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푸른 별 6
리버스는 당황해 그게 아니라며 해명하는 김현서와 말없이 쿠키만 먹는 두 형제를 쭉 둘러보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싱긋 웃었다. 그리곤 케이 후작이 차려 두고 간 찻주전자를 들고 모두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동시에 리버스의 몸에서 다시 검은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그런데 이번엔 공중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그 일부가 천천히 옆에 앉은 김현서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어, 저기…….”
리버스에게 열심히 해명하던 김현서가 멈칫하며 한지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그의 시선이 제 어깨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다시 한지수를 바라봤다.
“그, 리버스 경의 몸에서 나는 검은 연기 같은 게, 지금 현서 씨에게 가고 있는데요…….”
어색하게 현서 씨라고 칭한 게 서운했는지, 김현서가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대답했다.
“현서 씨 말고, 우리끼리 있을 땐 현서 형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편이 더 자연스럽고 좋을 것 같은데.”
“아, 네. 현서 형.”
상대가 동글동글한 햄스터로 추정되는 수인인 터라 존칭이 어색하긴 했으나 직업상 형, 누나를 입에 달고 살았던 덕분에 지수는 바로 호칭을 정정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호칭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 은은한 장작처럼 연기를 흘려 대는 남자가 있지 않은가. 그걸 인지한 순간부터 당장 눈앞의 에스퍼를 어떻게든 편하게 해 주고 싶다는 가이드로서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지금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검은 연기가 형 몸으로 흡수되고 있다니까요?”
그리고 무방비하게 저 검은 연기를 흡수하는 김현서 역시 걱정됐다. 찬찬히 두 사람을 살펴본 지수는 리버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케이 후작 말대로 저게 정말 폭주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제 가이딩으로 흡수하면 될 게 아닌가?
“……음, 일단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한번 가이딩해 볼게요.”
“우와! 좋아요. 난 그럼 옆에서 보고 열심히 공부할게요.”
지수는 본다고 해서 요령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가이딩을 개방했다. 그동안 정하진과 지내며 내내 무의식중에 흘렸던, 방사형 가이딩이었다. 이번엔 제 의지대로 가이딩을 조절하며 리버스에게 흘려보내자, 정답이었는지 김현서에게 스며들던 연기가 한지수를 향해 방향을 바꿨다.
‘……된다!’
지수는 흐릿한 연기가 점점 뭉치며 시커멓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손을 뻗었다. 제 손으로 흡수된 연기가 몸에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똑같아.’
에스퍼를 가이딩할 때와 정확히 똑같은 감각이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를 몸에 받아들이는 기이한 울렁거림. 그걸 제 배 속에 품고 소화 시키듯이 운용하다 기운을 흐리게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김현서는 한지수와 리버스를 틈틈이 살폈다. 지수가 갑자기 손을 뻗었을 때, 리버스의 몸이 미약하게 흠칫했는데, 이후 그가 심호흡하며 숨을 고르게 쉬는 걸 보니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늘 능글맞게 웃는 얼굴이긴 해도, 종종 리버스가 표현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게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있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깊이 한숨을 내쉰 리버스가 지수를 향해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저 남자가 탐난다는 걸 숨기지 않는 노골적인 눈빛을 본 김현서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큽.”
“리버스 경. 형이 한 말 기억하지?”
“예, 그럼요. 기억합니다, 소가주님.”
지수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 신경 쓰지 않고 가이딩에 집중했다. 검은 연기는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저 시커먼 걸 그동안 얼마나 쌓아 두고 살았던 건지 몰라도 하루 안에 될 가이딩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다행스러운 건 두 사람의 대화가 거의 끝나 가고, 옆에 찰싹 붙어 있는 한지율이 마카롱과 케이크 접시를 세 개쯤 비웠을 무렵엔 연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또 아예 나오지 않는 건 아니고, 스멀스멀 피어오르긴 해도 줄줄 흘러 김현서에게 갈 정도는 아니었다.
“후우……. 일단 어느 정도 가이딩 된 것 같긴 한데, 정확히 눈에 보이는 수치가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아직 좀 남은 것 같아요.”
“수치를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나요?”
김현서가 먼저 질문했다. 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지구에선 에스퍼의 폭주 수치를 볼 수 있는 기계가 있었어요. 지금은 없어서 확인이 안 되니 솔직히 얼마나 가이딩해야 할지 예상이 어렵네요.”
“아……. 그건 마법사 길드랑 연금술사 길드 쪽으로 말해 봐야겠네요. 형도 그 기계를 알고 있다면 이미 개발 중일지도 몰라요.”
“후작님이라면 당연히 알고 계실 거예요. 리버스 경. 일단 수치를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대충 가늠이라도 해 볼게요. 혹시 중간중간 기억이 끊기는 구간이 있거나, 아니면 딱히 위협하지 않은 상대를 보고 폭력적인 충동이 치민 경우가 있나요?”
이는 에스퍼 폭주 증세 중 ‘3~4단계 경계 수위’로 분류되는 위험한 상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리버스는 천천히 고민하다 곧 부정하는 답을 내놓았다.
“으음…… 잘 모르겠군요. 그런 경우는 딱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아, 다행이네요. 그럼 혹시 속이 답답하거나, 한숨을 쉬어도 내쉰 것 같지 않고 속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거나, 가끔 눈에 보이는 걸 다 치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세요?”
이는 에스퍼 폭주 증세 중 1~2단계에 속하는 가장 흔한 증상들이었다. 질문을 들은 리버스는 잠시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그런 증상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위험한 겁니까?”
