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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52화 (152/172)

#152.

근간 1

일리 있는 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부정적 기운이 모인 것으로 병균의 밀집을 확인하는 거라면, 공포는 좌표를 찍을 최고의 근거가 되어 줄 터였다.

공포는 불안정한 심리에 곰팡이처럼 번져 나가는 특성이 있었다. 겉으로는 사라진 듯 보이지만 표면 아래에선 그 뿌리를 넓게 퍼트렸다. 그랬기에 멀쩡하게 보이던 사회도 기저에 파다하게 깔린 공포에 쉽게 흔들리고 휩쓸리곤 했다. 그 어떤 긍정적인 감정, 예를 들어 기쁨, 흥분, 환희 등보다도 강한 정도로.

이는 심리학이나 다양한 지식이 발전하기 전 시대에서도 공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거짓 소문으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 넣고, 죄 없는 사람에게 마녀라는 누명을 씌워 화형 시키고, 특정 집단이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만으로도 수천 명을 쉽게 싸잡아 죽이는 학살 사건은 빈번해 역사에 기록도 잘 안될 정도였다.

그 외 크고 작은 내전도 역시 사람들의 공포를 자극해 쉽게 일어났다. 그 정도로 공포는 인류 역사와 오래 함께한 동반자였다. 그저 안 좋은 기운이 빠르게 퍼진다고만 여기고 있었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작용해서 더 심각한 상황을 끌어내는 거라면…….

“솔직히 지금 같은 상황에 사람들을 흩어 놓는 건 어렵겠죠……. 단순 무식한 방법이라는 건 알아요. 다른 좋은 해결책이 있으면 좋겠지만, 제 머리로는 딱히 떠오르지 않거든요……. 음, 그래서 이런 부분을 같이 논의해 볼 수 있는 사람들과 모였으면 좋겠는데……. 저 말고 똑똑한 사람들끼리요.”

자신감 잃은 한지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우물쭈물 망설이며 눈치를 보는 지수를 하진은 다만 말없이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왔던 친부의 가스라이팅과 여전히 어린 나이에 데뷔해 빠르게 마주해야만 했던 익명의 비난, 그리고 그런 비난에서 지수를 보호해 주지 않고 오히려 입단속을 시켰던 소속사까지. 그런 시절을 겪은 탓인지 한지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걸 유독 힘들어했다.

지수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알고 있던 정하진은 즉시 고쳐 주거나 부정하는 대신 관자놀이와 볼에 쪽쪽 연달아 입 맞춘 후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확실히 흩어지는 것 말고 다른 해결책을 찾기 힘들겠군요……. 저도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고요. 전문가들, 음. 이 분야에 전문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비슷한 분야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과 함께 이야기 나눌 자리를 마련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이걸 믿어 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데, 그게……, 그게 사람 마음을 부정적으로 물들이는 성향이 강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특히 더 불안을 부추긴다고 하면……. 조금 사이비처럼 들릴 것 같아서요…….”

“흠.”

“저야 안식의 신에게 듣긴 했지만, 안식의 신도 그게 뭔지 자세히 말해 주진 않았어요. 그래서 만약 누가 붙들고 정확하게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자신 없거든요.”

한지수의 작은 입술이 삐죽하게 나왔다. 한지수가 저러고 있을 때면 작은 입이 꼭 오목눈이 새 같다고 생각했던 정하진은 뾰로통한 입술을 한참 바라보았다. 요 며칠 실감했지만, 한지수는 내면도, 이런 사소한 버릇 하나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잠시 제 연인의 얼굴에 홀려 다른 생각을 하던 정하진은 문득, 예전 삶에서도 그리고 지금 삶에서도 김현아 주변에 있는 어떤 인물이 떠올랐다. 겁이 많고 사람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면서도 이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고, 자기가 꼭 확인해야 한다며 김현아와 정하영의 팔을 부둥켜안고 버텼던 정신계 에스퍼가.

“……지수 씨.”

“넵?”

“그 기운이라는 거, 논의해 볼 만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 진짜요?”

“네. 평범한 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걸 보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쩜 그 사람이라면 어쩌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모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볼 수 있는지 아닌지부터 확인해 봅시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알아보는 게 낫겠죠?”

“네! 맞아요!”

정하진의 말에 한지수의 얼굴이 확 폈다. 순식간에 밝아진 낯빛을 보니 조금 침울했던 기분이 날아간 게 분명해 보였다. 환해진 얼굴을 마주한 정하진은 저 역시 미소하며 한지수의 양 볼을 꽉 잡고 붕어 같은 입술에 쪼옥 입 맞췄다.

“……!”

