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8
별이 가득한 밤.
지수는 만세 자세로 곤히 잠든 정하율의 손을 조심스레 내리고,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 먹고 싶었던 감자탕을 배부르게 먹고, 강변 산책도 하고 늦게 들어온 덕분인지 정하율은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세상 걱정 없이 잠든 유순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에 평온이 내려앉았다.
‘너도 이 아이를 금세 좋아하게 될 거야.’
함께한 시간이 많은 건 아니어도 지수는 정하율을 꽤 아꼈다. 이 어린 소년을 보고 있노라면 거의 반사적으로 제 동생 한지율이 떠오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이젠 괜찮았다. 안식의 신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는 이야기 덕분이었다.
지수는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이 죽으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말을, 육신에 깃들었던 영혼이 어딘가에 안착하거나 여러 우주를 유영하며 존재를 잃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다. 만약 다른 이에게 들었다면 사이비 종교 같은 소리라고 치부해 버렸겠지만, 안식은 고작 저를 속이자고 그런 얘기를 구구절절 만들어 낼 이가 아니었다.
번거로운 걸 싫어한다는 안식의 신이 지수와 맞은편에 또 다른 한지수를 앉혀 두고 굳이 저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들려준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지수는 그의 수고로움을 너희가 사랑했던 이들은 저 넓은 우주를 누비고 있거나, 어딘가에서 새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 주려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율이는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겠지…….’
형아~ 형아~ 부르며 방긋방긋 웃던 어린 동생이 눈에 선했다. 쓰레기 같은 아비에게 받은 유전자가 외모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러비스 멤버들은 당연했고, 주변 사람 모두가 착한 동생을 제 조카처럼 아꼈다.
동생 한지율이 있는 곳엔 언제나 웃음꽃이 피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아이였다. 오랜만에 동생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은 머쓱했다.
그동안 자신이 정신적으로 많이 지쳤고 힘들어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삶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우울이 자신을 얼마나 좀먹고 있었던 건지 이제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지수는 정하율의 배를 토닥여 주다 멈칫했다. 어딘가에서 찌릿한 시선이 느껴졌다.
“…….”
긴장한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니, 방 문턱을 딛고 선 토토가 보였다. 토토의 콩알만 한 눈동자가 정하율의 배를 도닥이는 지수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
“…….”
지수는 반려몬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제야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쪼르르 다가온 토토가 방긋 웃으며 귀엽게 “쮜~!” 하고 울었다.
“토, 토토 왔어?”
“쮜!”
이번엔 정하율이 자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우렁차게 대답한 토토가 지수의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응, 그래그래. 나가자.”
푸짐한 털 뭉치를 어깨에 올린 지수가 정하율의 방을 나섰다. 거실엔 테이블을 닦고 있던 정하진이 보였다. 집에 오자마자 씻고 물건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지수는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하진 에스퍼는 진짜 깔끔하네……. 난 청소 더럽게 못 하는데…….’
연습생 시절엔 같은 방을 쓰는 형들이 주로 청소를 맡았고, 지수는 쓰레기 버리기 정도만 거들었었다. 지수도 적극적으로 청소에 임하려 했지만, 다들 지수는 청소 말고 쓰레기 버리는 걸 잘할 것 같으니까 그것만 도와 달라며 일을 시키지 않았다.
아마 몸이 굼뜬 탓에 욕실 청소를 하다가 넘어져 크게 다치기도 하고. 손이 미끄러져 설거지하다 그릇을 몇 번 깨 먹었던 이유도 컸겠지만, 그보다도 지수는 재활용품만 분류하게 시키라는 강재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러비스가 정식 데뷔한 후엔 하우스 키퍼가 주 3회 청소와 여러 집안일을 처리해 주었고, 대격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강재윤은 한지수가 손에 물 묻히면 다친다는 것을 공식처럼 외던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집과 한지수의 집 모두 하우스 키퍼를 고용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대신 청소해 주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았는데, 정하진이 저리 열심히 청소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미안한 마음 반, 궁금한 마음이 반이었다.
“정하진 에스퍼.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그러니까…… 청소는 평소에도 직접 하는 편이에요?”
“청소 말입니까?”
그와 지낸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묻기는 조금 그랬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만약 그도 원래는 사람을 고용했었는데, 지수가 불편할까 봐 저렇게 직접 청소하는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미안할 것 같았다.
지수의 질문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잠시 기울인 정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원래 직접 하는 편입니다.”
“음……. 집이 넓은데, 사람은 따로 고용하지 않고요? 혹시 저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하진은 지수가 갑자기 청소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파악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청소는 제 취미이기도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각을 정리할 때 도움이 되기도 해서 고민이 있으면 주로 청소를 과하게 하는 편입니다.”
“아아……. 그럼 다행이네요…….”
