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푸른 별 3
“사실 내가 죽었을 때 기억은 안 나. 아저씨가 그랬는데, 큰형은 나를 감싸다 더 먼저 사라졌대. 그래서 형의 영혼은 못 붙잡았대.”
“이 양반이 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아냐. 지율아, 계속 말해. 그랬구나. 지율이는 그럼 큰형 생각은 안 나?”
“으응……. 옛날 기억이랑 얼마 전 기억이랑 섞여 있어……. 근데, 그날 일은 기억 안 나…….”
“그렇구나……. 괜찮아. 형이 큰형 이야기 많이 많이 해 줄게.”
“응!”
조금 울컥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제 어린 동생이 형과 함께 대격변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렸던 기억이 없는 건 다행일지도 몰랐다. 아마 안식의 신의 배려였던 건 아닐까?
막냇동생을 감싸고 죽은 큰형의 모습을 일부러 기억에서 지운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애한테 별소리 다 했다 싶어 흥분했던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럼 우리 형은…… 여기에 없구나…….’
지수는 다소 침울해져 제 동생을 다시금 품에 당겨 안았다. 한지율은 형의 품에 안겨 헤헤 웃으며 꼼지락거렸다. 기분 좋은지 분홍색 작은 귀가 쫑긋거리는 게 신기하고 마냥 귀여웠다.
속상한 마음은 들었지만, 자신이 동생을 품에 안고 이렇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역시 큰 행운이라는 걸 알기에, 동생의 귀를 살살 보듬으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한지율이 이 방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안식의 신이 말했던 어떤 별의 그의 저택이라고 했다. 바닷가가 가까운 마을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문득 어제 잠들기 직전 계획했던 일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정하진 에스퍼랑 하율이랑 바닷가 산책이라도 가려고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며칠 더 시간이 있을 줄 알았기에 졸린다고 그냥 자러 간 게 아쉽게만 느껴졌다. 정하진 입장에선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도 혹시 몰라 미리 작별 인사를 하길 잘한 듯싶었다.
아마 ‘한지수’라면 자기 대신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해 줄 것이었다. 서로 그러자고 정한 건 아니었지만,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존재였으니 그렇게 해 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현실감 없는 비율의 작은 동생을 안고 도닥이던 지수는 그동안 동생과 계속 함께였다는 사실을 그저 벅차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문득……. 문득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동생 앞에서 절대 보여선 안 되는 종류의 제 행위들이.
‘아 잠깐…….’
정하진과 있을 땐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그 전이었다. 그러니까 강재윤과 함께 지내던 시기엔 늘 토토도 함께 있었으니까. 그 말은…….
‘……아, 안 돼…….’
얼떨떨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동생을 살펴보니,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순수한 제 동생이었다. 이 순수한 아이 앞에서 대체 난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어……, 지, 지율아…….”
“응?”
작은 귀가 형의 말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쫑긋거린다.
“그……, 그, 혹시……, 토토일 때 재윤이 형이랑 같이 지낸 것도 기억해?”
“당연하지!”
“형이랑 재윤이 형이랑 셋이 살던 집도 기억나?”
“응! 기억해!”
“그……, 그래?”
지수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강재윤과 입을 맞추다가 분위기가 조금 달아오른다 싶으면 토토가 항상 달려들어 강재윤을 쥐어 패곤 했었다. 그때는 그냥 질투 많은 반려몬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게 제 동생이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지수의 얼굴은 점점 허옇게 질려 갔고, 형이 갑자기 공황에 빠진 걸 본 한지율도 놀라 귀를 쭉 눕힌 채 작은 손을 허우적거렸다.
“형,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아, 아니……. 형 안 아파……. 그냥 형이……. 형이 지율이한테……. 미, 미안해서…….”
“어? 왜?”
눈을 깜빡이며 묻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니, 어려서 그런지 지금 대화 맥락을 전혀 못 잡는 것 같았다. 한지율의 말대로라면 안식의 신이 거둘 수 있었던 동생의 영혼의 파편은 일부였고, 그것도 대부분 어린 시절 기억을 담당한 조각들로 추정됐다.
정확한 건 들어 봐야 알겠지만, 한지율이 말한 기억을 보면 확실히 그래 보였다. 그럼 자신은 대체 순진무구한 어린 동생 앞에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강재윤과 둘이 보냈던 은밀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보통은 그런 분위기가 잡힐 때마다 강재윤이 토토를 방 밖으로 쫓아내긴 했지만, 심통 난 토토가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적도 있었고, 강재윤에게 달려들어 둘만의 배틀이 시작된 적도 많았다.
물론 가끔은, 강재윤과 대체 무슨 딜을 한 건지 몰라도, 다른 방에서 안 나온 적도 있긴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이……. 그러니까 그 모든 과정이 지수는 몹시 신경 쓰였다. 동생 교육에 너무 안 좋은 장면을 많이 노출했던 것 같아 어디 벽에라도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지수의 번뇌를 느낀 건지,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별걸 다 걱정하네. 그쪽 관련은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했다.”
“……!!”
“어, 아저씨다!”
