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56화 (156/172)

#156.

근간 5

한지수의 긍정적인 반응을 본 정하진이 부드럽게 볼을 쓰다듬는다. 입도 맞추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신경 쓰였다. 평화 길드 건물엔 온갖 cctv와 감시 아이템이 도배되어 있었으니까.

“음, 일단 수정 건은 현아에게 메시지 보내 둘게요. 채굴팀이 알아서 전문적으로 처리해 줄 거예요.”

혹시나 한지수가 강원도 던전에 가자고 할까 봐 미리 선수 친 정하진이 김현아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뭐라 항변해 보려던 한지수는 이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전문 채굴팀이 있는 대형 길드니 자신 같은 개인이 나서는 것보다 훨씬 확실하게 일을 처리해 줄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럼 전 뭘 해요?”

“쉬어야죠.”

“저 그동안 쉬……지는 못했구나.”

돌이켜 보니, 돌아오고 전혀 쉬질 못했다. 며칠 내내 옆에 남자에게 시달렸던 걸 생각한 한지수의 눈이 뾰족해졌다. 정하진은 저 부리부리한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채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핸들을 잡았다.

“지수 씨는 쉬어야 해요.”

“네. 누구 덕분에 제대로 못 쉰 탓이 크니까 이제라도 쉬어야겠네요.”

부리부리한 시선은 아직도 유지되는 상태였다. 정하진은 입술이 씰룩거리려는 걸 참느라 안면 근육을 통제하며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요.”

“…….”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은 내려 두고 며칠이라도 쉽시다. 일단 각자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느라 시간이 걸릴 겁니다. 대형 길드라고 하더라도 입장이 있고, 또 여러 문제가 얽혀 있으니까요.”

“네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하진이 짚어 주니 머리가 조금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진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제가 있던 곳과 시간 개념이 많이 뒤틀렸다곤 해도 처음 재앙이 나타났던 날까진 아직 몇 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

“각자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을 때 현아가 알려 줄 겁니다. 우린 그때 합류해도 늦지 않아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좋아요. 당분간 제대로 쉽시다.”

“으응, 그래요…….”

한지수는 일단 긍정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쉬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 뭘 해야 할지 정하기보단, 정하진이 운전하는 대로 가만히 앉아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쉬어야 제대로 쉬는 거지?’

뭘 하며 쉬어야 하는 걸까? 곧바로 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아직 하지 못한 꼭 해야 할 일은 없을까 싶어 수첩을 꺼내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이런저런 잡다한 물건들 사이 놓여 있는 연하늘색 표지의 수첩 바로 옆엔 연분홍색 표지의 일기장도 보관되어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연하늘색 수첩엔 과거 한지수가 제게 부탁한 일 목록들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 제가 남긴 물건을 전해 주라는 이야기였지만, 그 외엔 다른 이야기도 몇 개 있었다.

‘쉬기 전에 혹시 해야 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다시 검토하자.’

할 일이 없어서 초조해하느니 차라리 이전의 한지수가 부탁한 내용이라도 다시금 상기하는 게 나을 듯했다. 그대로 인벤토리를 닫으려는 찰나, 옆에 보이는 일기장이 유독 신경 쓰였다.

‘일기는…….’

사실 이미 참고용으로 보긴 했다. 이 지구에 살았던 한지수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모두에게 제 정체를 밝힐 수는 없으니 적당히 대할 사람들에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예측하려면 기존의 정보가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지수의 일기는 대부분 긴 편이었는데 그걸 하나하나 읽으면서 확인하니 제가 느꼈던 감정과 똑같은 점도 많았고, 다른 점도 많아서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쨌든 이 일기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기에, 감상보다는 정보를 얻는 데 주력하느라 빠르게 훑어본 게 다였다.

궁금증이 남긴 했지만, 못다 읽은 일기는 나중에 보기로 결심하며 별다른 미련 없이 인벤토리를 닫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쩐지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걸 저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한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인벤토리를 열었다. 일기장은 그냥 일기장일 뿐인데……. 왜 이상하게 저걸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아냐……. 기분 탓일 거야. 애초에 저건 내가 쓴 일기도 아닌걸. 일기를 안 쓴다고 무슨 일이 나겠어?’

역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사람이 제대로 쉬지 못하니 별거 아닌 게 다 신경 쓰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지수는 당분간 푹 쉬면서 인벤토리는 열지 말고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연보랏빛 하늘이 점점 군청색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

늘 그렇듯 안식의 신의 제자는 오늘도 의미 없이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식이 끊겼어…….’

엄밀히 말하면 소식이 아니라 제 스승이 편법을 써서 마련해 준 통로로 흘러 들어오던 일기가 끊겼다.

초반엔 처음 일기를 본 후로 다음 일기를 보기까지 그 주기가 다소 길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무렵엔 적어도 두 달에 하나 정도는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칠 개월째 아무 소식이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남자는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르뒤옌 별의 백성들이 지어 준 아름다운 공중정원을 거닐었다. 이 별을 위협하는 재앙은 마지막 하나를 남겨 두고 모두 제압했다. 안식의 신의 말에 따르면 남은 하나가 훗날 지구에 가장 먼저 출연할 재앙이라고 했으니, 그 재앙을 막아 낸다면 얼추 르뒤옌의 정석 구제도 끝날 것이다.

