만에 꾸게 된 꿈은 대격변 전 아이돌로 활동하던 당시의 어떤 평범한 날 오후였다. 한지수는 러비스 멤버들과 함께 거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응시했다.

    꿈속, 과거의 자신은 거실에 누워 소파에 다리를 올린 채 얼굴에 팩을 붙이고 있었다. 한지수의 왼편에 나란히 누운 강재윤도 마찬가지였고, 오른편에 누운 러비스 멤버 신희원도, 그 옆과 옆옆을 차지하고 누운 임정진과 윤지오도 모두 똑같이 바닥에 드러누워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있었다.

    한지수 역시 이날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투어가 끝나고 귀국 후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하다가 처음 맞이한 휴일이었을 것이다. 멤버들은 오랜만에 일정이 통으로 비는 하루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기로 했었다.

    자체 콘텐츠 촬영도, SNS를 이용한 소통도 이날만큼은 모두 내려 두었다. 실로 오랜만에 만끽하는 ‘쉬는 날’이었다. 물론 직업 특성상 자유롭게 밖을 나다니진 못해도, 모두 숙소에 모여 뒹굴며 온전한 휴식을 즐겼던 즐거운 날이었다.

    한가롭게 누워 간단한 피부 관리 정도만 해 주며 수다를 떨어 댔다. 도란도란 대화하던 와중에 거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볕 덕분인지 노곤해진 한지수가 먼저 잠에 빠졌다.

    ‘지수 잔다.’

    ‘10분 후에 저거 떼 줘야 할걸. 계속 붙이고 있으면 오히려 더 건조해진다고 쌤이 그랬어.’

    ‘내가 떼 줄게.’

    꿈을 지켜보던 한지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꿈은 자신이 겪은 과거. 그러니 제가 잠든 시점에 끝나거나 바뀌어야 할 텐데 꿈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팔을 괴고 옆으로 누운 채 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강재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지수는 강재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사람.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늘 가슴 한편에 묻지 못해 끌어안고 있었던 그 사람을.

    ‘…….’

    맨정신으로 그를 온전히 품는 게 버거워서 기억 삭제 스킬을 받았을 때도 괴로움이 줄고 감정의 진폭이 가라앉았을 뿐, 한지수는 여전히 강재윤을 그리워했다.

    긴 시간을 견디는 내내 곁을 지킨 정하진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과 별개로 강재윤을 잊은 적은 없었다. 기억이 삭제된 시기에도 말이다.

    ‘……이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지. 왜 재윤이 형의 기억을 내가 보고 있는 건지가 중요할 텐데.’

    감상적인 생각이 들려던 것도 잠깐, 한지수는 현 상황을 분석해야 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기억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게 걸렸다.

    안식의 신이 치트 키로 사용했던 순백의 공간을 뺏기고 직접적인 간섭이 어려워졌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건 안식의 신이 자신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신호를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이런 꿈을 보여 주며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거였지만.

    ‘잘 자네.’

    신희원이 잠든 지수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자,

    ‘최근에 가장 열심히 했으니 그만큼 에너지도 많이 썼겠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앉은 임정진이 맞장구치며 흐뭇한 얼굴로 한지수를 내려다본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최대한 스트레스 안 받았으면 좋겠어…….’

    ‘음. 인터넷도 좀 덜 보게 하고.’

    ‘얘 요즘 서치 실력 늘어서 별거 다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좀 못 보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

    ‘렉카도 못 보게 해. 전에 보니까 너튜브 렉카 헛소리 보고 속상해하더라.’

    모두 한지수의 심약한 부분을 잘 아는 이들이기에 윤지오가 덧붙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작게 끄덕인 강재윤은 잠시간 한지수를 바라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보지 말라고만 하면 오히려 더 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라……. 대충 듣고 흘려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상담도 꼬박꼬박 데려가고.’

    ‘그게 차라리 나으려나?’

    ‘음……. 난 아예 못 보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꿈속의 강재윤은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잠든 한지수를 깨우지 않기 위해 소곤소곤 속삭이며 대화하더니, 팩을 떼 줄 때조차 조심스러운 손길로 심혈을 기울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누구보다 자기가 가장 잘 알았던 사실이지만,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아꼈는지 새삼스레 느껴졌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다. 주로 심약한 한지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애정이 잔뜩 묻어나는 대화였다. 최근 한지수가 연습량 대비 성과가 나오지 않아 혼자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와중에 신희원이 확신이 깃든 어조로 걱정하지 말라며 씩 웃는다.

