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삶의 대가 1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도 하고, 종종 게으름 부리기도 했다. 모든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똑같았다.
정하진이 한지수와 김현아를 찾아간 날 이후 김현아는 지체하지 않고 국내 대형 길드의 길드장들을 모두 소집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대형 길드장들에게도 직접 하나하나 연락을 넣었다.
한지수는 국내와 일본엔 기대를 걸었지만, 그 외 국가들의 반응은 크게 기대하진 않은 편이었다. 한국과 일본 대형 길드는 결속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해외 대형 길드의 에스퍼들은 한자리에 모으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까.
해외 에스퍼들 중 특히 유럽과 미국은 최대한 정부에 협조하는 한국 각성자들과 결이 전혀 다른 이들이었다. 오히려 정부와 척을 진 에스퍼가 훨씬 많다고 봐도 좋은 수준이었다. 그랬기에 연락을 받을지부터 걱정이었는데, 김현아와 정하진이 요청하자 당연하다는 듯이 한자리에 모여 주었다.
에스퍼가 요구하는 대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심지어 정부의 요청에도 잘 움직이지 않는 이들이 바로 고고한 S급 에스퍼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오직 김현아와 정하진의 말을 듣고 대한민국으로 모인 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평소 그리도 질색했던 정부 의원들과 동반 입국을 했다. 공식적으로 언급하진 않아도 ‘이번 일’만큼은 저들이 속한 국가의 정부와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었다.
대격변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가 건재한 한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경우엔 에스퍼와 정부의 협력이 딱히 큰일이 아니었지만, 그들 나라에서는 이 자체만으로 굉장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드디어 이 나라의 에스퍼들도 정부와 협력하는 거냐며 반기는 파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에스퍼가 본인의 자유의사와 관계없이 국가에 귀속되는 건 안 된다는 반대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조금 더 본질적인 문제를 논하게 되었다.
‘전 세계 최상급 에스퍼들이 동시에 정부에 협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어지간해서 절대 모이지 않는 인간들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다. 대체 왜? 혹시 또 큰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불안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누가 들어도 무시할 허황된 소리부터 관계자가 듣는다면 그럴싸하다며 놀랄 수준의 여러 루머와 이야기가 나돌았다.
특히 예지 능력을 지닌 프랑스 소속 S급 에스퍼 역시 이번 회담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진 후엔 지구에 2차 대격변이 생기는 게 아니냐는 공포가 순식간에 번졌다.
그렇게 사람들의 공포심이 정점을 찍기 직전, 이번 회담의 목적을 알리는 방송이 예고되었다. 한국 시간으로 오후 6시에 시작된다는 생방송을 기다리느라 거의 모든 인류가 깨어 있었다.
푸른 별에서 가장 고등 지능을 갖춘 종족이 각자의 존속을 알리려는 듯 환히 불을 밝힌 순간. 잠깐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사방에서 터지는 수많은 플래시 세례 속에 한 사람이 등장했다.
마이크 앞에 선 김현아는 저를 비추는 카메라들을 사뭇 진지한 얼굴로 둘러보았다. 김현아 앞까지 입장할 수 있었던 이들은 각국의 언론인들이었다. 그것도 프로 중의 프로들.
그 어떤 상황이나 취재 현장에서도 표정 관리 정도야 쉽게 하는 이들이 지금 김현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한 채 마른침을 겨우 삼키고 있었다.
김현아는 이들보다 더 큰 불안에 떨고 있을 인류를 위해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담담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먼저 회담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건부터 공표 후 질문받겠습니다.”
모두가 숨죽인 순간, 김현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 지구에 2차 대격변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 * *
[속보] 지구에 곧 대재앙 닥칠 예정
[속보] 2차 대격변 성큼 앞으로? 각국 대응책 마련 중
[속보] 김현아 에스퍼 ‘대책 마련과 고민은 전문가들과 에스퍼들이 할 테니, 여러분은 침착하게 오늘을 살아가면 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인터뷰
[속보] 2차 대격변 대비 벙커 매물 쏟아져
[속보] 애슐리 대통령 ‘2차 대격변은 국가 안보 아닌 지구 안보의 문제, 세계가 화합해 해결해야 할 숙제’라며 평화 협약 유지 필요성 강조
[속보] 각국 일시적 공황에 빠졌으나, 현재 큰 폭동 없이 진정 중
[공식] 대응책 마련 발표 후 정신계 에스퍼 자원 폭주
[단독] 1차 대격변 당시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벙커로 몰린 시민들 (사진)
[공식] 서울 시민들이 여전히 출근하는 모습 본 해외 언론들, 한국인 특유의 침착함 극찬……
[공식] 바티칸 프리스트 조슈아 에스퍼 인터뷰 중 김현아 에스퍼 발언 지지 화제. (영상)
[단독] 정하영 에스퍼, 비각성자 동생과 단둘이 서울 도심 카페 데이트 포착. 그 자리에서 홀 케이크 두 판 비워…… (사진)
[핫이슈] 플레임 길드 신지원 길드장, 부산 던전 공략 후 진소민 힐러와 박호연 에스퍼와 광안리 인근 횟집에서 공개 회식 (사진)
[단독] 정하진 에스퍼 미모의 여성과 데이트 포착. 개인 섬 별장에서 무인도 생활!? (사진)
[공식] 정하진 에스퍼 별장에 머무르는 여성의 정체는 평화 길드 소속 가이드. 현재 페어 계약 진행을 위해 서로 알아가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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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서는 각자 자리에서 어제처럼 오늘을 보내고, 또 다른 내일을 맞이하시면 됩니다.
