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푸른 별 8
한지수는 정하진이 듬뿍 담아 온 고봉밥의 절반만 겨우 해치울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한 공기는 너끈히 먹은 수준이었다. 덕분에 살짝 부푼 윗배를 붙들고 숨을 헉헉 몰아쉬게 되었다.
배불러 괴로워하는 한지수보다 몇 배는 더 먹었음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정하진은 설거지까지 싹 마치고 식후 차를 들고 돌아왔다.
“지수 씨, 매실차 마셔요.”
“흡…….”
한지수는 제 취향에 맞게 얼음까지 동동 띄워 준 매실차를 보며 쓰게 웃었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상큼한 매실 차 향을 맡으니 새삼 돌아왔다는 게 실감 났다.
물론 지난 며칠 동안 정하진에게 시달리며 사무치게 실감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그의 애절한 눈빛에 못 이겨 과식하고 얼음 띄운 매실차를 받는 일상 하나하나가 더 와닿는 걸 보니, 생각보다 이 삶을 많이 그리워했구나 싶었다.
‘내가 스스로 버렸으면서…….’
문득 치솟는 감정에는 수치심을 포함해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복잡하게 여럿 섞여 있었다. 구멍이 날 때까지 이불을 걷어차고 싶기도 하고 쥐구멍에 얼굴만이라도 처박고 싶기도 한, 그런 마음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자조하고 있자니, 큰 손이 제 손등을 덮어 온다. 조심스레 고개 들어 바라보자 정하진이 부드러운 눈매를 살포시 휘며 웃었다.
“무슨 생각 해요?”
“…….”
예전의 정하진이었다면 혹시 슬픈 생각 중이냐고, 그럼 나와 같이 좋은 생각을 하자고, 아니면 같이 산책하지 않겠냐며 다정한 말로 어르고 달랬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제 앞의 정하진은 그런 식으로 제 상처를 가리고 긍정이라는 감정을 이끌어 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지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지금 이 순간의, ‘한지수의 마음’ 그 자체에 대해서 알고자 했다. 그것이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말일지라도.
‘지수 씨. 혹시 죽고 싶은 기분이 들면 제게 꼭 말해 주세요.’
한지수는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었다. 하지만 정하진은 여전히 부드러운 눈매로 웃으며 다정하게 강조했다.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면 꼭 말해 주세요. 그것만 약속해 주세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일단 끄덕이긴 했지만, 여전히 얼떨떨했다. 저런 질문을 할 거라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진이 저 말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간이 필요했을까. 지수는 차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지수는 정하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곧 솔직하게 대답했다.
“돌아온 게 실감 나서 여러 감정이 들었어요.”
“그랬군요. 혹시 슬픈가요?”
“으음……. 아뇨. 슬프진 않고 그냥……. 제가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한지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곤 제 손등을 덮고 있는 그의 큰 손에 다른 손을 올리며 겹쳐 잡았다.
“제가 제 발로 걷어찬 일상인데……. 다시 이렇게 누리고 있으니까 조금 씁쓸했어요.”
“…….”
정하진은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위로하거나 보듬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지수의 손을 꼭 잡고 이어질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지수는 그의 이런 변화가 조금은 가슴 아프게 느껴져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이제 괜찮아요. 지금 드는 생각도 그냥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그래요……. 자다가 이불 차고 싶은 그런 기분, 뭔지 알죠?”
“네, 알아요.”
“그래도 혹시 괜찮지 않을 것 같거나, 너무 힘든 일이 생기면 꼭 하진 씨한테 말할게요.”
“좋아요, 지수 씨가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전 바랄 게 없어요.”
정하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한지수는 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미소했다. 그리고 며칠간 미뤄 왔으나 이젠 계획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제가 떠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진 씨 입장에서 말해 줄 수 있어요?”
“…….”
정하진의 손이 일순 흠칫 떨렸다. 하지만 그는 예전처럼 단단한 척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과 불안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수 씨가 떠나고……. 처음 1년 정도는 하율이가 깨어난 것 외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평소와 같았죠. 다만 2년쯤 지나니 전 세계적으로 던전의 수가 점점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공략 도중 갑자기 내부 등급이 폭등해 클리어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던전도 생기기 시작했고, 태종대 던전처럼 나타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소멸하는 던전도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
정하진은 한지수를 떠나보낸 이후 이야기를 최대한 담담하게 설명했다. 한지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한지수가 던전으로 사라진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잘만 돌아갔다. 여전히 아침이 밝았고, 고요한 밤도 찾아왔으며, 계절도 바뀌었다. 세상에 한지수가 없는데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늘 그렇듯 슬픈 소식도 많았고, 기쁜 소식도 종종 있었더랬다. 그중 정하진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동생 정하율이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 다만 그 외엔 딱히 기쁨을 모르고 살았다.
