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푸른 별 10
한지수는 미미하다 해도 정하진의 얼굴이 굳은 걸 대번 알아봤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분이 안 좋은 듯하던 그는 더 나아가 조금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지수는 그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진 씨, 걱정하지 말아요. 그때랑 많은 게 달라졌으니 괜찮을 거예요. 안식의 신도 저한테 뭘 많이 시키지 않았어요. ‘일단 넌 그냥 사고 치지 말고 조용한 곳에서 얌전히 지내는 걸 우선으로 삼아.’라고 했으니까……, 이대로만 버티면 문제없을 거예요. 아마도요…….”
그 말에 정하진이 작게 웃으며 긍정했다. 맞는 말이었다. 만약 일이 틀어지기 쉬운 상황이었다면 안식의 신이 간신히 돌아온 한지수에게 뭐라도 언질을 주고자 했겠지 싶었다.
이유 모를 심란함을 애써 무시한 정하진은 현재에 집중하고자 했다. 지금, 정하진에게 현재는 한지수였다. 다시 만난 자신의 ‘지수’와 함께 새롭게 흘러가기 시작한 시간인 만큼,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을 좀 더 알고 싶었다. 지금처럼 쉽게 말 못 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순간이라면 더더욱.
예전 같으면 한지수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늘 곁에 있겠다고 했겠지만, 오늘 정하진은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그는 한지수가 관련된 일이라면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지수 씨. 고민이라도 있어요?”
“……!”
놀란 지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 모습을 본 정하진은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말해도 된다고 덧붙이는 대신, 그저 눈을 맞추며 돌아올 말을 기다렸다. 너무 집요하진 않게, 크게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끔 곤란한 얼굴로 눈을 굴리는 지수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달래긴 했지만.
“크, 큼. 그…… 뭐 대단한 고민은 아닌데……, 조금 생각할 거리긴 해요.”
“그런 거라면 혼자 생각하지 마시고 제게도 알려 주세요. 둘이 함께 생각해 봐요. 당장 해결이 안 되더라도 일단 둘이 고민하면 조금은 더 빠르게 결론이 나지 않을까요?”
정하진은 뭐든 좋으니 나한테도 말해 달라고 넌지시 졸랐다. 그리곤 이번엔 한지수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다시 눈을 맞추며 무언의 보챔을 추가한다. 한지수는 여기서 더 눈을 맞췄다간 분위기가 미묘해질 것 같다고 여겼는지, 시선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하진 씨 말이 맞아요. 그런데…… 이걸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제가 기억이 아직 좀 뒤죽박죽이에요. 그래서 정리가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정하진이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지수의 기억은 온전치 않았다. 이미 잃은 기억은 어쩔 수 없다고 들었지만, 그 외에 안식의 신이 영혼을 보호하는 시점의 기억도 조금은 드문드문 비어 있다고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안식의 신이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다고 여긴 부분은 빼고 주입한 것이지 않을까. 그것이 안식의 신의 특기이자 그가 숨 쉬듯 하는 일이었으니.
“그럼 차분하게 정리해 보고, 혹시 기억나는 게 있거나, 아니면 제 의견이 필요하면 전부 말해 주세요.”
이번에도 말을 맺고 볼에 입 맞추니, 역시 애매하게 시선을 피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으응, 그럴게요. 아, 그런데 사실 당장 생각 중인 게 하나 있긴 한데…….”
“뭔가요?”
정하진은 정말로 뭐든 상관없으니 일단 말해 보라는 듯이 부드럽게 물었다. 한지수는 그의 다정함 가득한 지지를 느끼곤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그 재앙이라 불린 괴물 말인데요.”
“네.”
이번엔 짧게 대답한 정하진이 한지수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한지수는 그의 이런 애정 표현이 싫지 않은 듯 우물거리면서도 고개만큼은 돌리지 않고 말했다.
“안식의 신 말로는 재앙은 별이 원할 때, 그러니까 정말로 별이 죽음을 원할 때 나타나는 존재라고 했어요. 별에 사는 생물들에겐 재앙이지만, 스스로 죽을 수 없는 별에게 있어선 수호자 같은 거라고 봐야 한다고 했던 것 같아요.”
“수호자…….”
“그래서 별은 그 재앙을 돕고 싶어 하고, 별이 ‘병균’으로 인식한 존재가 가장 많이 모인 곳으로 재앙이 나타나게끔 유도할 수 있다고 해요. 그게 별의 의지로 재앙을 도울 수 있는 것 중 가장 강한 힘이라고 했던 건 확실히 기억나요.”
정하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다면 지구가 재앙에게 좌표를 찍어 준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리 아닌가? 다소 놀라운 소리였지만, 정하진은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재앙이 등장했던 패턴을 떠올려 보니 저 말이 맞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재앙은 도심에 주로 출몰했습니다. 물론 바다 한가운데 나타난 적도 있고, 사막이나 인적 드문 밀림에 나타난 적도 있지만, 큰 도시에 출몰한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죠.”
