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근간 6
“흠…….”
한 남자가 천장을 가득 메운 별들을 응시하고 있다.
천장 대신 형형색색의 어둠이 뒤섞인 하늘과 둥그런 돔 형태의 별들이 자리 잡은 공간은 마치 우주를 압축해 둔 장소처럼 보였다.
남자는 그 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별자리 중 하나를 발판 삼아 딛고 서서 머리 위로 맴도는 별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시선을 둔 곳은 아주 멀리 있는 푸른 별이었다. 남자가 아끼는 푸른 별은 제 우려와 달리 아직까진 안정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진 됐고.”
이어 그가 시선을 돌린 별은 연보랏빛과 군청색이 뒤섞인 르뒤옌 별이었다. 관측대로라면 이미 멸망의 길을 걷다 못해 그 가도를 타고 균열이 생겼어야 했을 터. 한데 현 상태는 불안정하긴 해도 그럭저럭 버텨 내고 있었다.
별의 징후를 관찰하던 장발의 남자는 피로한 얼굴로 미간을 주물렀다. 그러자 존재감을 지운 채 곁에 서 있던 머리에 행성을 얹은 채 정장을 입은 이가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의 벗이여. 조금 쉬는 게 어떻겠나.”
“참나. 신이 쉬는 거 봤어?”
고개 돌린 안식의 신이 행성 머리를 향해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러자 행성을 안식의 신에게 가까이 기울인 펄 역시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많이 봤고 말고. 지금도 대부분 그대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뒹굴고 있지 않은가.”
“……나 같은 성실한 신이라고 정정할게.”
확실히. 위쪽 분위기는 그러했다. 특히 펄 정도 되는 신들은 대부분 딱히 어떤 별이 빛을 잃게 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중 몇몇은 제 고향 행성이 엮인 일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도 했고.
푸른 별을 구제하고자 노력 중인 안식의 신은 그 사실이 너무도 분했다. 그들의 힘만 빌릴 수 있다면, 이딴 헛짓거리는 하지 않아도 충분히 구제 가능한 작디작은 별 하나 구하고자 저 혼자 고군분투하며 온갖 편법을 쓰고 페널티를 먹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진 신이자 우주의 관측자 중 하나인 펄이 제게 호의적이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리 제 어깨를 주물러 주면서 친근함을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그대는 쉬어야 하네. 알고 있겠지?”
“…….”
안다.
잘 아니까 문제다.
안식의 신은 제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쪼갠 자신들은 모두 별을 구제하기 위해 희생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힘이라곤 아주 오래전, 갓 신계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모든 것이 안정적이네. 전부 벗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고 있지.”
“……그래서 이상해.”
“무엇이?”
“……너무 바라는 대로 되고 있다고. 수상할 정도로.”
“…….”
흔해 빠진 소리지만, 세상엔 인과율이라는 게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신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무언가가 ‘존재’하도록 함은 이름을 거론할 수 없는 창조자가 결정한 것이고, 그가 결정한 것은 ‘존재’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
말장난 같은 이야기지만 신 역시 창조주가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한 모든 것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과거 푸른 별에 멋대로 개입했다는 대가로 제 몸이 산채로 조각조각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 어떤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전신을 난도질당하는 것 같은 고통은 종종 선명하게 떠올라 안식의 신을 괴롭혔다. 차마 두 번 겪고 싶지 않은 징벌이었다. 그 징벌의 순간만큼은 안식의 신 역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까.
끔찍한 고통을 떠올리고 있자니, 절로 르뒤옌 행성으로 시선이 갔다. 안식의 신은 저와 같은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빛을 잃고자 했던 별의 징후를 살펴봐야 했다. 그런 그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가 재차 휴식을 권했다.
“벗이여. 가끔은 이상하리만큼 일이 잘 풀리는 때도 있는 법. 그것이 꼭 무언가의 전조는 아니라는 것 잘 알지 않나. 그러니 이제…….”
“나중에. 나중에 쉴게. 르뒤옌 쪽이 불안해서 그래. 제자 놈이 의심할 줄 알게 되면 곤란해.”
제 실수와 실패, 그로 인해 사랑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꼴을 지켜봐야 했던 날을 떠올린 탓인지 환상통이 전신에 퍼졌다. 움켜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지만, 안식의 신은 굳이 제 약한 면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저보다 전능한 펄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자꾸 제게 쉬라고 하는 거겠지.
“벗이여.”
“…….”
“르뒤옌 징후는 내가 관찰하겠네. 그러니 그동안이라도 잠시 쉬게.”
“…….”
“가서 사랑하는 동생과 시간도 보내고. 새로 온 그 아이와도 시간을 보내게. 벗이 동생과 마지막으로 산책한 게 언제였지?”
“…….”
안식의 신은 펄이 말한 동생을 떠올렸다.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드리워진 행성 머리를 바라보자, 행성 주위를 맴돌던 황금빛 고리가 안식의 신의 코끝을 스치며 간지럽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르뒤옌에 예기치 못한 징후가 나타나면 내가 개입한다고 약속하겠네. 혹여 위에서 반발하면 손가락 몇 개쯤 걸면 될 일.”
“그거 손을 분쇄기에 넣고 다니는 기분이던데.”
“내 벗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지. 그러니 어서 눈을 감고 쉬게. 산책로로 보내 주도록 하지. 마침 타이밍이 딱 맞겠군.”
“…….”
“불안해할 것 없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일이 술술 풀리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러니 안심하고 다녀오게.”
