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62화 (162/172)

#162.

삶의 대가 5

“으어어……. 김현아 에스퍼어어, 좋은 아침입니다아아…….”

“어, 좋은 아……침 맞아? 임세주 에스퍼. 밤새웠어?”

“네에……. 개인적으로 뭐 좀 확인하느라…….”

힘없이 인사한 임세주가 마치 판다처럼 거무죽죽해진 눈가를 비비며 멋쩍게 웃었다. 김현아는 사실 제 바로 옆 기숙사를 이용 중인 임세주가 밤새 낑낑대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 그러다 병난다.”

“괜찮아요. 라스베이거스까지 갈 동안 비행기에서 자면 되니까요……. 가요. 준비 다 됐어요.”

각성자답게 가벼운 모습으로 등장한 두 사람은 평소 같은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표정이 어둑한 임세주를 확인한 김현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안 좋은 소식이라면 이미 차고 넘쳤으니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게 없다고 여기려 노력했다.

임세주는 평화 길드 전용기를 타고 이륙할 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내 무언가 고민하듯 근심에 찬 얼굴을 유지하던 임세주가 입을 연 것은 전용기 내 담당 승무원이 두 사람의 편의를 확인한 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김현아 에스퍼.”

“어.”

“음……. 성원준 에스퍼랑 성재희 에스퍼를 아세요?”

“음?”

3년쯤 전에 순직한 다른 길드 소속의 에스퍼 남매 이름을 들은 김현아가 눈을 깜빡였다. 임세주가 갑자기 그 두 사람의 이름을 왜 꺼낸 걸까? 예상치 못한 인물의 거론에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뜬 김현아는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일단 성실하게 대답했다.

“A급 물 속성, 물리계 남매 에스퍼였지.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어. 왜?”

“음……. 제가 그 두 사람이랑 친분이 있었거든요. 성원준 에스퍼랑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대격변 이후에 다시 만나 친구가 되었고요.”

“아…….”

김현아는 일순 유감이라고 말해야 하나 망설였다. 둘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나 지났다고 해도 친분 있던 사람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만 끄덕이기도 뭐했으니까. 하지만 임세주는 그런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성재희 에스퍼……. 재희 언니랑 원준이가 같은 던전에 들어갔을 때. 던전 보스가 갑자기 속성이 두 개로 바뀌면서 분열해서 그때 재희 언니랑 힐러 한 분, 그리고 가이드 한 분이 순직하셨었죠.”

“어. 그랬지.”

당시엔 지금처럼 던전 내부를 체계적으로 측정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렇다 보니 던전 내에서 이변이 일어나면 지금보다 훨씬 큰 규모의 사고가 터지거나, 각성자 사망 사례도 많았던 시기였고.

김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세주가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쥐락펴락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뭔지 몰라도 저리 걱정하며 말하는 걸 보면 중요한 이야기겠구나. 이미 죽은 이들을 언급하는 걸 보면 필히 삶과 끝이 관련된 이야기겠구나……. 그리 생각하니 제 마음도 조금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제 손을 내려다보던 임세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현아를 바라봤다. 김현아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원준이가 죄책감을 많이 느꼈었어요. 원래는 자기가 죽었어야 할 상황이었는데 누나가 자길 구하고 대신 죽은 거라고요……. 다들 아니라고 해도 원준이는 계속 그 말만 했고요. 누나는 자기 때문에 죽은 게 확실하다고요.”

“…….”

“다들 누나가 눈앞에서 죽어서 그런다고 여겼지만……, 그때 전 조금 달라진 걸 봤어요. 원준이의 기운이 흐려진 상태였고, 그 흐려진 기운을 재희 언니의 기운이 감싸고 있던 거를…….”

“…….”

“당시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요. 사람의 감정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기운이 변형되는 일도 있어서, 원준이가 큰일을 겪어서 그런 거라고 여겼어요. 딱히 다른 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요. 확실히 기억나는 건 그날 이후 원준이의 기운이 눈에 띄게 흐려지기 시작했다는 정도예요.”

“…….”

“시간이 조금 지나 원준이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애가 원래 가진 기운이 굉장히 흐려진 상태였고, 원준이를 감싸던 재희 언니의 기운도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며칠 지나 원준이가 순직했고요.”

이야기를 듣던 김현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뭘까. 그다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인내하며 경청했다. 임세주는 김현아와 눈을 잠시 맞추다 시선을 내리며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후로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냥……. 떠난 친구랑 언니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그런데 최근 몇 달 동안 부정 기운을 측정하려고 여러 영상을 보고, 사고 영상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비슷한 현상을 조금씩 발견했어요.”

“…….”

“처음엔 전체적인 흐름만 보느라 크게 신경 쓰지 못했는데, 같은 패턴이 몇 번 눈에 띄니까……. 원준이 말이 진짜일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재희 언니가 정말 원준이를 구하려고 희생한 것 같다고…….”

“…….”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의자 팔걸이를 검지로 툭툭 두드리던 김현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러니까 임세주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쩌면…….

“성재희 에스퍼가 정말로 그 당시 죽었어야 했던 동생을 위해 희생해서, 성원준 에스퍼가 그만큼 살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요.”

“…….”

“제가 이 가설에 대해 흰 양말에게 물어봤는데……. 대답을 회피하더라고요.”

“흠.”