지수는 그가 혹시나 중환처럼 여기고 염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뇨, 위험한 수준은 아니에요. 저런 증상이 있으면 보통 하루에 한 시간 기준으로 꾸준히 가이딩하면 이틀이나 사흘 정도면 괜찮아질 거예요. 제 실력 기준이지만요. 더 등급 높은 가이드라면 한 번에 처리하기도 하는데, 제가 그 정도 수준은 안 되니까…….”
“그럼 먼저 말씀하신 것처럼 기억이 끊기거나 폭력적인 충동이 치밀게 되면…… 얼마나 해야 합니까?”
“음……. 이것도 제 실력 기준인데, 보통 그런 경우엔 시간을 오래 잡고 하는 게 좋아요. 한 시간 집중해서 가이딩하고, 두어 시간 정도는 방사 가이딩……, 음. 그러니까 지금처럼 조금 느슨하게 하는 가이딩을 이어 가면서 하는 게 좋죠. 그런 식으로 서너 시간 정도 기준 일주일이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물론 농밀한 접촉으로 가속화할 수도 있긴 하지만, 굳이 그럴 단계가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애초에 지수는 접촉 가이딩은 강재윤과 하는 게 아닌 이상 에스퍼가 아무리 졸라도 손잡기까지만 해 주었다.
그래도 지금껏 문제는 없었고, 지수는 맡은 일을 잘 해내 왔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어조로 말하자 리버스는 다른 부분에 꽂힌 듯이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엄살이 분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녁에 종종 기억이 끊겼던 것 같습니다. 어제도 그랬던 것 같고.”
“어…….”
지수가 머뭇거리자 옆에서 김현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리버스 경, 어제 비번이었다고 2기사단 회식에 껴서 과음했다고 들었는데.”
“……크흠. 흠. 그리고 가끔 제 동기 녀석을 보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거나, 검집으로 손이 자동으로 갑니다. 그러니 이런 증상이 계속 반복되니, 일주일 정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시간은 제가 무조건 맞추겠습니다.”
조르는 기색 역력한 제안에 김현서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어 버렸고, 지수 역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딱 봐도 에스퍼들이 자주 부리는 엄살인 게 눈에 훤히 보였다. 특히 제대로 된 가이딩을 처음 맛본 에스퍼가 저러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닌지라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솔직히 그 정도까진 아니시죠?”
“……예. 그래도 매일 해 보고 싶다는 건 진심입니다.”
그건 누가 봐도 진심처럼 보였다. 리버스는 지금 당장 일어나 한지수의 옆자리에 앉아 치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손이 저도 모르게 힘줄 빡 돋을 정도로 주먹 쥐고 있는 것도 그러했고, 연신 입술을 핥으며 마른침을 삼키거나,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 또한 그랬다.
지수는 그래도 무례하게 조르거나 달려드는 것도 아니고 저리 응석 섞인 농담으로 은근히 조르는 남자가 그저 귀엽게 보였다. 누가 들으면 기함할 일이지만, 각성자를 안타깝게 여기고, 품어 주고 싶은 본능이 강한 가이드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심각한 단계는 아니지만, 괜찮으면 매일 조금씩 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현서 형도 배우셔야 한다고 했으니까 셋이 같이요.”
단둘이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말이었으나, 저 둘이 무어라 반응하기 전 옆구리에서 빼액-! 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도! 나까지 넷이야! 나도 같이해! 나도 해!”
“으응, 그래. 우리 지율이도 당연히 같이 있어야지. 형이 말실수했어, 미안해. 지율이는 당연히 형이랑 있어야지.”
지수는 자기만 쏙 뺄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제 동생을 무릎으로 옮겨 앉히며 도닥였다. 한지율은 지수가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꼭 넷이 함께 모이자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해맑게 웃었다.
체온이 높은 동생을 품에 안고 있으니 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지수는 세 사람과 대화하는 중간중간 저도 모르게 창밖을 살피곤 했다. 푸른 하늘은 맑고 높았으며, 녹음이 아름다운 정원이 자꾸 시선을 빼앗았다.
자신이 살아가게 될 세계가 궁금했다. 그래서 지수는 김현서와 리버스에게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으며, 오늘은 후작성을 돌아보고 내일은 함께 외출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렇게 다 좋아도 괜찮은 건가 싶은 만큼 모든 것이 평온하고, 편안하게만 느껴져서 지수는 저도 모르게 또 다른 ‘한지수’를 떠올리며 동생을 꼬옥 끌어안았다.
‘너도 잘 지내겠지?’
또 다른 자신을 ‘너’라고 칭하는 게 어색했지만, 지수는 그 역시 분명 잘 지낼 거라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걱정이나 염려하는 대신, 이곳에서 자신이 할 일을 기약하며 동생의 조금 높은 체온으로 마음을 달랬다.
* * *
또 다른 자신도 잘 지낼 거라는 지수의 예상과 다르게, 지구의 한지수는 안타깝게도 잘 지낸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를 깨우는 목소리에 눈뜬 한지수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늦은 오후라는 걸 파악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몇 번 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했을 땐 “어흑…….” 앓는 소리가 흘러나올 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풀썩 쓰러지길 반복했다. 밤새 혹사당한 몸이 살려 달라며 무언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끄으…….”
밤새 얼마나 운 건지, 목도 맛이 가 버렸다. 쉰 소리나 신음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지수 씨. 그래도 식사는 앉아서 해야…….”
“…….”
한지수는 침대 아래 무릎 꿇고 앉아 죄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정하진을 유일하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눈을 굴려 부리부리하게 노려봤다. 지난 며칠 동안 제 몸을 이렇게 만든 남자는 어째서인지 반질반질한 피부와 좋아 보이는 얼굴로 입꼬리가 꿈질꿈질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