그러니 제가 할 일에 몰두하면 될 터인데…….

‘왜 이리 불안하지?’

이상하리만큼 속이 심란했다. 만약 지구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니, 적어도 제가 기다리는 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안식의 신이 알려 주겠지 마음을 다독이려 했다.

그러나, 문득.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안식의 신이 과연 알려 줄까? 행성 구제 중인 내게?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기라도 한 듯이 기묘한 의심이 삐죽하게 솟았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안식의 신이 제게 강압적으로 굴고, 험하게 굴린 적은 많았어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진 않았었는데.

하지만 그 오랜 세월을 돌이켜 보니, 문득 안식의 신이 제게 중요한 그 사람의 신변과 관련해서 전해 주겠다고 했던 약속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갑자기 격렬한 감정이 속에서 요동쳤다.

‘……침착하자.’

남자는 진정하고자 노력했다. 기우일 것이다. 안식의 신이 의뭉스럽게 군 적이 많다곤 해도, 적어도 제게 그 문제만큼은 숨기지 않을 것이다. 스승이 제 성깔머리를 잘 아는데, 그런 큰 문제를 숨겼다가 제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애초에 직접 별에 관여하지 못하는 안식의 신에게 저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니 긴 시간 저를 공들여 키운 거겠지. 다른 제자들과 함께 키웠어도 유독 제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구 출신인 제자가 지구를 더 잘 구제할 거라 믿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그런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면, 숨길 일이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계속해서 누군가 제 마음에 의심의 불씨를 부추기는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불안함은 네 스승을 너무 맹신하지 말라며 자꾸만 의심이 먹고 자랄 장작을 던져 주었다.

“…….”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은 제자가 다시 하늘을 응시했다. 무수히 많은 별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엔 저리 많은 별을 보면 예쁘다고 조잘거리며 어깨에 기대던 이가 곁에 있어서 그랬던 걸까……. 그때 봤던 별보다 훨씬 많고 반짝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제자에겐 모든 것이 다 그랬다. 지구와 전혀 다른 식생이 분포하고 있는 이 별에서도 온갖 아름답고 신기하고 진귀한 것을 보며 살아왔다. 심지어 몇 가지는 직접 수집하기도 했다.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었다.

‘네게도 보여 주고 싶어…….’

신기한 식물이나 열매를 보여 줬을 때 놀라 눈이 동그래질 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처음 보는 게 생기면 모으는 버릇을 들이다 보니, 르뒤옌에 있는 제 성엔 온갖 물건이 넘쳐 났다. 그 어느 하나 가지고 돌아갈 수 없겠지만, 적어도 눈에 담고 기억해 두고 싶었다.

훗날 너를 만나면, 다 이야기해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직 그 바람 하나만으로 제자는 지구에선 상상도 못 할 것들을 눈에 담고. 먹고. 만지고. 느꼈다. 정작 저는 관심도 없으면서, 그 사람이 모를 것을 전해 주고 싶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고, 기억이 선명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제 마음은 고향 별에 있었다.

더 정확히는 푸른 별, 어떤 사람의 곁에.

“……잘 있을 거라 믿을게.”

제자는 일부러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제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안함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제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듯 그리 소리 내어 말했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술렁였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정원에 핀 꽃 중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꽃을 올려다봤다. 제 키보다 훨씬 높은 꽃은 굳이 지구의 것과 비교하자면 라넌큘러스와 비슷한 꽃송이를 가지고 있었다. 제자는 사뿐히 떠올라 꽃송이 위에 앉았다.

‘네가 본다면 요정 같다고 하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크기였다. 거대한 꽃 위에 앉아 드디어 시선 아래로 둔 꽃밭을 보며 제자는 모든 색을 눈에 담았다. 저는 감흥도 없으면서, 그리운 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가 좋아할 색. 모양. 향기. 그 모든 것을 오늘도 기억에 새긴다.

오직 한 사람에게 들려주고, 그가 신기하다며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꽃밭을 쭉 둘러본 제자가 살포시 눈을 감고 오늘도 다짐한다.

돌아가면……. 그땐 네게 매일매일 꽃을 안겨 줄 거라고.

혹시나 꽃을 주지 못하는 날이 있으면 여기서 본 꽃을 하나씩 이야기해 주겠다고.

변변찮은 실력이지만, 그림으로 그려 보기도 할 것이고, 정 어렵다면 정신계 에스퍼를 찾아가 제 기억을 추출해 형상화해 달라고 요청할 거라고.

네게 내가 본 모든 꽃을 안겨 주고 싶다고 말이다.

늘 그렇듯 매일매일 했던 다짐을 또 하며 잠시 감았던 눈을 뜬 제자가 하늘을 응시한다.

‘그러니까……. 어서 들려줘. 오늘은 하루는 어땠어? 잘 지냈어? 나는 네가 괜찮은지 궁금해.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것뿐이야.’

제자의 애절한 바람에도 하늘은 그저 여느 때처럼 의미 없이 아름답게 반짝일 뿐, 동글동글한 활자를 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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