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근간 3
의식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희미한 오로라 같은 기운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각각 가진 기운에 한데 섞여 시너지를 발휘할 때 보이는 양상과도 비슷해서 여태 쉽게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임세주는 다소 얼떨떨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게……. 이게 구분이 쉽지 않은데, 보니까 알 것 같아요. 사람은 저마다 가진 기운이 다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 지금 정하진 에스퍼 같은 경우엔…….”
임세주의 시선이 정하진을 향했다. 그를 잠시 바라본 그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정하진 에스퍼는 흔히 말하는 성자 같아요. 왜 옛날 종교 그림에 보면 머리 위에 동그랗고 금색으로 후광이 표현되곤 하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금빛 도는 후광이 온몸을 감싸고 은은하게 빛나는 느낌? 이 기운이 정하진 에스퍼의 감정 상태에 따라 퍼지기도 하고, 몸에 흡수되듯 바짝 붙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말로 설명하니 힘드네요. 한마디로 기운도 퍼지는 때가 있고 모이는 때가 있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음…….”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로운 듯 눈썹을 까닥인 정하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현아 에스퍼 같은 경우엔 푸른빛이 조금 섞인 것처럼 보이는 은색 빛의 기운이 몸을 두르고 있어요. 두 분 다 보통 사람들보단 기운이 더 밝고 선명하게 보여요.”
김현아는 이미 들었던 이야기라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다는 뜻만 알렸다. 임세주의 시선이 이번엔 한지수에게 향했다. 한지수가 침을 꼴깍 삼키고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골랐다.
“음, 한지수 가이드는……. 이게……. 보통 다른 사람들의 기운은 안개 속에서 빛을 봤을 때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거나, 연기처럼 보이거든요. 그런데 한지수 가이드 기운은 거기에 오류가 난 것 같아요. 중간중간 공백도 있고, 그 공백이 모자이크처럼 보여서 화면이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자연적인 기운 같지 않아서, 그래서 제가 아까 놀랐던 거였어요.”
“오류…….”
한지수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진 것을 본 임세주가 당황했지만, 정하진은 그럴 것 없다는 듯이 제 연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잡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어, 네. 맞아요. 오히려 건강에 문제가 있는 분들은 기운이 굉장히 요동치는 편이에요. 영화에서 보면 왜 폭탄 터질 때 버섯구름 생기죠? 그런 것처럼 확 치솟다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흐려지기도 하고, 한마디로 안정적이지 못하거든요. 그리고 이 영상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임세주의 시선이 이번엔 멈춰 둔 태블릿 화면으로 떨어졌다. 화면 속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한 곳을 응시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무너지는 건물을 보고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 심정을 헤아리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화면 전체에 공포가 퍼져 있었다.
임세주의 눈엔 그들이 뿜는 기운이 폭죽처럼 머리 위로 펑펑 터지는 게 보였다. 평소 격한 반응을 보이는 집단을 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보고 있으면 불안해지는 기운. 당장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고, 이 사람들이 다 죽어 버리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눈에 선연하게 보였다.
그래서였다. 평소와 다르게 그들에게 드리워지는 아주 흐리고 존재감 없는, 한 톤 정도 어두운 장막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일단……, 이건 우리 팀이 조금 더 연구해야 할 것 같아요.”
팀이라는 말에 정하진과 한지수가 동시에 김현아를 바라봤다. 김현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각국에 요청해 임세주 에스퍼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모았어. 임세주 에스퍼만큼은 아니더라도 같은 걸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총 네 명이야. 지금 이 센터에서 함께 팀으로 던전 게이트를 연구하고 있고.”
“그렇구나……. 음, 임세주 에스퍼.”
“네, 한지수 가이드.”
“저는……. 그 기운을 어떻게든 파훼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어요. 가장 좋은 건 사람이 모이지 않는 거겠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그건 어렵죠…….”
아무래도 인프라가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인류는 과거보다 필수 시설이 활성화된 도시로 훨씬 더 몰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대격변으로 인구가 반으로 줄고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와중에도 오히려 더 바글바글하게 모여 살게 된 상태였다.
이러한 현상은 굳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추세였다. 물론 사람 모이는 곳이 싫어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한적한 곳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도 있지만, 치안이나 몬스터 문제 등 여러 이유로 결국은 그들 역시 도시 외곽으로 타협해 자리 잡는 추세였다.
“으음……. 네, 이건 국가 차원에서 이주를 독려해도 안 될 것 같아요. 저만해도 불안해서 김현아 에스퍼가 있는 곳만 졸졸 따라다니니까요…….”
임세주는 얼마 전 마포 던전 브레이크 때부터 김현아만 따라다니고 있다며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제 그날 받았던 충격과 공포, 그리고 SS급 에스퍼가 저를 지켜 주었을 때 느꼈던 강렬한 감정 등은 지울 수가 없었다.
