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삶의 대가 2
한지수가 신이라 불리는 후원자들의 사정을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식의 신이 우주에 흩어진 제 영혼의 가루를 모으던 시기, 반짝이는 티끌 형태로 그의 주변을 맴돌며 살핀 덕분에 후원자라는 존재가 결코 전능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후원자가 피후견인을 도울 수 있는 범주는 그들만의 엄격한 규칙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만약 그 이상의 개입을 원한다면 그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 따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후원자들은 자신이 비호하는 별을 무척 아끼는 편이었다. 몇몇 후원자는 안식의 신처럼 피후견인에 대한 애착이 크기도 했다. 덕분에 한지수는 종종 후원자들이 규정 한도 이상으로 피후견인을 위한 일을 진행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목격할 수 있었다.
언젠가 두 발로 걷는 사자의 형상을 한 후원자가 자신이 아끼는 행성에 범주 외 개입을 선언했을 때였다. 허공에 은색으로 빛나는 저울이 나타났다.
후원자가 행성에 주려는 도움의 가치는 왼쪽 저울판에 측정되었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대가는 후원자가 직접 오른쪽 저울판엔 올려야 했다. 저울의 추가 완벽히 평행을 이루지 않으면 후원자는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사자머리 후원자는 그날 저울판에 자신의 권능 중 일부를 쪼개 올렸다. 주변 후원자들이 모두 놀란 것을 봐선 아마도 어마어마하게 큰 대가였으리라. 다른 상황에서 또 다른 후원자는 긴박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제 신체 일부인 촉수 하나를 상납했고, 또 어떤 후원자는 제가 가진 것 중 귀한 것을 내놓기도 했다.
한지수는 저 저울을 이용한 조율이 누구와 하는 거래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대가를 내놓을 때마다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거나 슬퍼했던 모습을 봤기에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러니 안식의 신 역시 저를 살려 주는 대가로 무언가 큰 것을 내놓았을 게 분명했다. 그는 지구의 시간을 되돌리고 지구를 설득하는 데 자신을 쪼개 썼다고는 말해 주었지만, ‘한지수’라는 인간과 지금 필리스라는 별에 있을 제 동생 ‘한지율’을 어떻게 다시 살게 했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저 하나도 아니고 동생까지 포함해 둘이나 되는 목숨에 관한 거라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치렀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안식의 신이 치른 대가에 따라 제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몰랐고.
‘사실 내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아도 상관없어.’
지금 제게 주어진 시간이 온전히 제 것이 아님을 안다.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이 녹아 들어갔을 거라는 추측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게 누구란 말인가? 자신도 모르는 희생으로 얻은 이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막막하고 조금은 무서웠다. 자꾸만 훌륭하게 살아 내야 한다는 압박이 한지수를 옥죄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짧다고 가정을 해 보면……. 아니, 분명 짧겠지. 그러면 이 사람은…….’
한지수의 시선이 제 곁에 앉은 이에게 향했다. 해변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빌려주던 정하진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다정하게 미소 지을 뿐, 왜 그러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람이니 제가 티 내지 않아도 뭔가 고민거리가 있다는 것쯤은 알 게 분명한데도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곁을 지키고,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한지수는 저만이 담긴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리곤 다시 정하진의 어깨에 기대 고개를 숙였다. 허벅지 위에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보였다. 다른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살포시 덮자 정수리 위로 작게 웃는 소리가 내려앉는다.
별은 반짝이고 파도는 잔잔한 밤. 환경적 요소가 전부 고요함에도 한지수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든든한 기둥처럼 곁을 굳건히 지켜 주는 이가 이렇게 손을 잡아 주고 있었으므로.
한지수는 자신의 발 부근까지 올 듯 말 듯 한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식의 신이 했던 말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아끼는 별을 지켜 줘.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한지수는 이 별이 어떻게 멸망의 길을 걸었는지 안식의 신과 정하진을 통해 대략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안식의 신이 자길 이 세계에 다시 심은 이유는 별의 존속을 위해서지, 한지수라는 ‘개인’을 위해서가 아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재윤이 형이 강림한 그 이후엔 어찌 될지 모르는 걸까.’
강재윤.
육성으로 뱉지 않고 그저 떠올렸을 뿐인데도 여전히 너무 그리운 이름이었다. 그립고, 그립고,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제 가슴에 새겨진 아련한 이름…….
“…….”
한지수는 멍하니 잔물결을 응시하며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세계에 조율자로 강림할 강재윤은 제가 알던 강재윤이면서 그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었다. 예전 같은 형태의 사랑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어도 그는 여전히 제게 있어 소중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사람이니까.
그러다 문득, 또 다른 의구심이 불쑥 비집고 올라왔다. 지난 삶에서 강재윤의 부재 내내 제 곁을 지키고, 한지수라는 사람이 어떻게든 세상을 살아가게끔 헌신했던 남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곁에 있다.
그렇다면 후원자 수준까진 아니어도 후원자에 거의 근접한 힘을 가졌던 존재, 별에 닥칠 재앙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막강했던 그 시간 선의 조율자 강재윤은 어떻게 된 걸까?
