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푸른 별 5
지수는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묻기도 전,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동생 한지율 덕분이었다.
“어, 현서 형아랑 리버스 삼촌이다! 안녕하세요!”
“지율아~ 안녕! 오랜만이네~! 이제 여기서 쭉 지내게 되었다고 들었어.”
“하하, 오랜만이구나, 지율. 드디어 형님을 모시고 돌아왔구나.”
“응! 이제 현서 형아랑 많이 놀 수 있어! 리버스 삼촌이랑도!”
“우와~ 기대된다~!”
“삼촌도 이날을 기다려 왔지!”
‘현서?’
지수는 저도 모르게 그의 외향을 다시 살폈다. 김현서. 김현아의 쌍둥이 오빠이자 김현우, 그러니까 안식의 신의 동생. 지수는 당연히 그 둘이 닮았으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앞의 남자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김현서가 한국에서 깊은 병환으로 이미 죽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럼 저 몸은 안식의 신이 만든 인형 중 하나인가?’
그렇다고 해도 의아했다. 지금 지수의 몸은 지구의 원래 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는데, 김현서의 모습은 아예 종족 자체가 달랐다.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인의 특징이 하나도 없던 것이다. 모발, 작은 동물의 귀, 투명한 보석을 깎아 넣은 것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 등 외적인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지율이도 얼굴은 비슷해도 전혀 다른 몸이고…….’
지금 막 만난 사람의 개인적인 부분을 궁금해하는 것 같아 머뭇거리자, 자그마한 한지율을 안아 든 김현서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한지수 씨,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전 김현서라고 해요. 이쪽은 리버스 경, 제 호위 기사 중 한 명이에요.”
“안녕하세요, 한지수입니다.”
간단히 인사한 지수가 그의 뒤에 선 남자로 시선을 돌렸다. 키가 엄청나게 큰 남자의 민트색 모발이 지수의 시선을 절로 끌었다. 딱히 인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귀가 유난히 길고 뾰족해 엘프 종족인 것 같았다.
“현서 소가주님의 호위 리버스입니다. 성은 따로 없습니다.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아, 네. 안녕하세요, 리버스. 전 한지수라고 해요. 성이 한, 이름은 지수. 그러니 지수라고 불러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마도…….”
아직 이쪽 예법을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바로 알려 주었다. 리버스라 불린 남자는 생긋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이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 걸 지켜본 김현서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아, 방이 불편하면 바로 옆 응접실로 가도 돼요.”
“……!! 아, 아뇨. 들어오세요. 괜찮아요.”
지수는 그제야 제가 너무 멀뚱히 서 있었다는 걸 알고 길을 터 주었다. 김현서는 제 품에 안겨 신난 한지율을 능숙하게 토닥이며 방으로 들어섰다.
동생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지수는 맞은편 자리에 앉은 김현서와 리버스를 확인했다. 리버스는 기사라고 소개받은 것처럼 각 잡힌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고, 김현서는 그보단 편해 보이는 자세로 앉아 말했다.
“음, 일단 다시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난 한지수 씨가 잘 아는 케이 후작의 동생이자 김현아의 쌍둥이 오빠 김현서예요. 케이 후작가의 소가주이기도 하죠. 그래서 불편하겠지만 밖에선 소후작님이나, 소가주님이라고 불러 주시고, 우리끼리 있을 땐 그냥 편하게 현서라고 불러 주세요.”
“아, 네. 저도 편하게 지수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현아 누나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진짜요? 현아가 좋은 말만 했길 바라야겠네요.”
지수는 방긋 웃으며 농담한 김현서를 보곤 저도 모르게 같이 웃어 버렸다. 이렇게 보니 새삼 신기했다. 그는 불같은 성질의 김현아나 매사 짜증이 묻어 있는 안식의 신과 형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참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고작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지율이가 지구로 가기 전에 잠시 여기서 함께 지냈어요. 형 데리러 간다고 지율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형아, 나 리버스 삼촌이랑 같이 연습도 했어. 싸우는 거! 급소 때리기! 눈 찌르기! 머리 때리기! 다 삼촌한테 배웠어! 스승님이야!”
“오…….”
지수는 한지율이 토토였을 때, 그 짧은 앞발과 뒷발을 야무지게 사용하며 다른 에스퍼들의 관자놀이, 콧등, 인중, 명치, 나아가 생식기 등 급소만 골라 쥐어 패고 다니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엔 대체 어디서 저런 실용적인(?) 주먹질을 배운 걸까? 설마 재윤이 형한테 배웠나, 짐작할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기엔 강재윤 역시 토토에게 많이 맞고 살았다 보니 나중엔 그저 강재윤에게 배운 건 아닌 것 같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훌륭한 스승님이 따로 있었구나…….’