“현아랑 아는 분이니 현아에게 먼저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올지, 아니면 우리가 갈지는 모르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 만나 보도록 하죠.”

“좋아요!”

이번에도 한지수는 힘차게 대답했다. 정하진은 기뻐하는 한지수를 바라보다 문득 너무 들뜨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음, 지수 씨. 초 치려는 건 아니지만, 사실 그 사람이 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만에 하나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만약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하더라도…….”

“실패해도 괜찮아요.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요.”

성급하게 대답한 탓에 정하진의 말끝을 조금 끊은 한지수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리곤 정하진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매미처럼 찰싹 붙은 채 말했다.

“그냥 단서가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게 싫어서 그런 거예요. 뭐라도 시도해 보고 싶은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수확이 없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게요.”

“……하하. 네, 좋아요. 시도하는 거에 의의를 두도록 해요.”

“네!”

재차 힘차게 대답한 한지수는 정하진의 목을 여전히 와락 안은 채 찰싹 안겼다.

* * *

한지수와 대화를 마친 정하진은 바로 김현아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일정은 빠르게 잡혔고, 정하진과 한지수는 김현아가 보내 준 평화 길드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착륙한 곳은 국내 대형 길드가 이용하는 경기도에 위치한 전용 활주로였다. 덕분에 간단한 절차를 밟고 입국한 둘은 김현아가 보낸 차량 덕에 평화 길드 연구 센터까지도 별다른 제지 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와, 여기도 진짜 오랜만이에요. 지금도 여기에서 몬스터 연구를 하나요?”

한지수는 기억과 같기도, 다르기도 한 건물을 둘러보며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에 조금 얼떨떨함을 느껴야만 했다. 동시에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지식이 현재의 상황에 쓸 수 있는 게 맞기는 한 건지, 조금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지금은 던전 게이트와 던전 등급 급등 사례를 연구하는 전문 센터로 쓰고 있어요. 던전 몬스터와 식생 연구 센터는 을지로에 있었지만, 마포 상공 던전이 터지면서 부천으로 옮긴 상태입니다.”

“아……. 그렇구나. 음……, 하진 씨. 혹시 예전에도 여기가 던전 게이트 연구소였나요?”

한지수는 일부러 주변 사람은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하진은 바로 상체를 낮춰 한지수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다시피 바짝 대고 속삭였다.

“예전에는 몬스터와 식생 연구소였습니다. 지수 씨 기억이 맞아요. 지금과 다를 뿐이죠.”

“……!”

귓불에 입술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붙은 탓에 한지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SS급 에스퍼야 개미만큼 작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지만, B급 가이드는 아니었기에 나온 행동이라고 해도, 불순한 의도가 다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 건 한지수뿐만이 아니었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참, 사이가 지나치게 좋으신데.”

“……! 누, 누나!”

저들에게 다가오는 김현아를 발견한 한지수가 저도 모르게 정하진의 가슴팍을 밀치고 두 걸음 떨어져 섰다. 졸지에 밀쳐진 정하진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세상 서러운 표정으로 제 가슴을 문지르며 한지수를 바라봤다. 평소 정하진을 아는 이라면 보고도 믿지 못할 잔망스러운 행동을 본 김현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놀고 앉아 있네. 어이구. 내가 얘 좀 케어하라고 했지, 배 맞으라고 보낸 건 아니었는데.”

“…….”

“응? 누나, 미안,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일부러 SS급 에스퍼나 들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한 김현아가 이번엔 한지수를 향해 돌아섰다.

“하하, 아냐. 지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으응, 잘 지냈어. 누나가 이것저것 신경 써 준 덕분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럴싸하게 대답한 한지수는 제 머리를 거칠게 북북 쓰다듬는 김현아의 손길을 만끽했다. 거칠지만 익숙한 다정함이었다. 아주 오래 그리워했던 손길이기도 했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음? 그런데 토토는? 주머니에서 자나?”

“……!”

“…….”

한지수와 정하진 둘이 동시에 대답하지 못하자 눈을 몇 번 깜빡인 김현아가 둘의 안색을 살폈다.

“……잠깐. 둘 다 왜 그런 반응인데? 설마 토토 흘리고 왔어?”

“아, 아니……! 흘리지 않았어……!”

당황해 손을 허우적거리는 한지수와 달리 정하진은 금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토가 흘린다고 흘려질 햄스터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들어가서 설명할게. 어차피 너도 들어야 할 이야기긴 하니까.”

세 사람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센터로 들어섰다. 그리고 세 사람이 향하는 회의실 창가에서 한지수를 눈여겨보던 임세주 에스퍼는 떨리는 눈동자로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입을 틀어막았다.

‘한지수 가이드 기운이…… 왜 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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