“한지수 가이드와 정하진 에스퍼가 말한 것처럼 공포는 확실히 큰 작용을 해요. 일상에도 영향을 끼치죠. 한 번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이겨 낼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뭉치려고 하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뭉친 덕분에 공포심이 더 확산된다니, 아이러니하네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인류가 저 기운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니 오히려 지금은 더욱더 큰 영향권에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현아는 임세주의 태블릿을 끌어와 그녀의 앞에 놓고 화면을 꺼 주며 말했다.
“사람을 분산시킬 수 있는지는 조금 더 윗선에서 이야기하게 토스하자고. 우린 일단 파훼에 집중하자. 정신계 에스퍼들이 안정화 스킬을 쓰는 걸 응용하면 어떨까 싶은데.”
그 의견엔 정하진이 반응했다.
“그 부분엔 적격인 사람이 있지.”
“최성훈 교수님 말이지?”
“……!”
최성훈 교수의 이름에 한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국대 의학교수이자 정신계 에스퍼인 그의 기억 삭제 스킬 덕분에 한지수 역시 안온한 생활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는 A급 정신계 에스퍼였으나 다른 정신계 S급 에스퍼보다 스킬 응용이 훨씬 뛰어났다. 평생 사람의 정신과 뇌를 연구한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일반적인 에스퍼와는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달랐으며, 환자 개개인에게 어떤 스킬을 어떻게 적용해야 더 효과적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 시대에도, 지금도 교수님이 이 분야 최고의 위치에 있는 거고…….’
한지수 역시 내심 최성훈 교수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에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교수님 스킬은…… 응용이 다양해. 그러라고 준 스킬이 아닌데 저걸 이렇게 쓴다고 후원자들이 놀라 혀를 찰 정도라고 했으니까.”
물론 직접 들은 건 아니고, 다른 정신계 에스퍼가 언론과 인터뷰하며 최성훈 교수를 추켜세울 때 했던 발언이긴 하지만, 유명한 이야기였다. 스킬의 응용이 뛰어나다 못해 후원자까지 놀라게 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의사라는 뜻이었으니까.
“모시기 힘든 분이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알았어. 임세주 에스퍼.”
“네!”
“가서 논의해 봐. 그리고 앞으로 조사할 때 참고해야 할 영상은 대부분 이런 거겠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패닉에 빠지고, 공포에 떨 만큼 끔찍한 사례들.”
“으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극도의 공포가 조성된 상황을 살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적어도 사흘에 한 번은 심리상담을 받도록 해. 팀원 모두 다. 참고로 권고가 아냐. 이건 내가 직접 내리는 팀 오더야. 필요하면 매일 받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럼 가 봐. 벌써 엉덩이가 들썩거리네.”
임세주 에스퍼는 정신계 전문 에스퍼답게 이 현상을 당장 연구하고 싶어 죽겠다는 모양새였다. 김현아의 말을 들은 그녀는 태블릿을 품에 안고 벌떡 일어나 꾸벅 90도로 인사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임세주 에스퍼.”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간단히 인사 나눈 임세주가 회의실을 쌩 나갔다. 김현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참고로. 누가 시켜서 저렇게 인사하는 건 아냐. 그냥 임세주 에스퍼 습관이지. 내가 시킨 거 아니니 오해하지 말도록.”
“누나가 말 안 했으면 신경도 안 썼을 것 같은데…….”
한지수가 장난스레 대답하자 김현아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한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얼굴이었다. 한지수는 그녀에게 시간을 주고자 마음먹었다.
어차피 감수해야 할 일이었고, 혹여라도 김현아가 자길 못 볼 것 같다고 하면 그 결정에 따를 생각이었다. 물론 몹시 슬프겠지만…….
“…….”
“…….”
대화가 끊긴 회의실은 조용했다. 연구소 자체가 워낙 조용한 터라 희미한 소음조차 침묵을 깨지 못했다. 한지수는 초조하게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도 김현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김현아는 잠시간 한지수를 지켜봤다. 초조할 때 나오는 습관대로 작은 입술을 달싹이고, 불안해 흔들리는 눈동자로 저를 응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락없이 제가 알던 한지수였다.
“흠.”
“…….”
“지수야.”
“으,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깜빡이더니, 무슨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이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것까지 똑같았다. 그래서일까. 김현아는 속이 조금 쓰렸다.
정보 전달을 위한 대략적인 이야기만 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한지수의 사적이고 자세한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아이는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 상황이었다. 제가 소중히 대했던 동생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는 게 못내 아쉽고 속상했다.
대체 뭐가 급해서 그리 빨리 갔을까 싶어서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런 와중이었기에 눈앞에 있는 ‘한지수’가 그 한지수와 다르면서도, 어쨌든 한지수는 한지수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러나 아직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때 머뭇거리던 한지수가 조심스레 제 인벤토리에서 무언가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