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푸른 별 7
“……좋아요?”
“…….”
“난 누구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아주 좋나 보네.”
“…….”
예의상 부정하는 말도 없었다. 얼굴만 봐도 지금 그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었다. 한지수는 일부러 눈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저리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사실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정하진과 함께여서 마냥 좋은 것은 똑같았다.
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오늘은 따로 자요.”
“네?”
정하진이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투덜댔다.
“안 되겠어. 이러다 죽겠어요. 그리고 지금 제 몸이…… 체력이 좀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진짜 몸살 날 것 같아요.”
“음, 역시 억지로라도 운동시킬 걸 그랬군요.”
“네?”
이번엔 한지수가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하진 역시 한지수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 아니에요, 지수 씨. 음, 그래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들었군요. 그래도 따로 자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제가 조심할게요. 네? 따로 잔다고 하지 말아요.”
정하진이 고의성 다분히 묻어나는 애절한 얼굴로 물었다.
과거 한지수는 정하진이 얼굴을 저런 식으로 쓰는 걸 보면 늘 저항 없이 풀어지며 웃어 버리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뜯어보며 히죽 웃으려던 찰나, 문득 울컥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텁! 잡고 밀어 냈다.
제 손가락 사이로 동그래진 눈이 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졸지에 얼굴을 잡힌 정하진은 당황하긴커녕 그대로 한지수의 손바닥에 진하게 입 맞추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볼을 비볐다. 그리곤 그대로 눈을 올려 뜨며 보내는 시선이 참…….
“하진 씨, 왜 또 눈을 그렇게 떠요.”
“이러면 지수 씨가 나를 조금은 불쌍히 여겨 주지 않을까 해서…….”
“하진 씨의 어디가 어떻게 불쌍한데요. 지금 가장 불쌍한 건 전데요.”
말은 툴툴대며 해도, 제 앞에 무릎 꿇은 이 남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어여쁘고 귀엽기만 해서 문제였다. 지금 제가 허리도 못 펴고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인간인데, 눈 좀 저리 깜찍하게-김현아가 듣는다면 기함할 표현이겠지만- 떴다고 마음이 약해지고 자꾸만 입가에 웃음이 번지려 한다.
이것도 중증이라면 중증이었다. 한지수가 제 상태에 자조하며 손을 떼려던 순간, 정하진이 부드럽게 손등과 손목을 감싸 잡았다. 그러더니 한지수의 손바닥에 연신 볼을 비비고, 손 여기저기에 키스하며 말했다.
“진짜 못 일어나겠어요?”
“그럼 가짜겠어요?”
“하하, 미안해요. 그럼, 제가 먹여 드리면 어떨까요? 받아먹는 건 할 수 있잖아요.”
정하진이 낮은 저음의 목소리로 간지럽히듯 질문했다. 제 가족이나 한지수와 있을 때만큼은 은근히 장난기가 많은 남자였다. 지난 며칠간 내내 그랬지만, 이 순간에도 남자의 변함없는 면모를 확인한 한지수가 힘없이 웃으며 되물었다.
“진짜 음식만 먹여 주는 거 맞죠?”
“큽……!”
훅 치고 들어온 농담에 놀란 정하진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한지수는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래서 부러 보란 듯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어? 하진 씨, 왜 그렇게 놀라요? 설마 다른 것도 먹여 주게요?”
“쿨럭. 아, 아니……. 지수 씨…….”
못 본 사이에 아저씨 같은 농담을 하게 되었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한 정하진이 멋쩍게 웃었다. 한지수는 베개에 고개를 옆으로 파묻고 한숨을 푹 내쉬며 덧붙였다.
“먹여 줘요. 영양분이라도 섭취해야지, 안 그러면 진짜 죽을 것 같아…….”
“그럼 먹기 편한 것들로 덜어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네에에에…….”
정하진은 한지수의 손을 침대 위로 고이 올려 주고 볼에 입 맞춘 후 방을 나섰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멍하니 벽지를 바라보던 한지수는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처음 이 몸에 돌아오는 것부터 모든 것이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원래라면 시간이 조금 더 걸렸어야 했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갑자기 찾아온 안식의 신이 꽥 괴성을 지르며 당장 네가 저기로 들어가야 한다고 제 멱을 잡아채다시피 이 몸에 쑤셔 넣었다. 육신이 있던 것은 아니기에 멱을 잡혔다는 말은 조금 어울리지 않았지만, 한지수는 그때 기분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이 몸에 돌아와 정하진과 재회를 즐긴 다음 날. 한지수는 처음으로 정하율과 인사했다. 정하진과 함께 지내던 시절에 정하율이 입원한 병원을 자주 방문했지만, 그땐 아직 긴 잠에서 깨기 전이었던 탓에 저 소년이 눈 뜨고 말하는 모습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정하율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동안 원래 ‘한지수’에게 정을 상당히 줬는지 충격받은 걸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첫날은 어색하고 서먹서먹하게 굴더니, 둘째 날엔 집을 나갔다.
정하진은 정하율이 떠난 이유를 굳이 포장해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기도 했고, 아마 원래 알던 한지수가 떠났다는 사실이 혼란했던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또 애초에 누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던 것도 사실이어서, 당분간 정하영이 돌보기로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은연중에 하율이 자신을 낯설어한다는 걸 느끼고 있던 한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정하진과 단둘이 남은 호주 집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지금까지 격정의 재회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으으……. 어으, 나 죽네…….”