흰 양말의 신. 임세주 에스퍼의 후원자로 어딘가 하찮으면서도 종종 그럴싸한 도움을 주는 후원자였다. 후원자의 능력이 크든 작든, 그들은 한낱 인간을 초월한 초월자였다. 그런 후원자가 대답을 회피한다면 사실상 질문에 대한 ‘긍정’으로 해석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저들이 말할 수 없어서 대답을 회피하던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일 수 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그들이 회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암묵적인 대답이기도 했다. 김현아는 임세주의 가설이 퍽 놀라웠지만, 정리가 필요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재촉했다.

“마저 말해 봐. 그래서?”

“으음……. 그래서 어제 여러 사례를 조사하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삶을 유지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봤어요. 민간인부터 각성자들까지 제가 검색할 수 있는 내에서 전부.”

“결론은?”

“……대부분 많은 사람은 딱히 원래 가진 기운에 변화가 없었어요.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거일 수도 있고. 제 가설이 틀린 거일 수도 있겠죠.”

“…….”

“그런데 몇몇은 정말로 기운에 변화가 생겼어요.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던 기운과 더불어 다른 이의 기운이 섞인 모습이었죠. 그리고 확실하게 변화가 있었던 사람 중엔 세상을 떠난 분들도 계셨는데요. 대부분 원준이처럼 두 기운 모두가 흐려진 후 떠난 것 같아요. 그런 케이스는 세 명밖에 발견하지 못했지만…….”

“…….”

“이건 정말 1차원적인 추측이고……, 억측일 수 있는 가설이에요.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땐……. 그날 죽을 운명이 아니었던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면……. 먼저 돌아가신 분의 남은 생명만큼 구해진 사람이 이어받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정말 너무 억측 같지만……!”

임세주는 제가 생각해도 유치하고 너무 엉성한 이야기 같다며 김현아의 눈치를 흘금흘금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신경 쓰였고, 어느 정도 그런 사례를 조사하다 보니 제 가설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전하게 되었다고 소심하게 말을 마쳤다.

김현아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들렸지만, 그보다 굳이 이렇게까지 자신 없는 가설을 꺼낸 이유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슬슬 지끈거리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몇 년 전 친구가 신경 쓰여서 이걸 조사한 것 같진 않고……. 지수 때문이야?”

“……!”

김현아의 질문을 들은 임세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답보다 확실한 반응을 확인한 김현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손사래 쳤다.

“아니, 뭘 그리 놀라. 임세주 에스퍼가 봄에 걔 기운 보고 기절초풍했던 건 나도 기억하거든? 오류처럼 깨진다며. 그런 거 처음 봤다고.”

“어, 네……. 맞아요……. 그런데 최근에……. 그땐 제대로 못 봤는데, 그런 기운이 처음이라 충격받기도 했고요……. 그 뒤에 들은 내용이 더 충격이라 사실 기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맞는 소리겠지만요.”

“그렇지. 평행 세계 이야기가 좀 충격이었어? 하여간에. 그래서 한지수 걔 기운엔 또 누구의 기운이 보이는데? 설마 나야?”

김현아는 아까부터 점점 어깨가 위축되다 못해 쪼그라드는 임세주의 긴장을 풀어 주고자 농담을 던졌다. 효과가 있었는지 놀란 임세주가 펄쩍 뛰어오를 듯이 양손을 마구 휘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벨트만 없었다면 거의 천장에 머리를 박을 기세였다.

“아, 아뇨! 절대 아니거든요!”

“농담이야. 그래서 누군데. 솔직히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긴 하거든. 근데 임세주 에스퍼가 말해 봐. 내 짐작이 맞는지 보게.”

대수롭지 않게, 마치 오늘의 점심 메뉴를 묻는 듯한 단조로운 음성이었다. 그 덤덤함 덕에 임세주 역시 내내 긴장한 몸의 힘을 풀고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으며 한숨 쉬듯 말했다.

“강재윤 에스퍼요…….”

“…….”

“금방이라도 조각조각 부서지거나 끊길 것 같은 기운 틈새로……. 강재윤 에스퍼의 빛이 보였어요.”

“……그래.”

강재윤.

그 이름을 확인한 김현아의 얼굴에 다소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예상한 인물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주억거린 그녀는 임세주에게서 시선을 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상은 흐렸지만, 구름 위로 보이는 하늘은 쾌청하기 그지없었다.

“…….”

“…….”

잠시간 눈부신 하늘을 응시하던 김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

“네.”

“당장 걔 몸에 보인 기운이…… 강재윤의 기운이 많이 흐렸어?”

“으음……. 직접 만나 보면 확실할 텐데, 최근에 확인한 바로는 아니었어요. 좁은 틈새로 확인한 거긴 하지만, 분명 강하게 빛나고 있었거든요.”

“그래. 그럼 이 건은 일단 함구해.”

“……?!”

“개인적으로…… 걔 기운이 흐려서 문제가 될 게 아니라면, 본인이 이걸 알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 가뜩이나 심약한 앤데 굳이 말해서 마음 쓰게 만드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고. 그렇지?”

“……네에. 그럴게요.”

“그래. 이 건 관련해서 뭔가 더 알게 되면 나한테 말해도 괜찮으니까…… 일단 잠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네! 그럼 전 좀 쉴게요!”

그동안 혼자 고민했던 부분을 털어놓아서 그런지 조금 전보단 기운찬 대답이 들렸다. 김현아는 임세주가 큰 의자에 누워 담요를 덮고 편한 얼굴로 잠든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야 참았던 한숨을 터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