한지수를 잃은 정하진은 공허한 삶을 견디며 지냈다. 오직 동생들만 보면서 지내느라 모두가 조금씩 세상을 살아가는 와중에 정하진의 세상은 변함없었다. 늘 똑같은 패턴으로 흔히 말하는 쳇바퀴 굴러가듯 살았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등급을 가리지 않고 온갖 던전을 드나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한지수가 들어갔던 등급과 똑같은 등급이거나 같은 식생이 분포된 던전은 무조건 리더로 공략에 참여하곤 했다.
공략을 순식간에 끝내고, 팀원을 전부 내보낸 정하진은 특이점이 없는지 확인하겠다는 핑계로 홀로 던전을 누비며 사라진 사람을 찾아 헤매곤 했다.
다시 돌아올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나 희망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는데, 제가 시도하지 않았을 때 그 가능성을 모르고 기회를 잃는 게 두려워서 그랬었다.
그 또한 미련이고 희망인 것을, 당시의 정하진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 스스로 세뇌하며 제 감정을 죽여 왔을 뿐.
정하진은 한지수가 걷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사랑하는 이의 행방을 찾아 그의 흔적을 쫓는 것은 생각보다 괴롭고, 아팠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만하다는 거였다. 살아진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하진은 제가 이런 기행을 벌이는 걸 남들이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느 날, 김현아와 대화하며 모두가 제 상처를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정하진은 결국 기행을 멈췄다.
하지만 한지수에게 이동할 수 있는 반지만큼은 빼지 않았다. 제 마음은 언제나 그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이후 내색하지만 않을 뿐, 정하진은 단 하루도 한지수를 잊은 날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슬픔이 무뎌지긴 했지만, 여전히 늘 한지수가 그립고, 한지수가 함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했다.
뭐라도 열중하고 싶은데, 그게 동생 정하율 아니면 던전 공략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는 정하진의 얼굴은 조금 지쳐 보였다. 한지수는 정하진과 여전히 손을 겹쳐 잡고 이야기를 들었다. 제 손등을 덮은 큰 손은 이따금 떨려 왔다. 그럴 때면 한지수는 제 연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래도 제가 여러 던전 들쑤시고 다닌 덕분에 이상 현상을 알아낼 수 있었어요.”
“이상 현상이요?”
“네. 낮은 등급 던전이었다가 갑자기 A급으로 폭주한 던전이 자주 발생했거든요. 그 던전들 모두 게이트에서 가장 먼 지점으로 분류된 좌표에 균열이 있었어요.”
“균열…….”
정하진은 평범한 에스퍼들의 몇 배나 많은 공략을 진행했다. 같은 SS급 에스퍼들과 비교해 봐도 두 배가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던전을 드나들다 보니,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D, E, F급으로 발생한 던전이 갑자기 등급이 치솟아 A급이 되었을 때. 다른 에스퍼들은 그저 또 이 꼴 났구나,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지만, 정하진은 알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아마도 SS급 에스퍼다 보니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았다고.
그렇게 SS급 에스퍼들이 낮은 등급 던전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을 뻔했던 균열은 정하진 덕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던전 내에 또 다른 게이트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발견된 이후, 빠르게 퍼져 나가 전 세계를 술렁이게 했다.
공략팀이 출입하는 게이트 외에 또 다른 게이트가 있다는 사실은 퍽 충격적이긴 했다. 그런데 최초 발견 후 시간이 꽤 지나도 던전 내 게이트 그 안으로 진입한 사람이라던가 던전이 소멸하기 직전까지 생명체로 여겨지는 무언가가 나왔다는 소식이 없었다.
게다가 던전 내부에 생긴 또 다른 게이트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거대한 손이 허공을 강제로 잡아 틀어 찢은 것같이 너덜너덜한 형태의 균열이라는 점이었다. 균열의 간격도 매우 좁았는데, 작은 곤충이나 다람쥐 정도 동물이나 겨우 통과할까 싶은 좁은 균열 틈에서는 그저 검은 연기만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연기를 빼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균열에 관심이 시들해지던 때였다. 어느 날, 중국 광저우 상공에 똑같이 금이 간 듯한 찢어진 균열이 발생했고, 그 틈으로 처음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당시 인류는 그날 균열을 잡아 찢으며 이 땅에 발을 디딘 존재를 ‘재앙’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