“음, 그리고 청소도 좋지만, 요리는 더 좋아합니다. 어지간한 건 직접 만들어 먹는 편이 더 좋습니다.”
그의 확고한 취향을 들은 지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까부터 계속 생각했던 일을 실천하려 했으나,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해 머뭇거리고 있으니 정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지수 가이드.”
“네?”
“제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 들어가서 대화할까요?”
“그, 그렇게 티 났어요?”
“예. 뭐. 갑자기 짐 정리를 한 것도 그렇고…….”
“어, 아니, 그건…….”
지수가 막 변명하려는 차에, 정하진이 쐐기를 박듯 말을 덧붙였다.
“깨어난 후로 줄곧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가이딩이 흘러나오지 않는 걸 보니, 가이드 폭주도 괜찮아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가이딩이 새지 않는다니, 생각도 못 한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깨어난 이후 약을 먹지도 않았다. 드디어 가이드 폭주 증세가 사라진 걸 깨달은 지수가 기쁨을 마음껏 표현하려는 찰나, 정하진이 다소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좋은 소식도 들은 것 같으니…… 슬슬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건 아닌가 했습니다.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신 거라면 같이 의논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어진 말에 당황한 지수의 눈이 더 커졌다. 동그랗다 못해 튀어나올 정도로 휘둥그레진 지수를 본 정하진은 쓸쓸해 보이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정하진이 저 정도로 표정 관리를 못 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지수는 지금 그가 일부러 제게 미인계, 아니 미남계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닫고 헛기침했다.
“큼. 크흠. 그, 정하진 에스퍼. 우선……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저 어디 안 가요……. 아니, 뭐, 나중에라도 사정상 독립할…… 수는 있겠지만. 우선 지금은 아니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그러니…… 그…… 정하진 에스퍼, 눈 좀…… 그것 좀 어떻게 좀…….”
“제 눈이 어떻기에?”
그렇게 묻는 남자의 얼굴에 애절함이 한층 더 짙어졌다. 심지어 팔자 눈썹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눈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허어…….” 소리가 흘러 나올 정도였다. 저 사람이 저런 꾀를 낼 줄 알다니, 기가 찼다.
저 인간이 지금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더 괘씸했지만, 저 잘생긴 얼굴을 마음껏 쓰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자꾸 하진에게 가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원래 두 사람은 이런 얼굴로 장난도 치고 했던 걸까 싶어 조금은 짠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에게 직접 말하진 못하지만, 곧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든 언질해 주고 싶었다. 몇 번 시도해 보고 도저히 맹약 때문에 불가능하다 여겨질 경우 그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자긴 어디로 떠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못 박아 두고 싶었다.
“음, 일단 할 말이 있는 건 맞아요. 토토 먼저 재우고 정하진 에스퍼 방으로 갈게요. 그러니까 그 표정은 이제 그만 하세요…….”
심장에 해롭다는 말을 굳이 생략했지만, 정하진은 지수의 반응만 봐도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로 돌아와 토토를 향해 말했다.
“토토. 늦었으니 빨리 자라.”
“……쮝.”
평소라면 쥑쥑 울며 달려들었을 텐데, 오늘은 또 얌전한 것이 토토도 뭔가 눈치챈 것 같았다. 토토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온 지수는 협탁 위에 설치한 반려몬 전용 침대에 토토를 눕혀 주었다.
“토토야, 코~ 자자.”
“쮜이잉.”
작게 운 토토가 불안한 얼굴로 지수의 손가락을 끌어안았다. 지수는 토토에게 손가락을 잡혀 준 채 배를 살살 긁어 주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안식의 신이 토토한테 설명했다며? 우리 토토는 언제나 아빠랑 함께 있을 거야.”
“쮜이.”
인간의 육신을 그대로 옮기는 건 너무 많은 제약에 걸리지만, 토토는 애초에 안식의 신이 임의로 지수 옆에 심어 둔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한지수에겐 토토라는 존재가 없었던 거라고.
안식의 신은 지수가 다른 별로 이주할 때 토토를 데려가고 싶다면 함께 보내 주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본체까지 다른 별로 이동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수가 지구에 미련 가질 만한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자 저런 리스크까지 감당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지수는 당연하게도 토토와 동행을 선택했다. 애초에 지수가 언제고 제 삶을 끝내겠다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유일하게 신경 쓰였던 존재가 바로 토토였으니까. 제 걱정보단 홀로 남을 토토 걱정에 토토를 책임지고 돌봐 줄 수 있는 후보로 김현아와 정하진을 추리지 않았던가.
‘뭐, 안식의 신이 성공한 셈이네…….’
한지수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여러 장치를 떠올렸다고 했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 붙이기로 한 게 토토였다니. 인간이었던 초월자다운 얄미운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