한때 ‘핵주먹 토토’, ‘깡패햄’으로 불렸던 동생의 화려한 과거를 떠올리는 동안 한지율은 리버스에게 직접 쿠키를 골라 건네주고 있었다. 리버스는 쪼꼬미에게 받은 쿠키 세 개를 한입에 넣고 순식간에 씹어 삼켰다. 그리곤 대체 쿠키가 어디에 있냐며 능청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한지율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새로 고른 쿠키를 건넸다.
‘사이도 엄청 좋아 보이잖아?’
아까 안식의 신이 제 동생을 대할 때도 그렇고, 김현서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긴 것만으로도 대충 예상했지만, 그동안 제 동생이 여기서 꽤 좋은 대접을 받고 지낸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동생을 돌봐 주시고 이것저것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버스 경. 음, 이렇게 불러도 괜찮을까요?”
“하하, 예.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지수는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리버스를 향해 마주 웃다 일순 멈칫했다. 리버스의 넓은 어깨 위로 마치 아지랑이처럼 은은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야? 왜 사람 몸에서 연기가 나? 그것도 저런 불길해 보이는 시커먼 연기가…….’
당황한 지수는 일순 본능적으로 동생의 어깨를 끌어안고 리버스를 살폈다. 쿠키를 먹다가 졸지에 형에게 달싹 안긴 한지율은 그런데도 마냥 좋은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저기……. 리버스 경…….”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경계하는 기색 역력한 지수의 반응을 확인한 리버스와 김현서가 서로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한 건 리버스가 아닌 김현서였다.
“한지수 씨는 리버스 경에게서 뭔가 나오는 게 보이세요? 형 말로는 아마 연기처럼 보일 거라고 하던데 전 안 보이거든요.”
“……네, 말 그대로 연기 같은 게 보이는데요.”
리버스가 자세를 고쳐 앉자 흘러나오던 연기가 멈췄다. 이제 안 나오는 건가 싶었는데, 고친 자세를 유지하고 앉아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 연기는 뭐죠? 어, 지금은 또 안 나오는데……. 아니, 또 나오네요?”
자세히 보니 일정하게 나오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조금 전 방을 찾아왔을 때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연기가 희미하게 보인다곤 해도, 저렇게 존재감이 드러날 정도로 거무죽죽한 연기라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나오다 말다 하다가, 지금은 또 안 나와요.”
이젠 완전히 사라졌다. 김현서는 딱히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형 말로는 이게 아마 지구에서 말하는 에스퍼의 폭주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더라고요. 여기서도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어요. 고위급 신관이나, 아니면 형이 직접 가이드가 맞다고 확인한 사람 중 극소수만 볼 수 있었죠.”
“…….”
가이드라 해서 전부 볼 수 있는 게 아닌 연기. 지수는 아무래도 그것이 능력 등급 차에 따라 갈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일종의 등급에 따라 보고 못 보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형이 말하기론 가이드 발현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연기가 더 선명하게 보일 거라고 했어요.”
“……살짝 흐리게 보여도 연기 같은 게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어요.”
지수는 제 등급이 B급으로 분류됐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선 본 적 없는 현상이지만, 이곳은 다른 별이니 모든 현상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지수 씨가 그렇게 놀라신 걸 보니…… 아무래도 형에게 제대로 설명을 못 들으신 것 같네요. 정말 죄송해요. 저희 형이 너무 바빠서 정신없다 보니 좀 말을 과하게 생략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 아뇨, 괜찮아요.”
서로 사과하고, 괜찮다며 잠시간 실랑이하듯 주고받을 동안 한지율은 그 작은 입으로 거대한 쿠키를 네 개나 해치웠다. 다섯 번째 쿠키를 집어 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 때가 되어서야 둘의 사과 핑퐁이 끝났다.
“흠흠, 한마디로 형은 제가 한지수 씨에게 가이딩하는 법을 배우길 원해요. 그리고 여기 리버스 경은 형이 확인했을 때, 저희 후작가 소속 기사 중 가장 가이딩이 시급해 보이는 인물로 뽑혀서 함께 온 거고요.”
“하핫, 어째 제 성질머리 못 죽이는 사람 1위로 소개된 것 같아 쑥스럽습니다.”
“아, 아니, 리버스 경! 그런 뜻이 아닌데……!”
리버스의 농담에 당황했는지, 김현서의 정수리에 솟은 작은 귀가 털을 펑 부풀렸다. 그 모습을 본 지수는 급하게 입을 꾹 깨물었다. 햄스터 같은 귀가 커지니 곰돌이 귀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귀엽단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직업상 귀엽다는 말을 매일 듣고 살았던 자기와 다르게, 다 큰 남자에게 귀엽다는 발언을 하는 건 한국인 정서상 양날의 칼 같은 일이었다. 지수는 혹시 모를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작은 쿠키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저도 모르게 터지려는 입은 맛있는 음식을 넣어 방어하는 게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