안식의 신은 저 말을 듣고 나서야 펄의 장갑 낀 손이 제 눈을 덮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대로 눈을 감고, 펄이 이끄는 대로 그가 만들어 준 산책로로 의식을 옮겼다.
펄이 선사해 준 길을 받아들이자, 사계의 모든 꽃이 피어난 공간이 펼쳐졌다. 안식의 신은 이미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푸른 별의 인간 중 일부는 이렇게 계절 불문하고 꽃이 핀 공간을 저승이라 표현했는데,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길한 곳은 아니었다. 그저 신들이 제가 아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 아니, 정확히는 미물들이 ‘예쁘다’라고 기억했던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공간일 뿐이었다.
신들은 저들이 아끼는 미물들이 꿈에서나마 행복하길 바랐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했던 모든 꽃이 존재하고, 모든 색의 하늘이 존재하고, 모든 바람이 존재하고, 모든 계절이 한데 존재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아름다운 공간에, 한 여자아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식의 신이 다가가자, 그와 눈이 마주친 소녀가 대번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과장되게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다.
“하아……. 잠들었나 보네. 또 자각몽인가.”
“…….”
나이에 맞지 않는 말투로 투덜거린 소녀가 안식의 신을 노려본다. 안식의 신은 소녀를 향해 미소 지을 뿐이었다. 제가 이 소녀에게 보여 주고 싶은 얼굴은 웃는 얼굴뿐이었으니까.
안식의 신의 미소를 본 소녀는 혀를 차더니 곧 꽃밭에 털썩 주저앉아 옆자리를 팡팡 쳤다. 안식의 신은 망설임 없이 옆에 앉았다. 사랑하는 제 동생의 곁에.
“이상하게 큰오빠가 나오는 꿈은 꼭 깨면 잊어버리고, 이렇게 꿈일 때만 꿨었단 게 기억나더라. 지금 이 꿈도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하겠지?”
소녀가 묻고,
“응.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만났다는 건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을 거야. 우리 현아는 똑똑하니까.”
소녀의 오빠가 대답한다.
“……똑똑하긴. 내 머리가 좋았으면 이리 고생도 안 했어. 이딴 꿈에서나 볼 게 아니고, 오빠를 어떻게든 찾을 방법을……. 에휴. 됐다. 꿈에서 뭔 소리냐, 이게. 내 뇌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치?”
소녀가 자조하고,
“그렇지 않아. 이거 봐. 나는 언제나 현아의 곁에 있어. 지금도, 앞으로도. 쭉.”
소녀의 오빠는 소녀를 위로하며 손을 잡는다.
바람이 분다.
꽃잎이 휘날리고, 소녀와 소년의 머리카락도 흩날린다.
소녀의 시선이 제 손등을 덮은 손으로 떨어져 내린다. 작은 손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그래. 항상 나를 지켜보겠지. 근데 난 그 말이 싫어. 오빠가 천국에나 있다는 거 같아서 말이야.”
“…….”
“……오빠가 사라진 날 발생한 빛을 연구 중이야.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 나는 언젠가 반드시 오빠가 있는 곳에 닿을 거야.”
소녀의 오빠는 배시시 미소 지을 뿐이었다. 동생의 사랑은 자신이 받기엔 너무 과했다. 그저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저를 찾겠다니……. 포기하지 않겠다니……. 펄이 자꾸 쉬라고 강요했던 게 이 말을 들려주려는 뜻이었구나 싶어 포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현아가 나를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꼭 오빠처럼 말하네. 꿈에 나오는 덩어리 주제에.”
“하하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꿈은 늘 짧다. 그러니 둘의 시간은 곧 끝날 것이다. 안식의 신은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소녀의 손을 꼭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대전.”
“……?”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꿈은 끝나 간다. 행복한 시간은 늘 순식간에 증발하곤 했다. 새삼스러울 게 없었던 안식의 신이 미소 지은 채 손을 꼭 잡았다 뗐다.
이 꿈에서 소녀가 기억할 것은 오직 저 두 음절뿐일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지금, 이 아이에게 제가 주고자 하는 건 추억보다는 정보였으니까. 사랑하는 제 동생이 만족할 수 있도록 말이다.
“……쓰읍. 졸았네.”
꿈에서 깬 김현아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어두워진 창밖을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졸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쌓였던 피로가 전부 증발한 걸 보면 꽤 단잠이었다 싶었다.
그 잠깐 사이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 있었다. 그중 던전 입찰 담당자가 보낸 최종 보고서를 쭉 살펴본 김현아는 입찰할 던전 목록을 훑었다. 특별한 것 없는 고만고만한 던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전에 생긴 특징 없는 던전에 시선이 갔다. 갑자기 왜 대전이 눈에 들어오는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충 부산물이나 쓸어 오자고 생각을 마친 김현아가 대전으로 최종 입찰 결정을 내렸다. 이후 다른 연락들을 확인하며 김현아는 대전 던전 입찰을 머리에서 지웠다. 하급 던전 따위는 김현아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 던전에서 외부 장비로는 측정되지 않았던 다량의 광물이 발견되는 것은, 심지어 그 광물이 다량의 에너지를 머금을 수 있는 농축 수정이라는 것은 며칠 후에 밝혀질 예정이었지만, 지금의 김현아는 알지 못했으니 놀랄 일도 없었다.
그저 잠깐의 단잠에 취했던, 어느 평범한 저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