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삶의 대가 6
‘……이젠 도시라고 부르긴 좀 작은 규모긴 해도 여전히 반짝반짝하구먼.’
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화려한 도시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 규모가 대격변 전에 비해 30% 정도로 줄었지만, 현존하는 구역만큼은 여전히 반짝반짝했다.
라스베이거스 인근 공항에 착륙 후, 두 사람은 미국에 파견된 대응팀이 있는 지역까지 헬기로 이동 중이었다.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한 지상을 내려다보던 김현아는 옆자리 임세주를 흘긋 확인했다. 굳건한 사막의 도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그녀는 여전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임세주가 저리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한 지점을 응시한다는 건, 김현아의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저들이 설치한 수정이 의도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일까, 궁금했던 탓이다.
“임세주 에스퍼. 수정 설치한 지역은 아직 훨씬 많이 가야 하는데, 설마 여기서도 보여?”
거리가 꽤 있음에도 수정을 설치해 둔 방향만 보고 있으니 그리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임세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
아직 수정이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는 이 위치에서 보이지 않나 보다. 괜히 머쓱해진 김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지점을 바라봤다. SS급 에스퍼의 시력에도 보이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임세주는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뭐 특이점이라도 있어?”
궁금함에 재차 묻자, 임세주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봐야 알 것 같지만……, 수정 설치한 구역으로 추정되는 쪽 하늘에 뭔가 이상한 게 보여요. 균열까진 아니고 머리카락 같은 게 하늘에 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으음, 어떻게 보면 실금처럼 보이는데……. 혹시 김현아 에스퍼는 보이세요?”
“흠…….”
김현아가 같은 지점을 다시 눈여겨봤다. 만약 균열이었다면 김현아의 눈에도 보여야 할 텐데 아무리 봐도 임세주가 말한 실금 같은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상공 균열이 발생하진 않았다는 걸까? 혹시 균열 직전의 조짐인 걸까? 온갖 추측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보여. 임세주 에스퍼 눈엔 실금 같은 게 보인다는 거지?”
“으으음, 너무 희미해서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분명 뭐가 있긴 하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가까이 가면 더 잘 보이겠지.”
균열을 유발하기 위한 대응책 수정은 당연히 도시에서 굉장히 먼 지역, 동떨어진 사막 한가운데 설치했기 때문에 아직 헬기로도 더 이동해야 했다.
김현아는 임세주와 같은 하늘을 팔짱 낀 채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저 손가락으로 제 팔뚝을 툭툭 두드리며 저 실금이 인류에게 있어 긍정적인 신호이기를 바라면서 모쪼록 다른 일을 처리하러 굳이 휴식을 만류하고 떠난 두 사람도 긍정적인 소식을 가져오길 바랐다.
* * *
아침보단 새벽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릴 이른 시각.
바티칸 소속 프리스트 에스퍼 조슈아와 또 다른 사제들을 마주한 한지수의 눈은 고요하지만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격변 전엔 아이돌 생활, 대격변 이후엔 가이드 활동을 공개적으로 하며 익힌 표정 관리 덕분에 차분한 표정까진 무사히 지어낼 수 있었는데, 문제는 생리적인 반응에 있었다.
‘미치겠네……. 엄청 긴장돼…….’
한지수의 심장 고동이 평소보다 훨씬 크고 강하게 뛰는 것을 눈치챈 건 본인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곁에 앉은 SS급 에스퍼 정하진 역시 쿵쾅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 자리에 있을 B급 이상의 에스퍼들 역시 눈치챘을 게 분명했다.
정하진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제 연인의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애써 모른 척하며 조슈아의 얼굴을 흘긋 봤다. 눈꼬리가 살짝 처지고 선량해 보이는, 저와는 다른 결의 미인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둑한 새벽녘의 고요함 때문일까. 오늘따라 그의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다 못해 성스러워 보였다.
조슈아 곁에 다른 에스퍼나 힐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공식 회의고, 카메라가 있는 자리도 아닌데 그들 모두 이른 새벽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세팅한 모습이었다. 주름 하나 없는 사제복을 입은 프리스트가 모여 있으니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누구보다 신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섬기는 자들이라 그런 걸까? 각자 개성 있게 아름다운 얼굴에도 선량한 기운이 충만했다. 그들의 신성력에 취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정하진도 과한 신성력에 취한 연인의 심장이 터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앉아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한지수 역시 제 심장이 진정하길 바랐다.
‘진짜 미치겠다. 다른 분들이야 그렇다 쳐도…….’
앞에 주르륵 앉아 있는 과하게 홀리한 미남들도 제 심장에 영향을 주긴 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정하진과 조슈아 셋이 사적인 자리에서 가볍게 만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바티칸 주요 각성자들이 참석했던 탓이다. 게다가 두 사람의 맞은편엔 새벽 일정을 마치자마자 부랴부랴 참석한 추기경까지 있었다.
‘아니, 왜……, 왜 추기경까지 참석하겠다는 건데! 추기경까지 만날 줄은 몰라서 편하게 입고 왔단 말야!’
이젠 심장이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한지수는 이전 삶에서도 추기경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정하진이나 김현아 정도 되는 인물들은 추기경을 포함해 교황도 만났던 것을 알았지만, 제겐 너무 먼 이야기였다. 차라리 거대 돔에서 아무 연습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무대로 끌려 올라가 즉흥 무대를 하라고 강요받는 게 훨씬 평온할 지경이었다.