적당히 일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독서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시간을 보내십시오.
지금껏 우리가 늘 그래 왔듯이 오늘 하루도 평범하게 보내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전 내일부터 그동안 미뤄 왔던 수영을 배울 겁니다.
S급 에스퍼니 적어도 가라앉진 않겠죠.
-프리스트 조슈아 에스퍼 인터뷰 中 -
* * *
한 익명 커뮤니티
[제목: 이번엔 정말로 퇴사할까 해] [추천: 46811 / 싫어요: 10]
[내용]
제목 그대로임. 뭐 불안 조장하려는 거 절대 아님. 그냥 방송 다 보고 그저께 홀리씨 저 인터뷰까지 보니까 정말 현재를 살아야겠더라고.
난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고 지금껏 일만 했거든. 내 생에 졸업하고 일 안 한 기간은 대격변 시절뿐임;
고만고만한 일로 풀칠하며 사느라 지금까지 한 번도 해외여행 못 가봤고. 지금은 애인이랑 동거 중인데 난 퇴사각 애인은 휴가각 재고 있어.
우리 둘 다 비행기 타고 외국 나가서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놀 거 생각만 해도 넘 좋더라.
재취직은 뭐... 어떻게든 되겠지ㅠㅠㅋㅋㅋㅋ
[댓글]
나도 킴릳이랑 홀리씨 인터뷰 보니까 계속 미뤘던 일 하고 싶어져서 양궁 배우기로함ㅋㅋㅋ 아 그리고 바티칸 가면 꼭 프리스트 달력 사! 버전 일반 버전이랑 상탈이랑 두 가지니까 조심해.
└나도 예전에 바티칸 여행 가서 일반, 상탈 달력 둘 다 샀는데 2년째 달력 안 바꿈
└원래 일정은 폰으로 보는 거지ㅇㅇ
ㅁㅈㅁㅈ 우린 현재를 살아가야지. 글고 솔직히 킴릳이 나서서 말해서 그런지 좀 신뢰가 감. 정신계 에스퍼 모집하는 이유도 투명하게 공개했고. 발표한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번지면 안 된다고 하니까 나도 최대한 마음 편하게 있으려고.
└그래서 지금 우황ㅊㅅ환이랑 진정계열 약이 그렇게 많이 팔린대
└나도 청심환 사러 갔는데 없어서 못삼ㅠ
└ㅇㄴ인간들 그렇게까지 진정할 필요 없다곸ㅋㅋㅋ
└사지 맠ㅋㅋㅋ그냥 과도하게 겁먹지 말고 평소처럼 차분하게 지내면 된다잖앜ㅋㅋㅋ 개웃기넼ㅋㅋㅋ
미국 에스퍼들도 늘 하던 대로 살겠다며 귀국하자마자 평소처럼 정부랑 협력 안 하고 있대서 현웃터짐ㅋㅋㅋㅋㅋㅋㅋ
└쟤들도 진짜 한결같고 평소 같아서 신뢰 간다ㅋㅋㅋ
└근데 진짜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듯. 이번엔 예측했다잖아. 대비책도 이미 마련하고 있고. 걱정할 건 내 통장 잔고야.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평범하게..........ㅠ
└22222
└33333...ㅅㅂ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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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아빠 댕웃김] [추천: 8913 / 싫어요: 8]
[내용]
킴릳 인터뷰 방송 끝나고 갑자기 나랑 동생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아빤 너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다가 혼자 울컥했는지 막 훌쩍임ㅋㅋㅋ
나랑 동생도 솔직히 쫌 눈물 났는데 갑자기 혼자 진정하더니 늦게까지 폰 보지 말고 빨리 자라며 잔소리함ㅋ ㄹㅇ10초 애틋하고 평소로 돌아옴ㅋㅋㅋㅋ
이렇게까지 빨리 평소를 살아가라는 건 아니었는데...
