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근간 4
김현아는 허공에서 갑자기 책상 위로 뚝 떨어진 거대한 상자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내 거야?”
“으응……. 그……. 한지수가 누나에게 남긴 거야…….”
“…….”
김현아는 상자 겉면에 <현아 누나 꺼>라고 써 둔 한지수의 글씨를 보고 쓰게 웃었다. 글자 옆엔 방긋 웃는 스마일 얼굴의 어설픈 졸라맨 그림도 있었는데, 졸라맨의 손엔 불(아마도 불로 추정되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여전히 그림 참 못 그려.”
다소 힘없이 말한 김현아가 상자를 슥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상자에 가려졌던 기가 팍 죽은 한지수의 얼굴이 보였다. 김현아는 저 얼굴을 잘 안다. 애정을 갖고 몇 년을 지켜봤던 데다가, 그리고 세상이 이 꼴 난 후 극적으로 재회한 다음부턴 아예 쭉 곁에 두고 지켜봤으니까.
마음이 심란하고 복잡하긴 했으나 앞에 앉은 녀석이 저런 얼굴을 한 게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상자를 툭툭 두드리며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진심으로 아꼈던 동생의 이름을.
“한지수.”
“……! 으, 으응.”
“이건 이따 혼자 있을 때 열어 볼게. 고맙다. 챙겨 줘서.”
“어, 응. 아냐. 당연한걸…….”
“그리고.”
“……?”
한지수가 조심스레 바라보자 김현아는 상자를 제 인벤토리에 쑤셔 넣고 깔끔해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잠시 뜸 들였다. 뭐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 심약한 녀석의 마음만 복잡해질 것을 알기에 최대한 빠르게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당장은 내가 너를 내가 알던 지수라고 생각하긴 힘들어.”
“……으응.”
“그래도 넌 한지수지. 네 말대로라면 저쪽에서도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그 한지수고.”
“응.”
한지수가 그건 확실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아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게 시간을 조금만 줘. 저거 열어 보고. 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으응……. 이해해…….”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네가 한지수라는 건 변함없으니까.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야. 말한 것처럼 그냥 내가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평소 김현아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한지수는 김현아가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저리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알고 애써 미소 지었다. 내심 저를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여겼기에 저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한지수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것을 확인한 김현아가 이번엔 정하진을 향해 시선을 살짝 틀었다.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지만, 김현아는 아까 분명 보았다. 그가 한지수의 귀에 속삭이며 미소 짓던 모습을.
‘……결론적으로 잘된 건가. 나중에 자세히 들어 봐야겠지만.’
당장은 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나가자. 일단 뭔가 나오기 전까진 둘이 쉬고 있어. 사소한 거라도 나오면 공유해 줄 테니까.”
“으응. 누나, 고마워.”
“그래. 그럼 연락해 줘. 지수 씨. 갈까요?”
한지수 가이드가 아니고 지수 씨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모습을 본 김현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아까도 저렇게 부르긴 했지만, 임세주 에스퍼가 있어서 그런지 꽤 사무적으로 불렀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그득히 섞인 어조였다.
마음속이 한층 더 심란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둘을 배웅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도,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리할 것도 많은 하루가 되겠구나 싶었다.
* * *
연구 센터를 나온 한지수는 김현아가 준비해 준 차에 올라탄 후에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세주 에스퍼가 알 수 없는 기운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심지어는 실물이 아니라 영상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무척 안심이 됐던 탓이다. 게다가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 더 모여 팀을 이루고 있었다니. 자신의 어설픈 계획이 한 발짝 현실과 가까워진 듯해서 마음이 조금 들뜨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최성훈 교수를 언급했을 때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었던 것도 좋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한지수에게 가장 큰 위안을 준 건 김현아가 제대로 저를 마주했다는 사실이었다. 한지수가 제가 알던 그 한지수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눈에 띄게 침울해하다 결국 현실을 바로 볼 자신이 없어 회피한 소년이 떠올라 더 그랬다.
당연히 정하율을 원망하거나 탓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본의 아니게 어린 소년에게 상처를 안겨 준 게 안타까웠고, 그 결과 정하진이 동생과 떨어지게 된 것이 못내 미안하고 신경 쓰였었다.
‘이건…… 이것만큼은 시간이 해결해 주진 못해도 도움은 주겠지.’
