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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50화 (150/172)

#150.

푸른 별 9

허공을 찢고 등장한 재앙은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기괴한 모습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뒤통수에서 뻗어 나온 앙상한 손이 덮고 있었으며, 코는 흔적 기관이라 보기도 민망할 수준이었다. 입은 원래라면 귀가 있어야 할 지점까지 찢어져 있었는데, 찢어진 입이 다물리지 못할 정도로 이빨이 빼곡했다.

몸은 비정상적으로 말랐고 팔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다리 또한 가늘고 길어 겉보기로는 아무런 힘이 없어 보였으나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건물을 무너뜨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동할 땐 엉거주춤하게 등허리를 굽힌 채 이동했다. 그런데도 전망대로 유명한 타워보다 조금 작았다.

재앙은 어떠한 의지나 계획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딱히 인간이 아니더라도 건물, 동물, 날아가는 비행기, 드론, 다리나 자동차 등 모든 것을 파괴하기만 했다. 의사소통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일반 몬스터가 보이는 최소한의 지적 반응도 전혀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재앙은 균열을 찢고 나와 일정 시간 파괴를 일삼은 다음, 증발하듯 사라진다는 거였다. 그렇게 한곳에서 사라지고 나면 어떤 날은 유럽에 나타나 그곳을 초토화하고, 또 보름 후엔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나타나 선박을 파괴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한국에 나타나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패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었던 인류 역시 처음엔 다양한 무기로 대응을 시도했었다. 하나 재앙에겐 그 어떤 무기도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심지어 한참 난동 부리다 소멸한 재앙이 다시 나타났을 때엔 인류가 겨우 낸 생채기조차 깔끔히 사라진 채였다.

패닉이었다. 스스로의 역량으로 상대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게 무차별적으로 파괴당할 뿐이었던 인류는 결국 마지막 카드로 핵무기를 꺼내 들었다. 전조 없이 등장하는 재앙을 상대로 핵을 사용했다간 인류 역시 공멸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이 그들의 이성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국가 지도자들이 핵무기 사용의 승인을 합의하려던 바로 그 순간, 각성자들이 그들의 후원자들로부터 어떠한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는 대략 ‘재앙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조율자가 그대의 별에 강림할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조율자요…….”

“네. 당시 제 후원자인 푸른 달의 신도 처음엔 조율자를 믿고 기다리라고 말했었죠. 오직 조율자만이 별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하면서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이곳에선 일어난 적 없는 과거의 처참함을 비교적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당시 모두가 조율자가 강림할 날만을 기다렸지만, 어째서인지 안식의 신만큼은 조율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조율자가 언급되기 전, 인류가 희망을 놓고 무너지고 있을 때에도 안식의 신으로부터는 어떤 메시지도 없었고 접촉이라고 볼만한 것도 없었다.

정하진은 안식의 신이 그저 바빠서 그런 거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추측해 보면, 안식의 신은 아마도 다른 방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지 않았나 싶었다. 만약 그가 그 시점에 이미 포기했다면 분명 제가 아끼는 피후견인의 영혼과 육신을 다른 별로 이주하고자 제안했을 테니까.

시간이 더 지났던 시점엔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최후의 보루로 그는 김현아를 골랐다. 지구라는 별에서 후원자의 힘으로 탈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서.

정하진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제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던 동생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그리고 인류가 구제받지 못할 거라는 것을 예감한 얼굴이 눈에 선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셋이 함께하고자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고 버텼던 순간. 그때 느꼈던 무력감과 공포, 그리고 절망……. 제 인생 통틀어 가장 두려웠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정하진은 시선을 내려 손등 위에 올려 둔 한지수의 손등을 잠시간 바라봤다. 저보다 훨씬 작은 손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제 손등을 보듬고, 두드리며 이어질 이야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조율자는 강재윤 에스퍼였습니다. 혹시 당시 일을 자세히 알고 있나요?”

한지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음, 네. 안식의 신이 간략하게 말해 줬거든요.”

“그럼……. 결과도 그가 말해 줬습니까?”

정하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한지수는 잠시 망설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자세히 말하진 않았어요. 그냥…… 조율자가 지구를 포기했다고 말했어요.”

“…….”

한지수는 정하진의 상처 많은 손등을 토닥여 주며 말을 이었다.

“음, 더 정확히 말해 보자면……. 그냥 제가 들은 대로 말하자면요. 조율자가 지구를 포기하고. 덕분에 지구는 그토록 원하던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거였어요.”

“……!”

