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삶의 대가 3
은연중에 희미한 속내를 털어놓은 한지수의 얼굴은 한결 개운해 보였다. 제 연인의 상태 파악을 마친 정하진은 복잡한 심경과 별개로 만족스럽게 미소 지어 보이며 다시 한지수의 볼에 입을 맞췄다.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군.’
정하진은 한지수와 재회한 이후 계속해서 그를 지켜봤다. 식사 시간엔 어떤 요리를 더 많이 먹는지, 어떤 음식에 눈길을 주지 않는지 같은, 아주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제 연인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새로운 한지수를 알기 위해 노력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빠르게 한지수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단둘이 보내는 이 별장에서의 평온한 시간도 한지수가 가진 어떠한 ‘걱정’을 덜어 주진 못했다는 것을.
그가 돌아온 이후부터 제게 털어놓지 못하는 어떠한 고민이 있다는 것을 진즉 눈치챘으나, 도통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기에 정하진 역시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한지수가 말할 준비를 마쳤을 때, 제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그 고민이 뭔지 알게 된 정하진의 마음엔 슬픔을 그득히 묻힌 그늘이 졌다. 밤하늘은 저리 반짝이는 별을 가득 담고 있는데, 정하진의 마음엔 저 별의 수만큼 걱정이 담긴 것처럼 묵직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건가.’
애초에 삶이란 그랬다. 정하진 역시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만지 몰랐고, 모두가 그런 형편 속에 살고 있으나, 한지수는 남들과는 다른 의미일 터였다. 임세주 에스퍼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몸을 감싸고 있는 불안정한 기운이 모자이크처럼 오류가 생긴 듯이 보인다고.
오류. 한지수의 현 상태는 그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붙이기엔 미안한 단어를 떠올린 정하진은 가슴에 기대길 좋아하는 한지수가 냉큼 안기는 걸 보며 작게 소리 내 웃고 둥근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고민해 봤자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정하진은 덩달아 불안해하는 대신 담담하게 제 연인을 대하기로 결심했다. 그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면 될 일이었다. 당장 내일 헤어지더라도 후회 없을 만큼 아껴 주고 사랑을 퍼부어 주면 될 일이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지금껏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여전히, 아니, 더욱 많이 한지수를 사랑하면 되는 일.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럴 것이다.
조금 전, 한지수가 내가 너무 빨리 떠나서 당신과 나이 차가 많으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대답한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진심이었다. 그가 먼저 떠나도 자신은 계속해서 한지수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것이다. 둘이 또 함께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대수겠는가.
이 삶이 끝나더라도 인간이 우주로 흩어져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제게는 크나큰 위안이었다. 서로가 헤어지게 된다고 해도 다시 만나면 그만이니까. 제가 이렇게나 지구를 위해 열심히 헌신했는데, 후원자들이 그 정도 하나 안 해 줄까.
그리 생각하니 마음에 드리웠던 그늘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아서 입가에 미소를 띨 수 있었다. 제 가슴에 폭 기댄 연인의 어깨를 부드러이 어루만지던 정하진은 낮은 목소리로 먼저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지수 씨는 어떤 형태로 태어나고 싶어요?”
“어, 음……. 사실 사람이나 동물밖에 생각 못 했는데요. 너무 지구 기준인가요? 근데 또 지구에 태어나긴 싫어요.”
“흠……. 다른 별에도 동물이나 사람이 있을 수 있죠.”
“네. 지구랑은 조금 다르겠지만. 가능하면 비행할 수 있는 종족이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손도 쓰고 싶으니까 역시 사람 형태에 날개가 달렸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손이라…….”
잠시 앞발을 손처럼 사용하는 똑똑한 그리핀을 떠올린 정하진이 실없이 웃었다. 그리핀 몸에 자꾸 한지수의 얼굴을 붙여서 상상하게 된 탓이었다. 덕분에 오래전 동계올림픽에서 여러 아이들을 울렸던 한 마스코트가 떠올랐다. 한지수는 정하진이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따라 웃었다.
이후 두 사람은 많은 동물과 상상 속의 생물을 이야기했다. 날개 달린 개체부터 시작해 중력 자체가 없는 공간을 부유하는 플랑크톤 비슷한 생물까지 온갖 동물들이 나왔다. 지구와 비슷한 환경에 털 많은 귀여운 동물이나, 혹은 사람이거나 다른 종족일 때. 문명을 가진 종족일 경우도 다수 언급되었다.