어쩌면 인구 밀집 지역만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면 이를 눈치챈 인간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으니, 종종 저런 망망대해나 허허벌판에 등장하여 재앙의 등장은 종잡을 수 없는 무작위라고 생각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과거 재앙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사라졌다가 전혀 다른 위치에서 출몰하곤 했던 것도 어쩌면 제약이 아니라 일부러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 사이에 섞여 들어온 재앙도 있다고 했어요. 평범하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그 시대에 감당하기 힘든 전염병이 대표적이라고 했어요. 그 외에는 그 어떤 장치로도 볼 수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며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나쁜 흐름도 있다고 했는데, 이건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못 본다고 해요.”
말을 잠시 멈춘 한지수가 매실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하진은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한지수의 어깨를 둘러 안고 제 품에 기대도록 당겼다. 익숙하게 정하진의 품에 기대앉은 한지수가 조금 더 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흐름……이라고 하긴 좀 안 어울리는데, 저도 저걸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여간에 이 흐름이라는 건 사람에게 안 좋은 기운을 불어넣고, 불안함을 느낄 때면 훨씬 더 강하게 파고들어 자멸하도록 부추기는 성질을 띠고 있다고 했어요.”
“단순히 기분의 문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개입할 수 있는 다른 것도 있다는 거군요.”
“거의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인류는 지구에 존재하는 동물 중 가장 파괴적인 동물이었고, 그와 관련된 역사는 상당히 길었다. 정하진은 생각을 더듬다가 문득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된 과거에 강재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인간들이 이딴 허접한 몸뚱이로 육식동물 사이에서 살아남고, 결국 다른 동물들보다 월등히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영악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영악에서 영리함보단 악함이 더 컸던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시대에도 악행을 일삼은 덕분에, 더 유리하게 생존해 왔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역사까지 갈 것도 없이 저 인간만 봐도 그렇지 않아요? 괴물이 따라온다고 자기 친구를 괴물 쪽으로 밀고 도망쳤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쟤를 살려 주고 싶다고요?
흠, 글쎄요……. 나중에 쟤가 당신 동생 중 어린 동생을 밀면 그땐 어쩌려고? 한 번 저렇게 생존한 애들은 나중에 또 그 방식을 쓸 거예요. 그리고 어쩔 수 없었다고 질질 짜며 어디서 고해성사나 하겠지.
난 쟤가 친구랑 함께 맞서 싸우는 것까진 기대 안 해요. 적어도 자기 친구를 괴물한테 밀지만 않았어도, 그냥 친구를 남겨 두고 혼자 도망가기만 했어도 살려 주고 싶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쟨 굳이 자기 친구를 희생시키려 했잖아요.
친구를 밀어 자빠뜨릴 시간에 몇 걸음이라도 더 멀리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조금이라도 유리한 환경을 만들겠다는 이기심에 굳이 누군가를 밀었어요. 난 당신이 사람을 거둘 때 이 차이 정도는 고려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런 식으로 말한 건 강재윤뿐만이 아니었다. 정하진은 인류의 선한 면을 믿고 싶어 하는 쪽이었지만, 김현아나 정하영 역시 강재윤처럼 늘 인류의 악한 면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해 왔었다.
단순히 후천적 습득이나 환경 등에 영향받는 성악설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은 인간의 본질적인 악한 면은 본능에서 나온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인간은 늘 어려운 일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면 쉽게 나약해지고, 그것을 빌미로 악한 선택을 하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인류의 역사 내내 반복된 ‘선택된 악’의 합리화가 그를 증명하는 것이며, 즉 인류의 끔찍한 실수는 사실 실수가 아닌 본성에서 나온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상황이 악화되어만 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과거를 돌이켜 본 정하진은 어쩌면 그 일들이 지수가 말한 ‘기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하나 그게 전부 삿된 어떤 기운이 쌓인 게 원인이라면 SS급 에스퍼로서도 어찌할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흐름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부분을 빠르게 판단하고 포기한 정하진이 제 의견을 먼저 말했다.
“일단 전염병은 비교적 잠잠했습니다. 재앙이 나타날 때까지 큰 전염병은 두 개 정도였지만, 백신이 빠르게 개발됐죠. 사실 병은 그리 걱정되지 않지만, 저 기운이라는 건 달리 손쓸 방도가 없어 보이는군요.”
“맞아요. 어차피 보이지 않는 건 우리가 어찌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음,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네.”
“확실한 건 아니고요, 진짜 그냥 제 추측이에요.”
“네. 뭔가요?”
정하진은 망설이는 한지수의 볼에 연신 입 맞추며 재촉했다. 결국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을 텁, 막은 한지수가 입술 대신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안식의 신이 모두 설명해 준 건 아니지만, 듣기론 대충 저 사악함을 부추기는 기운이라는 게 사람이 불안함을 느끼면 더 강해지는 힘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정하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아직까진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겠다는 의미였다. 한지수는 여전히 제 추측에 자신 없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지구가요, 재앙이 나타날 위치를 정하는 게, 저 기운이 모인 곳을 기준으로 정하는 건 아닐까요?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요, 지구 입장에선 우리가 병균이고, 병균이 모여 나쁜 영향을 퍼뜨리고 있으면……. 나라도 일단 거기부터 소독하고 싶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