퍽 놀란 듯, 정하진의 눈이 커졌다. 지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안식의 신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재앙 중 네 개의 재앙이 지구를 파괴했고. 지구는 우주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별 중 하나가 되었다고요.”

지구는 ‘별’로 남고 싶어 했다. 많은 별이 그러하듯, 더는 생명을 품지 않고 오직 ‘별’로 존재하길 원했다. 그리곤 제 몸을 갉아 먹는 해로운 기생충을 없애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위험한 기생충이 다른 별을 해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종국엔 자기 역시 별의 의지만 지닌 채 우주를 유영하고 싶어 했다. 별과 별 사이를 잇는 평범하고 작은 별처럼.

재앙은 지구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덕분에 지구는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등분으로 쪼개졌다. 너무도 많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우주에선 이 역시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그 먼지 한 톨에 울고 웃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미물을 너무도 사랑하고 아껴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이들이.

“지구를 되돌리기 위해 안식의 신은 자신을 열두 등분으로 나눠야 했대요.”

“…….”

“열두 개의 자아로 나뉜 안식의 신은 그중 넷을 희생해 지구의 시간을 되돌려 별을 설득하는 데 썼고, 다른 둘을 지구의 가장 큰 파편을 토대로 별을 복원하는 데 썼다고 했어요. 또 다른 셋은 중간에 실패한 시간을 돌이키느라 썼다고 했고요.”

“…….”

“안식의 신도 실수했다간 소멸 직전까지 갈 상황이었는데, 다른 신들이 많이 합세해 견딜 수 있었다고 했어요. 그중 몇몇 신은 더는 후원자 노릇을 하기 어려울 만큼 힘을 써서, 결국 별이 되었다고 해요. 신이 별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이냐 물었더니, 신도를 잃고 더는 기도를 받지 못하는 신이 가진 힘을 전부 소진하면 생명이 없는 별이 된다고 해요.”

“별…….”

“고향 별을 잃은 신은 많다고 들었어요. 그 신들이 태어났던 별이 이미 오래전에 지구와 똑같은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는 신도가 없지만, 당시 축적한 힘만으로 버티는 신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이 이야기들은 정하진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단순히 안식의 신이 ‘많은 신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댔고, 많은 희생이 있었다.’라고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을 뿐…….

지구처럼 다른 별을 관장하던 신이 그 별을 잃고 더는 힘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나,

“신이 죽으면 그냥 돌덩이가 된다는 뜻인가요?”

신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단순한 물음에 한지수는 당황한 듯 정하진을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별을 돌덩이라고 표현하냐는 타박은 덤이었다. 정하진은 머쓱해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강력한 권능을 가진 후원자들이, 그저 신도를 잃는다고 해서 그렇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게 믿기 힘들었다. 어쩜 그들을 불멸자라 여기고 있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또한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역시 언젠가는 어떤 별을 걷던 자들이 아니었는가. 탄생을 겪었던 생명이 언젠가 끝을 맞이하게 된다고 이해하니 제법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다만 그들의 막강한 힘을 직접 마주했던 하진으로서는 여전히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한지수는 정하진의 얼떨떨한 반응에 공감한다는 듯이 설명을 덧붙였다. 자기도 안식의 신이 혼을 거둔 뒤 잠시 보살펴 주는 동안 곁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신들끼리 서로 힘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아예 소멸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그렇기에 많은 신이 자진해 희생했기에 겨우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지구의 상황이 그만큼 최악이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안식의 신을 포함한 신들이 지구라는 별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른 건지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안식의 신이 별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어요. 그냥 자길 열두 등분했고, 다른 신들과 이렇게 했다. 정도로만 간단하게 말했거든요.”

“…….”

“아, 그리고 중간에 몇 번 실패도 했다고 해요. 한 번은 시간을 되돌린 시점이 틀려서 실패했고, 한 번은 정확한 시점으로 돌렸지만, 그때 조율자로 선택된 다른 제자가 안식의 신의 의지와 다른 선택을 했고, 결국 또다시 시간을 돌려야 했다고 했어요.”

“…….”

정하진은 저 다른 조율자라는 대목에서 이상하리만큼 찝찝함을 느꼈다. 뭘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다른 조율자는…… 누구였는지 들었나요?”

질문을 들은 한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못 들었어요. 하지만 때론 잔혹해져야 하는 조율자 일을 하기엔 맞지 않는, 굉장히 올곧은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시간을 또다시 되돌렸을 땐 결국 재윤이 형을 조율자로 선택했다고 했어요.”

“…….”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젠 찝찝하다 못해 괜히 속이 답답하고 꽉 막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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