한지수는 본디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엔 시간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굉장히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문제는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상대가 마음 정리를 다 했을 때 함께 이야기해 봐야 할 문제였다. 그때 가서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한지수가 혼자 심란함을 추스르는 와중에 정하진이 갑자기 상체를 기울였다. 대뜸 제 시야를 가로막은 정하진 때문에 화들짝 놀란 지수가 식겁했지만, 그는 산뜻하게 벨트를 채워 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 여상한 모습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해 한지수도 설핏 마주 웃었다.
“지수 씨. 이제 뭐 하고 싶어요?”
중요한 일은 어차피 평화 길드에서 다른 대형 길드 간부들과 각성자 협회와 함께 알아서 진행할 것이다. 프리랜서 각성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니 정하진은 지수에게 이제 느긋하게 쉬는 게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서울은 아직 마포 던전 브레이크의 여파로 복구 중인 상태라 가능하면 다른 지역에서 쉬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려는데, 한지수가 제 워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한지수의 워치 액정에 화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화면에 보인 것은 평화 길드에서 입찰한 국내 던전 목록이었다. 그것도 던전의 특성 내용은 다 체크 해제하고 오직 등급과 부산물만 체크해 검색한 내용이었다.
“지수 씨, 던전은 왜요?”
“음, 제가 고민해 봤는데요. 수정부터 확보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최성훈 교수님이 수정을 이용한 정신 안정화 치료도 하셨잖아요?”
“그렇죠.”
“사람을 흩어 놓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니까. 수정에 정신계 에스퍼들이 안정화 스킬을 응용해 주입하고, 그걸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지역에 설치하면 어떨까 해서요. 그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으음…….”
정하진은 내심 딱히 현실성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다 멈칫했다.
‘최성훈 교수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최성훈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대격변을 겪으면서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집중하고 치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지식을 나누는 데에 전혀 아낌이 없었고, 정신계 에스퍼 중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등급에 관계없이 제자로 들이곤 했다.
게다가 꼭 최성훈 교수와 제자를 빼고도 정신계 에스퍼는 많았다. 던전에서 활약하지 못할 뿐 대부분 여러 분야에서 이미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들도, 반대로 조용히 살아가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정신계 에스퍼가 모두 남의 뇌를 주무른다고 생각해 꺼리는 사람도 많고 선입견도 많아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힘을 합친다면? 한지수 말대로 수정을 확보해서 정신계 에스퍼들이 각자 가진 안정화 스킬을 모두 주입한다면, 그 작업을 오랫동안 지속하고, 심신 안정에 도움을 주는 수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다면…….
잠시 생각에 빠졌던 정하진이 문득 한지수를 바라봤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뜸 들인 탓에 제 의견이 영 쓸모없어서 그런 걸까 싶어 시무룩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하진은 일부러 생긋 미소 지어 보인 후 대답했다.
“지수 씨, 생각해 보니 꽤 좋은 의견 같아요.”
“……! 진짜요?”
“네. 진심으로요. 하지만 그러려면 아주 많은 수정이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정신계 에스퍼의 자원도 많아야 할 거고요.”
“네. 사람 모으는 건 각 대형 길드에서 어떻게든 해 주지 않을까요? 뭐하면…… 사비로라도.”
“아니, 그건 괜찮아요.”
정하진은 바로 말리며 쓰게 웃었다. 한지수가 돈이 많다고 한들 에스퍼를 고용하는 금액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대형 길드들 역시 잘만 설득하면 알아서 협조해 줄 것이 분명했다.
“정신계 에스퍼들은 그동안 극과 극의 대우를 받았어요. 최성훈 교수처럼 의학 박사로, 또는 심리학자로 인정받는 경우는 그중에서도 몹시 드물죠.”
“으응, 맞아요. 정신계 에스퍼가 자기 속마음이라도 읽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실제 그런 능력을 지닌 이는 지구에 몇 없지만, 사람들은 마치 정신계 에스퍼라면 다 그런 줄 알고 유독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자원자를 모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처음엔 선입견 때문에 나서지 못해도 자기 능력으로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땐 발 벗고 나서려는 사람이 많아지겠죠.”
“…….”
한지수는 정하진이 저렇게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말을 할 때마다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내심 사람들이 나서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하는 저와 달리 그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체를 최대한 숨기고 살던 이들이 나설 것이라 믿고 있었다.
물론 저 역시 그걸 바라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 단단한 확신으로 대꾸하는 하진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제 앞에서 담담하게 미소 짓는 그를 마주 보니 어쩐지 다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긍정적인 의견은 많을수록 좋았다. 말로 표현하면 더 좋았고. 그래서 한지수는 저 역시 배시시 미소 지으며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네.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진 씨 말처럼 그런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