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41화 (141/172)

#141.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10

“토토……. 나한테 화난 게 있는 건가?”

정하진이 조심스레 묻자 토토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지 몰라도 오해일 거다.”

“쮜엣!”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은 토토가 이번엔 또 다른 팻말을 꺼냈다.

[토토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

정하진이 묵묵히 팻말을 읽자, 다음 팻말을 연속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정하율이 성심성의껏 만들어 준 여러 개의 팻말을 꺼낸 토토가 이번엔 제 나름대로 순서를 맞춰 정렬하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토토가 순서대로 늘어 둔 팻말을 쭉 읽었다.

[토토는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토토는 기분이 좋습니다.]

[토토는 슬픕니다.]

[(ㅇㅅㅠ)]

[토토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

정하진이 다 읽은 것을 확인한 토토가 [토토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팻말을 앞발로 톡톡 건드리더니 정하진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나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쮜!”

바로 그거라는 듯이 대답한 토토가 이번엔 [토토는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팻말에 쓰여진 ‘이 일’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곤 정하진을 가리켰다. 정하진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재차 ‘이 일’ 부분을 톡톡- 두드리고 또 정하진을 가리켰다. 반복된 행동을 이해한 정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차 물었다.

“……나를 기억하겠다는 뜻인가?”

“쮜!”

다행히 정답이었나 보다. 정하진은 애정 가득 담긴 눈빛으로 토토를 바라보다 곧 조심스레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작은 녀석도 저와 이별을 준비하는구나 싶어 못내 아쉽고 섭섭해서, 한지수에겐 말하지 못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토토 네가 안 하던 짓을 하는 걸 보니, 조만간 떠날 건가 보구나.”

“쮜이…….”

말끝을 흐린 토토가 [토토는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팻말을 제외한 나머지 팻말을 모두 챙겨 볼 주머니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주섬주섬 정리하는 모습을 본 정하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도 너무 섭섭해하진 않겠다. 독립한다 해도 앞으로도 종종 만날 수 있겠지.”

“…….”

이번엔 토토가 대답하지 못하자 그 부정적인 반응을 애써 모른 척한 정하진이 농담조로 덧붙였다.

“맛있는 거 잔뜩 만들어 주마. 한지수 가이드 몫까지 포장해 줄 테니, 한지수 가이드가 바쁘면 토토 혼자서라도 버스 타고 와라.”

“쮜히힛~!”

그게 뭔 소리냐는 듯이 빵 터진 토토가 정하진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정하진의 손등에 작은 햄스터 발자국이 찍혔다. 그 자국을 바라보던 정하진이 손을 뒤집었다. 남겨 둔 팻말을 물고 손바닥에 올라선 토토가 정하진의 팔을 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등반한 토토가 넓은 어깨에 잠시 팻말을 내려 두더니 이번엔 정하진을 향해 앞발을 내민다. 알아서 고개를 살짝 기울여 주니, 작은 앞발로 정하진의 볼을 꾹 누르며 그대로 촙- 소리 나게 볼 뽀뽀를 했다.

“…….”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정하진이 토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토토는 정하진과 긴 시간 눈을 맞추다 곧 팻말을 주워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토토는 이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쮜.”

토토는 정하진을 기억할 것입니다. 토토가 알려 준 대로 해석한 정하진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작은 털 뭉치의 몸에 희미한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쮜이. 쮜이잉.”

다시금 팻말을 흔들어 보이더니, 이 팻말은 챙기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툭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정하진의 볼에 찰싹 붙어 볼을 비비며 작게 울었다.

“쮜이-.”

“토토…….”

“쮜이이- 쮜잉……. 쮜잉!”

정수리와 볼을 양껏 비빈 토토가 마지막엔 앞발로 정하진의 볼을 야무지게 두드렸다. 정하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에 당황해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토토를 손바닥에 올려 두고 쓰다듬었다.

“벌써 떠나는구나.”

“쮜이.”

빛이 점점 더 모이고,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빨리 떠나는 거지.”

“쮜이…….”

“……아니다. 인사하러 와 줘서 고맙다. 토토. 나도 널 잊지 않으마.”

“쮜!”

자연스레 토토는 흐려진다.

“그래도 놀러 올 수 있으면…… 언제든 놀러 와라.”

“쮜히힛~!”

마지막으로 키득키득 웃는 햄스터의 모습이 사라지며 털 뭉치가 빛 덩이로 변했다. 손바닥 위에 모인 은은한 빛이 퍼지며 꽉 닫힌 창문을 통과해 밖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하진은 제 손아귀에 잡은 빛이 하나 없음에도 시야가 은은하게 빛나는 걸 느껴 흠칫 고개를 돌렸다. 열린 방문 틈새로 훨씬 더 많은 빛이 거실을 통과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하…….”