안식의 신이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라고 치부했던 것들엔 분명 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한지수는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잘 쉬고, 잘 먹고 살라고 큰 희생을 감수하며 자신과 동생을 살려 줬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아. 그래도 안식이 대답이 없으니……. 아냐. 어차피 안식이 알려 주지 않으면 모를 일이니까 그만 신경 쓰자…….’
마음처럼 쉽지 않을 거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 의문이 떠오를 때마다 계속 신경 쓰지 말자며 자신을 달래곤 했다. 지금처럼 얼마 못 가 다시 고민하고 걱정하고의 반복이었지만.
제 마음 다스리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답답한 마음 탓인지 저도 모르게 불쑥 입이 먼저 열렸다.
“하진 씨.”
“네.”
한지수가 입을 열기만 기다린 티가 풀풀 나는, 지나치게 빠른 반응이었다. 덕분에 작게 웃은 한지수가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슬슬 혼자 묵힌 고민을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렇지만 차마 본질적인 문제는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안식의 신이 나를 살리려고 어떤 큰 희생을 했을지 모르겠다고, 아니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당신 곁에서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될지 가늠되지 않는다고…… 이런 고민을 어찌 그에게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이렇게 있으니 좋네요.”
“예, 저도 좋군요.”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이니만큼 이 부분은 혼자 앓자고 재차 다짐한 한지수가 결국 적당한 진심을 뱉었다. 혹시나 제 말에 우려가 묻어 나올까 봐, 그나마 고르고 고른 말을 작게 읊조리는 게 지금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제력이었다.
하고픈 말은 아니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어서일까. 제 손을 잡은 큰 손에 미약한 악력이 더해졌다. 큰 엄지가 제 손등을 어루만지고 보듬는다. 간지러운 손길에 쿡쿡 웃으며 그의 어깨에 볼을 비비니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앞으로도 이렇게 쭉 하진 씨랑 있고 싶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어디든 상관없이.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지수 씨랑 이렇게 쭉 함께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형태라도요?”
“네. 제가 동물로 변하는 변신 아이템을 사용해도 좋고……. 아니면 다른 모습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군요.”
“하하, 동물로 변하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요.”
갑자기 어떤 형태라도 좋다더니, 그게 저런 뜻이었나 싶어 웃던 지수는 문득 그게 다가 아님을 느꼈다. 정하진도 예상한 걸까. 지금 제게 주어진 이 시간이 굉장히 짧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는 그와 제대로 대화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속내였다. 하지만 한지수는 굳이 속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정하진과 손을 잡고. 의문은 잠시 묻어 두고. 그의 말대로 함께할 수 있는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동물…… 그러게요. 뭐라도 좋으니, 다시 태어난다면 서로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하. 좋네요. 그럼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번 생엔 지수 씨가 저를 찾아와 줬으니, 그땐 제가 지수 씨를 찾아가겠습니다.”
“저를 어떻게 알아보게요?”
“죽기 전에 안식의 신이나 푸른 달의 신에게 부탁하죠. 제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음, 만약 그래도 안 들어주면요?”
“그럼 버텨야죠. 지수 씨도 알겠지만, 전 참을성도 많고 상당히 끈질긴 편입니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확하게 지수 씨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할게요.”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다정했다. 목소리와 손길은 부드러웠으며,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선했다. 그의 깊은 애정에 취한 한지수는 몇 초 전만 해도 꼭꼭 숨기겠다고 다짐했던 진심을 약간 꺼내 보였다.
“음, 하진 씨. 만약에요. 제가 하진 씨보다 조금……, 음, 조금 많이 빨리 떠나서……, 다시 만났을 때 나이 차이가 심하면 어떻게 해요?”
“흠, 그렇게 되면……, 지수 씨가 엄청난 연하를 만나겠네요.”
“아하하, 진짜 웃겨.”
한지수는 정하진의 진지한 대답에 일순 코를 찡그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작게 들썩이며 웃는 한지수를 내려다보던 정하진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제 연인의 턱을 조심스레 들어 올린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얽힌 순간, 한지수는 괜히 하늘을 흘끔거리며 물었다.
“드론 없어요?”
“예. 아까부터 이미 없습니다.”
“……정말이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재차 묻자, 정하진은 대답 대신 제 연인의 손을 꼭 맞잡고 이마에 짙게 입을 맞췄다.
이어 그와 입술이 포개졌을 때, 한지수는 제가 너무 헛된 고민을 했다고 느꼈다. 이 남자는 제 고민이 뭔지 아마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런 말에 어울려 준 거겠지. 그래도 다음 생에도 만나자는 말이, 그땐 자기가 먼저 만나러 오겠다는 말이 기꺼웠다.
생각해 보면 비단 제 문제만은 아니었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가.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나온 말이었고, 그 말은 놀랍도록 진리에 가까웠다.
‘답도 없는 고민 하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겠어.’
날숨에 고민을 담아 보낸 지수는 홀가분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고민까지 끌어안은 정하진의 품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