[댓글]
22나도 분위기 타서 엄마한테 용돈 달라고 했는데 실패ㅋ 이미 너무 평온하심
└ㄹㅇ장난 아님 울엄마 비각성자인데 대격변 때 후라이팬으로 몹들 대가리 깨고 다녔음;
아 울 아빠도 그랬엌ㅋㅋㅋㅋ 구라아니고 진짜 5초 사랑 고백하고 급 침착해짐ㅋㅋㅋㅋ 다들 똑같구낰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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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ㅈㅎㅈ 페어 확정인가?] [추천: 7482 / 싫어요: 321]
[내용]
정하진 페어 가이드 떴네? 서로 알아가는 단계라는데 둘이 무인도 별장에서 지내는 거 보면 이미 잘 알고 계신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
근데 가이드 누굴까? 사진 화질 ㅈ구린데도 범상치 않은 미모가 느껴짐...
[댓글]
(블라인드 처리된 댓글입니다.)
└뭔 상관이야, 뭐든 잘 맞는 페어 있으면 좋은 거지. 왜 난리람?
└이런 한심한 애들 때문에 에스퍼들이 자기 페어 공개 안 하려고 하는 거임;
└육지에서 존나 줌 땡겨 찍어 ㅈ구린 저화질 사진으로 성형 유무를 확신하다니 오진다
└ㄹㅇㅋㅋㅋ 이목구비도 안보이는데 성형 ㅇㅈㄹ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정하진 페어 이야기는 아는 사람들은 아는 분위기였던 듯. 각성자 파파라치들 사이에서도 이미 한차례 이야기 나돌았는데 피스 쪽이랑 딜해서 기사 안 낸 거로 알고 있음.
└그놈들이 딜했다고 기사 안 낼 놈들이 아닌데 무시하기엔 엄청난 금액이었나보군
└전에 한번 기사 올라왔다 내려가긴 했는데 그때랑 다른 사람이거나 변신 아이템 썼을 듯
└222변신 아이템 썼을 듯 수틀리면 또 쓰고 또 쓰겠지 솔직히 ㅈㅎㅈ 전담 가이드면 변신 아이템 하루 3개씩 바꿔 써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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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툭-
각성자 관련 이야기가 활발한 유명 커뮤니티 몇몇 베스트 글을 훑어본 한지수는 내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드디어 내려놓았다.
‘나쁘지 않네…….’
내심 2차 대격변으로 패닉이 오진 않을까, 이상한 선동질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진 않을까 싶어 여러 유명 커뮤니티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쭉 살펴본 차였다. 그 결과 현 상황이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미 각 전담팀이 모니터링하면서, 여러 유명 커뮤니티에 섞여 들어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될 만한 글을 쓰고 있을 테니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정하진이 요리하는 사이 침대에서 뒹굴며 몰래 살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우였나 보다.
베스트 게시글은 대부분 저런 느낌의 긍정적인 글이 많았다. 그래도 다 좋은 글만 있는 건 아니었다. 2차 대격변을 과하게 걱정하는 비관적이고 안 좋은 미래를 추측하는 글도 많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엄청 빠르게 진정됐어.’
며칠 전, 김현아를 필두로 세계 각국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이 방송된 당일은 말 그대로 전 세계가 공황 상태였다.
불안해진 사람들은 늘 그렇듯 식량과 생필품을 사재기하기 시작했고, 이 틈을 노린 사기꾼들은 말도 안 되는 시설을 ‘SS급 수준의 보호 스킬로 보호 중인 벙커’라고 속이며 팔기도 했다. 그 짧은 며칠 사이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여럿 일어났다.
각국 정부는 온갖 폭동을 막고,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쉽지 않았다. 인류 대부분이 정부의 괜찮다는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까.
이에 각국 대통령들, 총리들은 국민의 가까운 곳에 자신이 있음을 알렸다. 어디 벙커에 홀로 숨은 게 아니고 당신들 곁에 나 역시 있노라며 경호원을 대동한 채 시민들 앞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부통령과 국회의원들 역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일상을 SNS에 자주 올렸다. 한 주지사는 어린 자녀의 하교 시간에 맞춰 직접 학교로 데리러 가는 등 평범한 일상을 보이기도 했다.
에스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평소와 달리 저들에게 붙는 파파라치를 떼어 놓지 않았다. 아니, 최근엔 그들이 따라다니는 걸 적극적으로 방치했다. 직접 SNS에 제 사진을 올리기도 하면서 나 역시 당신들 곁에 있노라고 안심시키곤 했다.
이와 같은 각국 유명 인사들의 노력도 분명 혼란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사실상 사람들을 가장 진정시킨 것은 한국인들의 모습이었다.