한지수가 어디서 뭘 본 건지, 촉수가 많아도 이거저거 일하기에 편해서 좋겠다고 말했을 때 정하진은 잠시 흠칫했지만, 촉수가 되어서도 일을 할 생각인 거냐는 대꾸에 실없는 대화의 끝이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시 별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노천탕에서 목욕을 즐긴 뒤 한 침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다음 날엔 일어나자마자 서로 잘 잤냐며 아침 인사를 나누었고, 단둘이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날은 맑고 쾌청해 무인도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불쑥 솟은 바위섬으로 날아가 낚시를 즐겼다. 수중 호흡 아이템을 사용해 바닷속을 누비기도 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점심은 두 사람이 낚은 해물 요리였다.
저녁엔 한지수가 좋아하는 모닥불을 지펴 두고 해변에 앉아 낮에 손질해 둔 생선을 꼬치에 끼워 구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다. 날이 꽤 더워진 터라 밤이 깊었을 때 두 사람은 무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해변 근처에서 노숙했다.
바로 20m 거리에 별장이 있어 노숙이라 부르기도 민망했지만, 한지수는 이렇게 매트를 깔고 밤하늘을 보고 있으니 던전에 들어온 것 같다며 웃었다. 그러다 생각해 보니 지구도 어쩌면 큰 던전일지 모른다며 제법 진지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정하진은 그런 거라면 허공을 찢고 나타난 거대한 재앙이 지구 던전 공략팀이고, 지구를 다 때려 부수고 나가는 게 던전 클리어 조건이냐는 농담을 하려다 말았다. 아무래도 농담으로 꺼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멋쩍게 웃으며 정말 그러네요. 정도로 대답했다.
그렇게 안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여전히 고온다습한 여름이 찾아오고, 더워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길 며칠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건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녹음이 버석하게 마르며 하늘은 더 맑고 높아졌다. 세상이 가을빛으로 물들더니, 어느덧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몇 번의 눈이 내려 세상이 하얗게 뒤덮일 때까지 지구엔 A급 이상 던전이 발생하지 않았다. 폭풍전야 같은 고요한 시기에도 삶은 이어졌다.
한지수는 김지수 신분을 유지한 채 정하진과 늘 세트로 붙어 다녔다. 종종 파파라치가 붙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정하진은 함께하는 것을 숨기진 않으면서 최대한 한지수가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사람들은 이제 정하진이 새로운 페어가 생겼다는 사실에 더는 집요하게 굴지 않았다. 김지수 신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정하진의 페어 가이드로 자리 잡았고, 동명 탓에 종종 한지수가 그립다는 이야기가 들리긴 했으나, 그렇다고 집요하게 한지수를 찾는 이들은 없었다.
평화 길드에선 한지수가 여전히 평화 길드 소속이지만, 외부에 노출되는 일 없이 다른 모습으로 일상을 이어 가고 있다고 발표했다. 평화 길드의 어떤 내근 부서의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가 우스갯소리처럼 돌았지만, 누구도 한지수의 정체를 캐려고 들진 않았다.
한지수의 팬들은 한지수가 마음의 평온을 찾았기를, 그리고 어딘가에서 다른 모습으로 우리 사이에 섞여 평범하게 웃으며 지내고 있길 바란다고 입 모아 말했다. 한지수는 그런 이들의 반응을 보며 예전과 많이 달라진 처지에 신기해하면서 동시에 기뻐했다.
계절이 변하는 동안 한지수는 정하진 외엔 김현아와 정하율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하율은 새로운 한지수를 이전에 제가 알던 형과 똑같은 사람이 아닌 다른 형으로 받아들였고, 반대로 김현아는 제가 아끼던 동생으로 받아들였다.
한지수와 나눴던 추억은 다르지 않다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었다. 한지수는 두 사람의 선택을 각각 존중했고, 기꺼워했다. 저를 인정해 주고 받아들여 준 것이 그저 행복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이가 제게 남긴 수첩에 적힌 ‘너도 이 아이를 좋아하게 될 거야.’라는 글귀처럼. 한지수는 정하율을 제 동생처럼 아꼈다.
그렇게 정하율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종종 친동생 한지율이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제 동생이 곁에 없어 슬프고 서러웠겠으나 지금은 달랐다. 동생이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이 몸의 원래 주인과 다른 별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한지수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2차 대격변을 처음 발표했던 시기에 김현아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은 불안을 딛고 평범하게 돌아갔다. 많은 이들이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그러한 여러 안정화 대비 작업 중 정신계 에스퍼들의 안정화 능력을 수정에 주입하는 일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정신계 에스퍼에 대한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2차 대격변을 대비하기 위해 그들의 능력이 필요하고 그 능력이 인류를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선입견도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그 덕에 각성 사실을 숨기고 지냈던 수많은 정신계 에스퍼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힘으로 지구 안정화에 도움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긍정적인 결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다가올 재앙을 대비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버티고 있을 때.
다른 시간 선의 지구가 그러했듯, 1차 대격변 이후 지구에서 인구가 가장 밀집된 지역인 중국 광저우 상공에 최초로 희미한 균열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