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53화 (153/172)

#153.

근간 2

창가에서 곧 이 회의실로 들어올 세 사람을 내려다보던 임세주는 눈을 연신 빠르게 깜빡였다. 정하진과 김현아를 두른 기운은 모두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한지수의 몸을 둘러싼 기운만 마치 에러 화면을 보는 것처럼 지지직거리고 깨져 보였다. 단순히 흐릿한 게 아니라 정말로 모자이크라도 생긴 듯이 중간중간이 조각나 보였다.

“으음…….”

혹시 제 눈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 싶어 비벼 보기도 했으나, 여전히 그대로였다. 셋이 건물로 들어서며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임세주는 조급해하는 대신 표정을 가다듬었다. 곧 저들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올 테니까.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아를 선두로 곱고 가녀리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과 날렵하고 흉부는 두툼한데 허리는 잘록해 역삼각 균형미를 과시하는 듯한 조각 같은 미남이 차례로 들어섰다.

평소 임세주였다면 한국에서 기근이다 못해 멸종위기종인 미남 둘을 한 시야에 담을 수 있어 행복했을 텐데, 지금은 평소처럼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하고, 중간에 선 김현아의 소개로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시선은 한지수에게 자꾸만 향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단순히 예쁜 남자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정하진이나 김현아의 감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했고, 한지수 본인도 찔리는 게 있는지 그녀가 저를 살피는 시선을 던질 때마다 어색하게 웃었다.

“오? 뭐야, 임세주 에스퍼도 지수 팬이었나?”

“커흡!”

김현아가 장난스레 물으며 임세주의 등을 아프지 않게 팡팡 쳤다. 친근한 사이에나 나오는 행동과 농담처럼 말했지만, 왜 그리 주의 깊게 보냐는 물음이 내포된 질문이라는 걸 모를 사람은 없었다.

목을 가다듬은 임세주는 제 소개를 하고 회의실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엔 정하진과 한지수가, 제 옆엔 김현아가 있었다. 새삼스럽게 여기 앉은 사람들이라면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어떻게든 만들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임세주는 침착하게 다시 한지수를 살피며 운을 뗐다.

“정하진 에스퍼, 한지수 가이드. 두 분이 제 능력으로 논의할 일이 있어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임세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지수를 바라봤다. 한지수는 조금 긴장한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현아 역시 한지수를 한 번 보고, 옆자리 임세주를 흘긋 봤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지그시 바라보자, 임세주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저……, 한지수 가이드.”

“네.”

“그, 저기, 이게…… 정말 무례한 질문일 수 있는데요……. 혹시……. 혹시 건강에 큰 문제라도 생기셨나요?”

“어, 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

임세주가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이번엔 한지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 상태가 조금……. 이상하게 보이시죠?”

“……!”

임세주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 모습을 본 김현아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한지수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지수, 너 어디 아파?”

“……으음, 아니. 그건 아닌데…….”

이번엔 한지수가 정하진의 눈치를 본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김현아는 둘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임세주 역시 침을 꼴깍 삼켰다. 저 둘이 어떤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크게 놀라지 않기 위해 긴장한 채 기다리자, 한지수가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어렵게 운을 뗀 한지수는 지금 제 상황을 설명했다.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지만, 다른 시간 선에 존재했던 지구가 멸망한 이야기. 그리고 조율자와 재앙과 같은 굵직한 뿌리는 전부 제약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꽤 긴 시간 동안, 저도 모르게 “허어…….” 소리를 내며 듣던 김현아는 잠시 기다리란 말을 남긴 채 회의실을 나갔다. 한지수는 걱정스레 그녀가 나간 문을 바라봤고, 조용히 귀를 기울인 정하진이 걱정하지 말라고, 저녁 일정을 취소하는 통화 중인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다.

돌아온 김현아는 자리에 털썩 쓰러지듯 앉아 제 입가를 쓸어내리며 남은 이야기도 더 들려 달라고 요구했다. 한지수가 다시 못다 한 말을 전했고, 얼마 남지 않은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김현아와 임세주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임세주는 중간부터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만 깜빡이며 들었고, 김현아는 팔짱 낀 채 책상에 올려 둔 스마트폰을 노려보며 검지로 제 팔뚝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

말을 마친 한지수는 김현아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녀가 지금껏 알아 왔던 한지수가 아닌, 평행 세계 같은 다른 곳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사라져 조각난 시간 선에서 온 한지수라는 이야기를 이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신과 초월자가 존재하는 세상에 살다 보니 크게 무리가 없을 듯했다.

하지만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법이었다. 정하율 역시 똑같은 한지수라는 것을 알아도, 자기와 교감을 나눴던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정하영에게 가지 않았는가.

임세주가 순수하게 시간 선과 멸망의 전조에 경악했다면, 김현아는 눈앞의 동생이 지금껏 자신이 알던 한지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충격인 듯이 보였다. 하지만 당황은 잠시였다. 곧 정신 차린 김현아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알겠어.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우선 대책부터 세워야겠지…….”

“…….”

드물게 심란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이는 김현아를 지켜보던 한지수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엄밀히 말해 자신이 다른 한지수라는 부분은 빼고, 몇몇 사실만 말해도 됐을 것이다. 이는 정하진과 비행하는 내내 상의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다른 세계나 멸망, 그리고 자신이 원래 알던 한지수가 아니라는 부분은 말하지 말고 그저 ‘안식의 신’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에 대해서만 말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고려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한지수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끝까지 제 편이 되어 주었던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인 김현아를 속이고 싶진 않았다. 설령 그녀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와 어색해진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분명 그랬는데…….’