2차 대격변 관련 기자 회견 다음 날 아침에도 한국인들은 어김없이 출근하고 등교했던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피곤한 얼굴로 아침을 시작하고, 지하철에서 내려 터덜터덜 회사로 가는 모습들에 외신들은 주목했다. 몇몇은 인터뷰도 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출근할 수 있냐는 질문에 오히려 출근하지 않으면 뭘 하겠냐는 반응이 많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시작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인터넷에서, 그리고 해외 언론에서 큰 화제로 다뤄지며 긍정적인 영향을 전파했다. 인류는 여전히 혼란했지만, 작은 힘이나마 서로를 지탱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정하진의 페어 가이드에 대한 기사도 평화 길드에서 유도한 대로 나와 줘서 적당한 수준의 소란으로 묻어 갈 수 있었다. 정하진 역시 여전히 모두의 곁에 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일시적으로 파파라치들을 방치하는 상태였다.
무인도라고 해도 어디 먼 외딴섬이 아닌 전라남도 완도 인근에 위치한 무인도였기에, 파파라치들 역시 멀리서 비행 드론 등으로 정하진이 여전히 한국 영토에 있음을 알렸다.
굳이 정하진이 위치를 공개한 이유는 불안과 혼란의 시기, SS급 에스퍼 정하진과 김현아 두 사람 모두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정부의 바람이 컸다.
다만 한지수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푹 쉬었으면 하는 정하진의 바람도 있었기에 느긋하게 지낼 수 있는 둘만의 무인도행이 결정된 것이었다. 물론 아직 한지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는 건 꺼려졌기에 기존에 만들어 둔 김지수 신분을 이용했지만,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한가한 무인도 생활은 퍽 마음에 들었다.
‘다행인 일이지.’
한지수가 현재의 긍정적인 상황들에 안도하고 있을 때, 기다리던 이의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놀랄까 싶어 일부러 소리 내 다가오는 남자의 배려가 기꺼웠다.
거기에 부드럽고 작은 노크 소리도 그랬다. 사소한 것에도 잘 놀라는 저를 대할 때 저런 작은 것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나갈게요.”
짧게 대답한 한지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눈앞을 가로막는다는 표현이 잘 어울릴 법한 장신의 탄탄한 몸이 눈에 들어왔다.
“오…….”
눈앞을 가로막은 넓은 가슴 덕분에 터질 듯한 앞치마를 보고 있자니, 분명 문을 열었는데 그 앞에 또 하나의 문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여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샜다. 문짝으로 치부 당한 몸의 주인은 한지수가 웃는 모습만 봐도 좋다는 듯이 덩달아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아까 빵도 먹었잖아요.”
문을 열기 전부터 은근한 냄새가 풍기긴 했지만, 방 밖으로 나가니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늘 그렇듯, 오늘도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 둔 진수성찬을 본 한지수가 고개를 저으며 의자를 빼 앉았다. 어차피 저는 차려진 음식의 반의반도 먹지 못하겠지만,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하진이 전부 먹어 줄 테니까.
지금 한지수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문제는 음식 같은 사소한 게 아니었다.
“잘 먹겠습니다.”
정하진이 만든 음식은 늘 그렇듯 맛있었다. 입에 너무 잘 맞아서 탈일 만큼. 잠시 밥에 집중하던 한지수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곤 거실로 시선을 옮겼다.
정하진이 요리하는 동안 거실 전면 창문을 모두 열어 둔 덕분에 파도 소리와 더불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붉은 노을이 고스란히 거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혼의 시간은 매일 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답기만 했다.
‘이런 멋진 곳에서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안식의 신은 아예 내 질문을 무시할 셈인가?’
한지수는 제가 안식의 신에게 물었던 수많은 질문 가운데 유일하게 답변받지 못한 질문을 떠올렸다. 안식의 신은 그 질문에 대해서만 대놓고 곤란해하고 회피하는 게 보일 정도로 꺼리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확인하고 있는 후원자와의 다이렉트 메시지 창엔 여전히 신규 메시지가 없었다. 한지수는 음식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꾹 참고 식사에 집중하며 안식의 신을 찾았다.
식사 후 정하진과 거실에 깔아 둔 두툼한 이불 위에 누워 붉은 하늘을 머금은 채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결을 감상할 때도, 정하진과 나란히 별을 바라보며 해변을 산책할 때도 한지수는 안식의 신에게 오직 한 가지 질문만 지속해서 물었다.
‘안식. 강도 높은 맹약을 해도 상관없으니 알려 줘…….’
세상 대부분 일이 그러하듯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하다. 특히 얻을 것이 귀하고 값진 것일수록 더 많은 대가를 필요로 하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한지수는 궁금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그리고 새롭게 주어진 이 시간의 대가가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