두 번 재회했다간 몸이 가루가 될 것 같았다. 팔 하나 들어 올리는 것도 일이었고,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상대가 SS급 에스퍼다 보니 체력이 남다르긴 했지만……, 이 몸의 주인이었던 한지수는 저보다 훨씬 더 운동을 기피했던 게 분명했다.
몸이 무슨 연체동물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흐느적거리다니. 물론 저도 경험했던 어려운 상황을 거치고, 이제 막 나아지고 있는 단계였다는 설명을 듣긴 했으니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하긴 뭐……, 나도 이때쯤에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으니…….’
강재윤을 잃었을 때, 한지수는 정말 폐인처럼 살았다. 이 몸의 주인처럼 처음부터 정하진이 곁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저를 보호하는 명목으로 김현아가 붙여 준 에스퍼가 있었지만, 한지수의 우울을 손 놓고 지켜만 봐야 한다는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들 금방 그만두기 일쑤였다. 정확히는 힘들어하는 가이드를 지켜보며 에스퍼로서 본능적으로 보호 본능은 치솟는데 도울 방도가 없다 보니 괴로워졌던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당시 한지수는 제 곁을 지키는 이가 바뀌든 말든 신경 쓰지도 못했다. 그저 슬픔이라는 독에 빠져 허우적대고, 익사하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었던 시기였다.
그러니 운동은 고사하고 침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당연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던 나날이 꽤 오래 이어졌었다. 그 음울한 시기에 저를 강제로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었던 이가 바로 정하진이었다. 물론 그조차 쉽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불평할 게 아니네. 이 정도면 대단한 거지.’
지금은 강재윤이 실종되고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시기에 이 정도 몸 상태라면 정하진이 한지수를 돌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됐다.
지수는 안식의 신이 제게 준 기억들을 다시 복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기억을 찾은 건 아니었다. 유년 시절 기억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친모나 친부에 대한 기억은 없다시피 했다. 다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어렴풋이 기억났다.
반면 동생과 형, 러비스 멤버들과 나눈 추억, 그리고 강재윤과 정하진과 사랑을 나눴던 기억만큼은 선명한 게 많았다. 이는 안식의 신이 절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다른 신들과 불리한 협정까지 맺어 가며 ‘수집’했다는 조각들이었다.
그렇다면 슬프고 괴로운 기억들은 알아서 걸러 주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아이돌로 활동했던 당시의 기억은 소실된 부분도 많았지만, 강재윤을 잃었던 기억부터 시작해 그를 그리워하며 힘겨워했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심지어 홀로 던전에 들어서던 기억도, 그때 느꼈던 무한한 슬픔과 공허함도 전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은 그 기억을 떠올려도 씁쓸하고 아련한 기분이 들 뿐, 영혼이 뜯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데 그 편치가 현저히 낮았다.
슬프긴 해도 그게 직접적으로 지금 감정에 큰 영향을 주진 못한다고 표현해야 맞는 상태였다. 마치 오랜 세월 고스란히 간직한 기억처럼 말이다. 당시의 슬픈 감정, 괴로웠던 감정이 어렴풋이 떠올라도 지금 당장 오열하며 괴로워하지 않는, 딱 그 정도 수준. 정석적으로 마모된 슬픔과 추억이 공존하는 감각이었다.
‘기억 삭제를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됐을 거라는 걸 보여 주려는 것처럼 보여서 좀 뜨끔하단 말이지…….’
안식의 신이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어도, 한지수는 그가 제게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제게 주고픈 가르침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네가 느끼는 슬프고 소중하고 아련한 기억이 원래 네가 가졌어야 할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괴롭고 죽을 것 같다는 이유로 회피하고 가둬 두고,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봉인해 두는 게 만사가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지레 겁을 먹어 잠가 두고 외면한, 비정상적으로 차단했던 그 모든 슬픔이 독이 되어 속을 좀먹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훗날 역풍을 맞지 않았던가.
독 저항 스킬 등급을 올리려는 에스퍼들도 처음에는 독을 극소량만 몸에 바르고 주입하며 면역을 길렀다. 아무리 높은 랭크 스킬을 가지고 있더라도 갑자기 강한 독에 당하면 그들 역시 중독되고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감정 또한 그러했다.
댐으로 막아 두었던 감정이 터져 나온 순간, 한지수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상태는 한마디로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판단도 내릴 수 없었고,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으니까.
“……후우.”
안식의 신이 준 무언의 가르침이 너무 씁쓸해서 절로 한숨이 흘렀다. 혼내고자 한 게 아니었을 텐데도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감사했다. 어떻게든 제 기억을 수집하고, 온전하게 돌려주려고 했던 그 배려가 기꺼웠다.
‘그럼 밥값……, 아니. 목숨값을 해야겠지…….’
지수는 온갖 맛깔스러워 보이는 메뉴와 어떻게 그릇 안에 저걸 다 담았나 싶은 고봉밥을 챙겨서 들어오는 정하진을 흘긋 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안식의 신이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저를 이 세계에 다시 안착시키며 부탁한 건 단 하나였다.
‘내가 아끼는 별을 지켜 줘.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후우…….”
이 별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는 일단…… 밥부터 먹고, 몸을 가눌 수 있을 때 제 연인과 머리만 맞대고 논해 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