김현아가 저리 심란해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후회스러웠다. 어쩜 자기가 그녀를 속인다는 죄책감을 느끼기 싫어서, 그 짐을 김현아에게 지운 건 아닌가 싶어서 미안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김현아 입장에선 제가 아끼던 동생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된 격이지 않은가. 이리 급히 말할 게 아니라 ‘이 몸의 주인’이었던 한지수가 부탁한 대로 그녀에게 남긴 물건부터 전해 줬어야 했나 싶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커지고 있을 때. 큰 손이 한지수의 손을 잡아 왔다. 반사적으로 정하진을 향해 고개 든 한지수는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을 보고 울고 싶은 기분을 애써 삭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작게 주억거린 후 다시 김현아를 바라봤다.

어느새 김현아는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인 김현아는 무언가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적인 이야기는 우리 둘이 나중에 하자. 우선. 그 기운 말인데. 임세주 에스퍼가 볼 수 있는지가 관건일 것 같은데. 임세주 에스퍼. 그런 기운을 본 적 있어?”

“음……. 그게……. 확실하진 않지만, 뭔지 알 것 같아요.”

“……!”

이렇게 바로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줄 몰랐던 한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하진 역시 조금 놀란 듯이 눈이 살짝 커졌다. 김현아는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물었고, 임세주는 들고 온 태블릿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잠시만요. 듣다 보니 떠오른 게 있어서, 확인을 먼저 해 보고 싶어요.”

“어어, 그래. 천천히 해. 거, 뭐냐, 저거에 연결해 줄까?”

확실히 한지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충격이긴 했는지, 평소답지 않게 한 박자 대꾸가 늦은 김현아였다. 그녀가 빔 프로젝터를 가리키며 말하자 임세주는 괜찮다고 하더니 너튜뷰에 무언가 검색하기 시작했다. 태블릿을 살짝 세워서 들고 있어 한지수와 정하진에겐 화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 옆에 앉은 김현아는 검색어를 볼 수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 실시간>

검색어를 입력한 임세주가 태블릿을 네 사람의 중간쯤에 두고 검색 결과를 쭉쭉 내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비각성자들이 촬영한 짧은 영상이었다.

“우선 이것부터 봐도 될까요? 작년에 시민이 촬영한 뉴욕 던브 영상이거든요.”

섬네일엔 금발의 푸른 눈을 한 외국인 남자가 인상을 쓴 채 뒤를 흘긋거리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었다. 긴박해 보이는 흔들린 영상 뒤로 반쯤 기울어지며 무너지는 거대한 빌딩이 담겨 있었다. 정하진과 한지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톡-

영상을 클릭하자 남자가 달리면서 제 어깨 너머를 찍은 영상이 나왔다. 남자의 뒤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모두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기 시작하는 빌딩을 피해 달리는데, 그 수가 상당했다.

카메라를 들고 뛰던 남자는 앞을 비췄다가 뒤를 다시 비췄다. 앞에도 무너지는 건물이 보였다.

[으아아악! 피해! 피해, 저쪽도 무너진다!]

[이쪽! 여기야!]

[보호소로 들어가!]

[안 돼! 지하는 안 돼! 공원으로 가! 트인 곳으로! 광장으로 가!]

[오 맙소사! 아가! 저기 아이가 있어!]

[아가, 이리 와! 아저씨랑 가자!]

영상을 찍던 남자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아이를 안아 들고 헉헉대며 뛰기 시작했다. 남자의 곁에 있던 친구가 그의 등을 떠밀며 같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끼다 기어이 가까운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뛰어! 돌아보지 마! 뛰어! 눈 감아! 괜찮아! 괜찮아, 꼬마야, 눈 감아!]

[흐헉, 헉, 허억! 헉헉!]

[으아아아앙!]

남자의 거친 숨소리, 아이 울음소리, 주변을 울리는 비명……. 긴박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지수와 임세주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을 트라우마였지만, 둘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영상에 집중했다.

남자는 센트럴 파크로 보이는 공원 중앙으로 달려가서야 바닥에 아이를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렸는지 널브러진 상태로 계속 주변을 찍었는데, 저 멀리 거대한 빌딩이 무너지자 공원으로 모인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공원은 대피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빌딩 숲에서 피할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이 센트럴 파크로 몰려들었고, 이내 드넓은 공원에 사람 머리만 보일 정도가 되었다.

쿠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또 다른 건물이 무너지고 빛이 번쩍이는 걸 본 이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역시 부둥켜안고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가 공포에 절어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영상의 처참함에 경악했겠지만, 임세주는 다른 부분에 놀라 눈이 커졌다. 지금껏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영상을 보기 싫어 일부러 피했던 그녀였다. 던전 브레이크를 연구할 때도 공식적으로 던전 게이트 주변 상황만 찾아봤지, 이런 자극적인 영상은 굳이 눈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동안엔 그저 사람들이 놀란 탓에 각자 가진 기운의 결이 달라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사람들 위로…… 시커먼 오로라 같은 기운이 내려앉고 있어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수록, 누군가 울음을 터뜨릴수록, 누군가 신을 찾으며 오열할수록 그 불길한 오로라의 색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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