사제들은 그런 한지수의 상태를 파악했는지 손님을 편하게 해 주고자 모두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나긋하고 상냥하게 눈을 휘며 웃는 사제들의 미소를 본 한지수는 너무 진정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안면 근육에 힘이 스르르 풀리려 해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지수 씨. 혹시 어디 불편한가요?”
“아, 아뇨. 그냥 기침이 나오려 해서……. 아까 찬 바람 맞으며 산책해서 그런가 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편히 입고 온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고 끈을 죽 잡아당겨 얼굴을 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아까 기다렸던 휴게실에서 조금 쉬는 게 어때요. 이야기는 제가 빨리 마치고 갈게요.”
초조해하는 모습을 계속 관찰한 정하진이 자연스레 자리를 피할 기회를 주고자 조심스레 물었으나 한지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우리 단순히 놀러 온 게 아니니까요. 괜찮아요.”
아니. 사실 반은 놀러 온 게 맞았다. 로마에서 푹 쉬며 겸사겸사 조슈아 에스퍼만 만나 최근 저들이 추진 중인 어떤 주제를 전달만 하려고 했다. 그에 대해선 교황청 사람들끼리 알아서 논의하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새벽에 도착해 입국 절차를 끝낸 두 사람에게 예정에 없던 인물이 접근했다. 바로 교황청에서 파견한 사람이었다. 별다른 약조가 없었지만, 조슈아가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한 두 사람은 교황청에서 파견한 안내인을 따라 차량에 탑승했다. 그리고 새벽부터 이렇게 모여 앉게 된 것이었다.
‘조슈아 에스퍼가 이렇게 무데뽀인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잘된 건가.’
처음엔 정하진도 다소 황당했으나, 이미 모인 걸 어쩌겠나 싶었다. 그리고 오히려 추기경이 함께하고 있으니 더 질질 끌 것 없이 저들이 계획 중인 일을 바로 통과시킬 수도 있을지 몰랐다. 아마 조슈아도 그걸 고려해 무려 추기경을 여기까지 부른 거겠지 싶었다.
재차 밀려오려는 황당함을 애써 지운 정하진이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곤 그 곁의 에스퍼들과 힐러들, 그리고 추기경과 모두 한 번씩 시선을 맞춘 후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약조 없이 방문했음에도 이렇게 중히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기밀도 아니고, 조슈아 에스퍼를 통해 전달만 하고자 했던 건이지만……. 추기경께서 친히 참석해 주신 덕에 오늘 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오히려 다행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신경 쓰이는 것은 하나입니다. 부디 우리의 방문이 여러분의 수면을 방해한 게 아니기만 바랄 뿐입니다.”
정하진은 평소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농담을 덧붙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웃을 여유가 없었던 한지수 대신 다른 이들은 모두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그다지 재미있지 않은 농담에도 곧잘 호응해 주었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기에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모두와 인사를 나눈 정하진은 추기경과 그 곁에 앉은 조슈아를 향해 방문 목적을 밝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부터 제가 제안해 드릴 주제는 공식적인 사안이 아닙니다. 그저 서로 진행해 보면 어떻겠냐는 의사 정도만 묻는 자리니, 편하게 생각해 주시고 논의해 주시면 됩니다. 우선, 각국 전문가가 모여 있는 2차 대격변 대응팀 입장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언론에선 수정 방어 작전이 만능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수정 방어 작전은 만능이 아니며, 대응팀도 인류의 안정을 수정에만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하진과 이미 몇 번 만난 적 있던 추기경은, 정하진의 성격상 곧바로 본론을 말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뭐라 덧붙이는 대신 인자한 미소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정하진은 그와 눈을 잠시 맞추다 옆에 조슈아를 바라봤다. 조슈아는 뭐든 좋으니 편히 말하라는 듯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덕분에 옆자리 앉은 제 연인이 슬쩍 고개 숙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못 본 척하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또 다른 안정을 위해 교황청에 직접 안정화 대응 작전에 참여 의사를 물어보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교황청 소속 각성자들의 기운은 다른 각성자들과 다르게 청량합니다. 거기에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포용력을 느끼게 주는 특유의 기운도 지니고 있다는 건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번에도 모두가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진은 그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제안을 던졌다.
“여러분의 신성력을 이용하고 싶습니다. 다만, 종교와 관계없이 말입니다.”
묵직한 본론이 다소 뒤에 덧붙이듯 나왔지만, 이전에 만났던 다른 종교 측과는 다르게 반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추기경은 온화한 미소를 유지한 채 정하진을 바라봤다. 정하진은 제 이론을 설명하고자 조심스레 그들 앞에서 다른 신의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안식의 신, 그리고 푸른 달의 신에게 직접 확인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무언가를 믿는 마음은……. 종교와 관계없이 그 간절한 믿음과 기도가 모이는 것만으로도 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푸른 달의 신은 푸른 달, 안식의 신은 안식, 붉은 달의 신은 붉은 달 등 각 후원자의 이름 뒤에 붙은 ‘신’을 생략해 부르는 바티칸 소속 사제들 앞에서 최대한 좋게 말해서 그렇지, 엄밀히 말하면 너희가 믿는 신이 유일신이 아니라고 못 박는 말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