    ‘괜찮아. 지수는 꾸준히 노력해서 시간이 걸려도 꼭 해내잖아. 이번에도 잘할 거야.’

    이번에도 모두 그 의견에 동의한다. 한지수는 형들의 다정한 배려와 관심과 사랑에 저도 모르게 형태 없는 미소를 머금고 울음을 참았다. 이미 오래전 일이다. 자신이 육신 없이 떠돌던 세월까지 합치면 얼마나 지났는지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전 일.

    그런데도……, 세월이 아무리 지났다 해도 그리움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고, 이렇게 문득 꺼내 볼 날이 오면 눈물이 나곤 한다. 마음에 새겨진 감정들은 시간의 흐름에 깎여 종종 흐려지긴 해도 절대로 지워지진 않았다.

    ‘희원이 말이 맞아. 지수는 잘할 거야. 우린 사서 걱정할 시간에 애 응원이나 해 주자.’

    신희원의 말에 동의한 강재윤이 나긋나긋하게 뱉은 말을 기점으로 꿈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한지수는 여전히 이 꿈이 제게 주고자 하는 뜻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뜻이 숨겨져 있을 거라 여기고 열심히 해석해 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뭘 보여 주려는 건지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알 것 같았다. 이 기억의 주인이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믿어 주었다는 것을. 꿈이 보여 주고자 한 것이 그런 사소한 것은 아닐 듯했지만, 한지수가 이해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렇기에 한지수는 흐려져서 더는 보이지 않게 된 꿈을 미련 없이 보내 주었다. 꿈은 꿈일 뿐이니까. 자신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차분하게 생각을 가라앉히고 있자니 눈앞을 채우고 있던 그리운 이들과 공간이 사라지고 시야가 뒤바뀌었다. 꿈에서 깨어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꿈의 배경이 바뀌며 온통 주황빛으로 물든 것 같은 장소가 나타났다.

    ‘어?’

    이곳은 한지수가 모르는 장소였다. 바닥은 분명 모래 같은데 단순히 모래라고 하기엔 무언가 다른 알 수 없는 형태로 가득 차 있었다. 온 세상이 모래 같은 물질로 덮여 있었고, 표면은 소용돌이라도 친 것처럼 어지러운 무늬를 띠고 있었다.

    빙글빙글한 흔적이 여기저기 가득한, 마치 고사리가 제멋대로 엉킨 것처럼 보이는 어지러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트렌치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전 꿈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여긴 어디지?’

    홀린 듯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주변을 둘러봐도 도저히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미스테리 서클이 가득한 사막이라고 하면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평범한 사막이라고 하기엔 하늘이 조금 특이했다. 아니, 꽤 많이 특이했다.

    하늘의 색은 짙은 자줏빛이었는데, 꼭 물웅덩이에 기름을 풀어 둔 것처럼 형형색색의 장막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천천히 흘러가듯 움직이는 하늘은 어찌 보면 물웅덩이 속에서 기름 낀 수면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강재윤은 멍하니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온갖 색을 담은 느릿한 유속을 응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에게서 멀지 않은 지점이 누군가 투명한 비닐을 움켜잡은 것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강재윤은 조용히 눈을 굴려 일그러진 허공을 흘끗, 일별하곤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무심한 눈길이 스친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긴 머리카락을 질끈 높이 묶은 안식의 신이었다.

    ‘…….’

    ‘…….’

    갑자기 나타나 모래에 발을 디딘 안식이 어쩐지 가라앉은 듯 보이는 눈으로 강재윤을 바라봤지만, 강재윤은 안식의 신을 보지 않았다. 그가 자길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무방비한 상태로 그저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한동안 불편한 대치가 이어졌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두 남자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맞지 않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 상황 속에 강재윤은 몹시 피곤해 보였고, 안식의 신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는 강재윤, 그리고 그런 강재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안식의 신. 용건이 있어서 온 것일 텐데, 무슨 일일까. 한지수가 의문을 품을 때쯤, 먼저 입을 연 것은 안식의 신이었다.

    ‘……미안하다.’

    ‘…….’

    그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하늘을 응시하는 강재윤을 향해 사과했다. 한지수는 안식의 신이 사과를 뱉은 순간, 그가 피를 토하는 건 아닌지 의심될 만큼, 강렬한 고통을 느끼고 말았다. 단 한 마디에 짙게 어린 미안함이, 그리고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강재윤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는 안식의 신의 사과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하늘만 바라봤는데, 이 둘을 지켜보던 한지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 고통이 안식의 신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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