문틈 새로 보이는 빛이 방울방울 정하진의 방문 앞을 기웃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창을 통해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간다. 한지수가 곧 떠날 것처럼 군 게 이거였단 말인가. 정하진은 제 생각과 너무 다른 이별에 충격받아 방 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아름다운 광경이라 여기겠지만, 정하진에게 있어선 그저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일 뿐이었다. 안식의 신 말대로였다. 보답받지 못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별이 이런 형태로 허무하고 빠르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한지수의 곁을 지키지 못해도, 그와 가까운 곳에 있지 못해도 종종 안부를 주고받고, 가끔씩 만나 식사하는 자리라도 가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친구’로서 그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한지수라는 존재 자체가 이 집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

지금이라도 방을 나가면, 저 빛 망울에게라도 인사하면 한지수가 제 작별 인사를 들을 수 있을까? 차라리 아까 그냥 재우지 말걸. 조금 더 그와 대화할걸. 온갖 후회가 사무치게 밀려왔다.

정하진은 차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꽉 메서, 숨을 뱉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속이 쓰리다 못해 뒤틀렸다. 너무 아팠다. 저도 모르게 제 가슴을 콱 움켜잡게 될 정도의 통증이 올라왔다.

“하…….”

마지막으로 남은 빛무리가 정하진의 방문 앞을 서성이듯 맴돈다. 결국 문을 열고 나간 정하진이 손을 뻗어 빛을 쓰다듬듯이 움직였다. 반짝이는 은은한 빛이 정하진의 몸을 한 바퀴 훑고 천천히 창문으로 향했다.

“……한지수 가이드.”

빛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목이 메인 탓에 말이 매끄럽게 나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이해한 듯이, 반딧불이 같은 작은 빛 방울 하나가 날아와 정하진의 볼을 스치고는 뒤늦게 빛무리에 합류해 날아갔다.

창가로 다가간 정하진은 하늘 높이 멀리멀리 날아가는 빛을 응시했다. SS급 에스퍼의 눈으로도 더는 볼 수 없을 만큼 멀어진 빛은 별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윽…….”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은 고통으로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정하진이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샜다.

안식의 신에게 호언장담했던 과거의 저를 비웃고 싶었다. 제 오만함에 치가 떨렸다. 당연히 괜찮지 않아도 견딜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이건 아파도 너무 아팠다.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

정하율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척에 놀란 정하진이 몸을 획 돌렸다. 너무도 잘 아는 익숙한 기척이었다. 그렇기에 의아했다. 이 기척의 주인은 방금 창을 통해 날아가지 않았던가.

천천히 그의 방으로 향한 정하진이 조금 열린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침대 위엔 조금 전 빛이 다 헛것이라고, 네가 잘못 본 거라고 말해 주듯 한지수가 버젓이 앉아 있었다.

“한지수 가이드?”

“…….”

잠이 덜 깬 건지 조금 멍한 얼굴로 제 양손을 내려다보던 한지수가 고개를 들어 정하진을 바라본다.

“……한지수 가이드. 괜찮습니까?”

정하진은 방금 그게 뭐냐고,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질문 대신 그의 안부부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하진은 천천히 한지수의 반응을 살폈다. 조금 멍해 보이긴 했지만 제 목소리에도 제대로 반응하는 걸 보면 의식은 멀쩡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말은 없었다. 그저 정하진을 올려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일 뿐이었다. 목을 한껏 젖힌 한지수를 바라보던 정하진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한지수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한지수 가이드. 혹시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습니까? 병원에 갈까요?”

“…….”

병원이라는 말을 이해한 한지수가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양손을 뻗어 정하진의 볼을 감싸 잡는다.

“……한지수 가이드?”

“…….”

여전히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손길이 너무도 조심스럽고 애틋하여 정하진의 눈이 커졌다. 그는 남들과 달리 저를 이리 부드럽게 간질이듯 만져 주던 이의 손길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마찬가지로 그의 볼을 보듬는다. 모를 수가 없었다. SS급 에스퍼인 저를 이토록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질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으므로.

“……지수 씨?”

“…….”

눈앞의 이가 제가 기억하는 이가 맞다면, 그토록 그리워한 이가 맞다면 그는 곧 제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웃어 줄 게 분명했다. 정하진이 긴장한 채 바라보자 한지수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곤 정하진의 손바닥에 제 볼을 비비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수 씨…….”

다시 부르자 한지수가 눈을 뜨고 정하진과 시선을 맞췄다. 정하진은 매일 부르며 그리웠던, 부르고, 부르고 또 불러도 너무도 부르고 싶었던 이름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지수 씨…….”

한지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한다. 그리곤 천천히. 느리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안겨 왔다. 정하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제 품에 안긴 한지수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프지 않게, 힘 조절을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품 안의 작은 존재를 끌어안는 데 마음이 급했다.

다행스럽게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는지 한지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대신 훌쩍이며 정하진의 목을 더 강하게 안았다. 정하진 역시 조금, 아주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를 마주 안았다.

“하…….”

작게 침음을 흘린 순간, 정하진의 시야에 푸르스름한 창이 떠올랐다.

[맹약 해제]

‘안식의 신’과 맺은 맹약의 일부가 해제됩니다.

계획을 위해 제한해 둔 일부 제약 ‘감정 제어 3단계 조정 (L급)’이 해제되었습니다.

반투명한 메시지 창이 사라진 순간,

“……으윽…….”

정하진의 가슴이 벅차오르며 시야가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하지만 정하진은 웃고 있었다.

누구보다 환하게,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쥔 사람처럼 웃으며 오열했다.

덕분에 그는 줄곧 당신을 생각했다는 말을, 당신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는 그 짧고 간단한 말을, 아직은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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