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푸른 별 4
설명을 들어 보면 각자 명칭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 에스퍼와 힐러 그리고 가이드와 다를 게 없었다.
‘신기하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은가 봐.’
안식의 신은 대충 이 세계를 설명하며 중간중간 한지율의 입에 수프를 넣어 주었다. 마치 이유식 먹이듯 자연스러운 모습을 본 지수는 그가 이곳에서도 제 동생을 꽤 신경 써 주었던 건가 싶어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은 종족 분포가 꽤 다양한 편이니 신기한 사람을 봤다고 해서 뚫어지게 보거나 하는 실례는 저지르지 않게 신경 써. 수인도 많으니 너무 놀라지 말고. 특히 엘프랑 수인은 귀가 밝으니 그들 앞에선 말조심해.”
지수는 수인이 뭔지 몰랐지만, 안식의 신이 한지율의 작은 햄스터 귀를 장난스레 잡아당기며 “대부분 수인은 이렇게 생겼어.” 설명해 단번에 이해했다. 한지율은 그가 귀를 쭉 잡아당겨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빵에 집중했다.
“이곳 루아인 왕국은 왕권 체제야. 지구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예를 중요시하는 곳인데, 이건 차차 공부하면 될 일이니……. 일단 중요한 건. 여기선 날 성좌명이 아니라 케이라고 불러. 케이 후작.”
“네, 케이 후작.”
“……후작님.”
“아, 네. 죄송합니다. 케이 후작님.”
“그래. 익숙하지 않아도 천천히 배우도록 해. 이 몸은 여기서 평범한 마법사 케이 후작으로 살아가고 있고, 사람들은 나에 대해 잘 몰라. 그냥 젊고 괴팍한 마법사라고만 생각할 거야.”
그가 말한 ‘이 몸’이란 역시 본체가 아니라 인형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지수는 모든 걸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안식의 신이 얼마 전에 설명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세계는 무려 ‘신’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였다.
“실수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그런데……, 재윤이 형은 언제 볼 수 있어요?”
“음, 글쎄. 제자 녀석이 지금 좀 성별이 바뀔 만큼 구르고 있긴 한데…….”
“잠시만요. 성별이 바뀐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당황한 지수가 먹던 빵을 떨어뜨릴 뻔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본 안식의 신은 양손으로 한지율의 작은 귀를 꾹 눌러 덮으며 말했다.
“X 빠지게 구르고 있다고. 애 앞이잖아. 대충 알아들어.”
“아, 아아! 크, 큼! 네에.”
지수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본 한지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고개를 힘껏 젖혀 안식의 신을 부리부리하게 바라봤다.
“아저씨, 우리 형아 괴롭히지 마세요.”
“……어어, 그래. 알았다.”
툴툴대고 까탈스럽게 대할 줄 알았는데, 저리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지수는 모르긴 몰라도 그가 설마 아이에겐 약한 건가 싶어 괜히 웃음이 났다. 지수가 왜 웃는지 간파한 안식의 신은 혀를 차며 설명을 이었다.
“뭐, 당연한 이야긴데 혹시 모르니 이건 말하고 넘어가야겠네. 내가 너와 동생을 창조한 건 비밀이야.”
“…….”
아, 그것도 비밀이었구나. 이 동네(?)에선 나름 흔한 일일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에게 시선을 두었다. 동생의 모습이 남아 있는, 말도 안 되게 귀여운 비율의 쪼꼬미가 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너무너무 귀여워서 끌어안고 볼을 마구 깨물고 싶었다.
“만약에 누가 너희 정체를 물으면, 그냥 케이 후작의 오랜 친우의 옆집에 살던 천애 고아라고 해. 갈 곳 없는 처지라 내가 친우에게 부탁받아 데려온 거로 하자. 자세한 살은 나중에 붙이고.”
완전 남이라는 소리를 굳이 저렇게까지?
“그리고 이 방은 앞으로 네가 동생과 지낼 방이야.”
“고맙습니다. 이렇게 좋은 방도 주시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집은 중요했다. 그걸 잘 아는 지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방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침실 옆 달린 문이 살짝 열려 있었는데, 안으로 타일이 보이는 걸 봐선 욕실 같았다.
지금 앉은 소파나 테이블도 거실 역할을 해 주고 있었고, 근처에 벽난로도 있고, 하여간에 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넓었다. 거의 아파트 수준이었다.
“구경은 이따 하고. 일단 네가 여기서 할 일부터 알려 줄게.”
“……!! 네.”
“첫째는 공부다. 제자 녀석이 일을 마치고 올 때까지 넌 이 세계를 확실히 배워서 익혀 둬. 솔직히 제자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어. 아까 말한 것처럼 두 우주의 시간 선이 뒤틀릴 때가 많아서, 지구 시간으로 몇 년이 흘러도 여긴 며칠이 갈 때도 있고. 반대로 어떨 땐 이쪽 시간이 훨씬 빠르게 흐를 때도 있거든.”
“…….”
한마디로 시간 축이 망가져서 그런 거라는 설명에 지수는 벌써 머리가 아팠다. 시간 축이 뭔지 대충 넘겨 들으며 지수는 그냥 두 우주 간의 어떤 문제가 생겨서 시간이 제멋대로 뒤죽박죽 마구 흐른다고 이해했다. 안식의 신 역시 지수가 이해한 게 옳다며 더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그래도 확실한 건, 녀석은 반드시 여기로 돌아올 거다. 그러니 그건 걱정하지 마.”