지수가 벌떡 일어나 앉자, 한지율 역시 꼬물꼬물 일어나 앉아 방긋 웃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냐.”
지수는 침대로 다가온 안식의 신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그 미지의 공간에서 만났던 때와 똑같이 생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뭔가 달랐다. 그땐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냥 평범한 사람같이 보였다. 평범하긴 한데 그저 좀 더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
“어……. 어어…….”
“인사는 됐고.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꼬맹이 너도 고생했다.”
사전에 불필요한 인사를 차단한 안식의 신이 한지율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다소 거친 손길이었는데, 한지율은 그게 좋은지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 보이지도 않을 작은 꼬리를 연신 씰룩거렸다.
“그……, 알아서 했다는 게…….”
지수가 차마 주어를 입에 담지 못하는 모습을 본 그가 코웃음 쳤다. 그는 자그마한 한지율을 직접 품에 안더니 등을 도닥도닥하며 대답했다.
“애 교육에 안 좋은 장면은 인지하지 못하게 왜곡시켰어. 물론 그렇게 처리해도 당시의 기분은 남아 있어서, 이 녀석이 그 녀석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긴 했을 거야. 그건 걔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 녀석, 걔. 그러니까 강재윤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 말이 사실인 듯 한지율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재윤이 형 조금 미워. 형이랑 맨날 뽀뽀하고. 뽀뽀하고……. 또 뭐 했는데, 여튼 미워.”
지수는 뽀뽀 기억은 안 지운 거냐고 말하는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래. 괜찮아. 재윤이 형이 잘못했을 거야.”
사실 둘이 같이 잘못했지만, 어쨌든 지수는 무조건 동생 편을 들어주었다. 중재야 나중에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 재윤이 형도 여기에 있는 건가…….’
그때 안식의 신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침대에서 조금 먼 곳 창가에 있는 소파와 테이블에 온갖 음식이 차려졌다.
“……저게 여기서도 되는 거였네.”
“당연하지. 난 마법사니까.”
“…….”
그렇게 말한 안식의 신이 한지율을 안고 소파로 향했다. 두 사람을 따라가고자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고 선 지수는 일순 비틀거리며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윽!”
“헉, 형아!”
“아……, 맞다. 저 몸, 만들어 두기만 하고 안 썼지.”
그렇게 중얼거린 안식의 신이 허공에 손을 슥 그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지수의 몸을 부축해 알아서 일으키고 소파까지 데려다주었다. 지수는 누군가 제 몸을 붙들어 주는 감각에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당황했다.
“마법이…… 엄청 정교하네요?”
“나 정도 해 먹었으면 정교해야지. 안 정교하면 오히려 욕먹어. 일단 앉아서 좀 먹어. 소화 기능은 문제없을 거야. 걷는 건 무리하지 말고 살살 돌아다니면 금방 익숙해질 거고.”
“음, 그래요.”
한지율은 이미 안식의 신 무릎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금빵을 먹고 있었다. 뜨거운지 빵을 반으로 갈라 후후 불고 반쪽은 지수에게 내밀었다. 지수는 동생이 잘라 준 소금빵을 한입 베어 먹었다. 맛있었다.
‘……대전에서 먹은 빵보다 맛있다.’
지수의 인생 빵집 기록을 다 갈아 치운 대전 동네 빵집보다 더 맛있었다. 대체 뭐로 만들면 이렇게 맛있는 걸까? 따위의 잡생각이 들 때, 안식의 신이 한지율의 입에 직접 수프를 떠먹여 주며 말했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설명해야겠지.”
“……아, 네.”
지수는 동생이 곁에 있고, 강재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괜찮다는 기분이었으나, 여기가 어딘지 아는 것은 다른 문제긴 했다.
“여긴 지구랑 다른 시간 선을 가진 우주에 있는 필리스라는 별이야.”
“…….”
“네가 살던 지구가 있는 우주와 필리스가 있는 우주를 우린 단순히 숫자로 나눠 부르고 있어. 필리스가 포함된 우주는 제2 우주, 네가 살던 지구가 있는 곳은 제6 우주로 부르고 있지.”
“……어, 음, 네.”
지수는 우주가 나뉘어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보단 그냥 다른 별에 있구나, 정도로만 이해하기로 했다. 어차피 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안식의 신도 딱히 이해하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이 알아서 축약해 설명했다.
“이 별은 지구와 다른 문명을 가지고 있는데, 지구처럼 과학이 발전하기보단 마법이 발전한 곳이야. 지구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이들도 있고 평범한 이들도 있지.”
지수는 안식의 신의 설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구와 비교해 보자면 이곳엔 검사, 마법사가 지구의 에스퍼와 비슷한 존재라고 했다. 그들 역시 각 등급이 있으며, 힘의 크기가 다르고 다루는 속성이 상이하다고. 그리고 지구에서 힐러와 같은 존재론 이곳의 성직자를 꼽았다.
“또 능력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저 검사와 마법사와 힐러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안정시키고 정신적 고통을 덜어 주는 힘을 가진 이들도 있지. 마치 너처럼.”
즉 지수처럼 가이드 같은 존재도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