“…….”
지수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시기는 상관없었다. 강재윤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게다가 감히 바라지도 못할 만큼의 행운을 이미 받지 않았는가.
지수는 제 삶의 가장 큰 복덩이를 흘긋 봤다. 건너편 남자의 무릎에 앉아 양손에 빵을 들고 볼 빵빵하게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딱히 뭘 먹지 않아도 절로 배가 불렀다.
“그럼 제가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해. 내가 신원 보증된 선생을 붙여 줄 거야. 그 선생들에게 우선 이 세계를 배워. 그 후엔 이 나라의 역사와 예법을 배우고. 이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그가 한지율의 배를 토닥이며 말했다. 한마디로 이 세계를 통으로 익히라는 소리였다. 지수가 자신 없는 얼굴로 작게 끄덕이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지율의 입에 또 수프를 쏙 넣어 주었다.
“네가 내 울타리 안에서 지내게 된 이상, 너와 네 동생은 어쩔 수 없이 주목받게 될 거야. 그리고 동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 동생이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이 많을 테니, 내 동생 말동무도 해 줬으면 좋겠어.”
그의 동생.
지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가족 관계를 떠올렸다.
“동생분이라면, 현아 누나의 쌍둥이 맞죠?”
“맞아. 우리 현서가 지구랑 현아 소식을 궁금해하니까, 좋은 것만 들려줘.”
모종의 사명감을 느낀 지수가 비장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리고 두 번째 할 일은.”
“…….”
그는 앞에 공부와 동생 말동무라는 두 가지 일을 말해 놓고 자연스레 세 번째 지시를 내렸다. 지수는 이를 알고도 가볍게 웃어넘기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안식의 신, 케이 후작은 포크로 찍은 과일 조각을 한지율에게 직접 먹여 주며 말했다.
“여기에도 네 가이딩이 필요한 녀석들이 있어. 당분간 가이딩을 좀 해 줘야겠다. 몸에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좋아요. 그런데 상태 창이 안 뜨던데…… 여기선 못 쓰나요? 인벤토리는요?”
“인벤토리는 못 써. 그래도 상태 창은 쓸 수 있도록 처리해 둘게. 어차피 상태 창이 없어도 가이딩은 가능하니까, 먼저 한 녀석 좀 가이딩해 줘.”
“네, 열심히 할게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단 배부터 채우고 있어. 이쪽으로 오라고 할게.”
고개를 끄덕이던 지수는 그가 일어나려는 기미가 보여 급히 불렀다.
“저기……! 케이 후작님.”
“왜?”
“정말 감사합니다. 전부 다요. 재윤이 형도, 그리고 저를 여기로 옮겨 주신 것도, 동생도 만나게 해 주셔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고맙습니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고마운 일뿐이었다.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대충 손사래 치며 흘려들은 케이 후작이 무릎에 앉힌 한지율을 안고 일어나 지수의 옆에 사뿐히 앉혀 주었다.
“……고마우면 공부나 열심히 해. 꼬맹이 너도 형이랑 같이 공부해야 하니까 든든하게 먹어라.”
“공부우…….”
공부는 싫다는 의견을 분명하게 표명하듯, 작은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케이 후작은 그 앙증맞은 입술을 손으로 꾹 밀어 넣어 주며 말했다.
“대신 아침부터 저녁까지 형이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 좋지? 신나지?”
“……!! 네!”
형과 함께라는 게 퍽 맘에 들었는지, 한지율이 힘차게 끄덕였다. 케이 후작은 한지율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곤 오후까진 편히 쉬라며 방을 나섰다.
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한지율은 기다렸다는 듯이 형의 무릎에 올라왔다. 지수는 동생과 테이블 휘어질 만큼 가득 차려진 음식을 이것저것 맛봤다.
배부를 때까지 여러 음식을 맛본 지수는 동생을 안고 발코니로 나갔다. 잘 관리된 넓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와, 끝이 안 보이네…….”
정원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는데, 정원 수목들 사이로 드문드문 알파카가 보였다. 대체 왜 알파카가…… 정원을 누비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다들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풀밭에 널브러져 있거나, 조경된 나무를 씹어 먹고 있었다.
“…….”
뭐. 괜찮으니 풀어 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지수는 바깥을 계속 살폈다. 정원 산책로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저 멀리 큰 건물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작은 건물도 하나 붙어 있었다.
저택 규모가 어찌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제 짐작으로는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수가 있는 방은 3층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방 천장 높이가 어마어마해서 어쩌면 여기가 2층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창밖을 구경하고 있을 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아, 네.”
놀라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지수가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렸다. 육중해 보이는 거대한 문은 지수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부드럽게 열렸다. 복도엔 키가 매우 크고 몸이 좋은 남자와 반대로 작고 왜소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그중 키가 작은 남자가 먼저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지수 씨!”
“……어, 네. 안녕하세요…….”
지수는 제 이름을 힘차게 부른 남자를 살피며 반사적으로 꾸벅 인사했다. 남자는 곱슬곱슬한 크림색 머리카락에, 마치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 동생처럼 머리카락 사이로 짧은 귀가 삐죽 솟아 있었다.
‘이 사람도 지율이처럼 햄스터 수인인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