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7
정하율의 말에 멈칫한 한지수가 천천히 방을 돌아봤다. 여기저기 둔 큼지막한 상자엔 강재윤이 만든 어린이 재단을 포함한 여러 기부처가 적혀 있었고, 또 ‘현아 누나’를 포함해 몇몇 지인의 이름이 적힌 상자도 있었다. 상자마다 물건이 빼곡했다. 누가 봐도 가진 걸 전부 나눠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형, 혹시…… 이사 가? 우리 이제 따로 살아?”
서운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에 당황한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냐. 근데 정리는 맞아. 하율이는 모르겠지만 내 인벤토리가 정말 혼돈이라……. 정리하는 김에 내가 안 쓰는 건 필요한 사람들 주려고. 사실 몇 년 동안 방치했거든.”
그렇게 말하며 신발까지 굳이 정하율에게 넘긴 지수가 이번엔 인벤토리에 묵혀 둔 토토 간식을 찾았다며 봉지째 뜯어 주었다. 신난 토토가 바로 볼주머니에 수납하기 시작한 모습을 본 정하율은 조금 시무룩해진 채로 한지수가 준 물건을 또 잔뜩 안고 방을 나갔다.
“정하진 에스퍼도 이거 받아요. 나중에 던전 공략할 때 쓰세요.”
“…….”
한지수가 건넨 캠핑 키트를 본 정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정하진도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방어 아이템이군요.”
“맞아요. 일회성이지만 쓰고 버리기 딱 좋죠.”
사용만 하면 A+급 쉴드가 10초간 지속되는 일회성 아이템은 정하진에겐 딱히 도움 되진 않겠지만, 언젠가 그가 팀을 이끌고 던전을 공략할 때 요긴하게 쓰이지 않을까 싶었다. 정하진이 아이템을 받아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한지수가 멋쩍은 듯이 말을 덧붙인다.
“음, 그…… 사실 정하진 에스퍼는 쓸 일이 없겠지만, 하율이나 정하진 에스퍼 팀 사람들에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정하진은 과거, 한지수가 제게 이 아이템을 줬을 때도 딱 저렇게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SS급 에스퍼인 정하진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던전을 공략하는 이들의 안부까지 챙기는 사람이었다. 새삼스럽지만, 한지수가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느낀 정하진은 건네받은 키트를 거절하지 않았다.
“예. 분명 도움 될 겁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정리가 길어질 것 같으니 저도 돕겠습니다.”
“저야 감사하죠.”
한지수는 그가 곁에 남아도 개의치 않고 계속 물건을 분류하고 정리했고, 정하진은 그런 한지수를 틈틈이 살피며 옆에 앉아 분류를 돕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한지수는 이런 식으로 대대적으로 물건을 분류한 적이 있었다. 그땐 지금처럼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 아닌, 다소 후련해 보이는 얼굴을 했었더랬다. 그 탓에 당시 정하진은 한지수의 후련함을 다르게 해석하고, 한지수가 기분 좋아 보여서 그저 다행이라고만 여겼었다.
단순히 가진 것을 나눠 주기 위해 정리하려는 모습과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제 유산을 남기고자 결심했을 때 보이는 후련함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지금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정하진은 사실 어제 한지수가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기우였던 걸까. 오늘의 한지수는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이질감 드는 후련함과 평온함이 아닌, 정말 너저분한 인벤토리를 정리하고 조금이나마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말로 하기 어려운, 그러나 확연히 느껴지는 차이가 있었다.
덕분에 정하진은 지금 이 상황이 퍽 기꺼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잊지 못한 그리운 이가 떠올랐다. 제멋대로 밀려오는 착잡함을 애써 억누른 하진은 잡념을 떨치기 위해 정리에 집중했다. 들고 갔던 한 보따리를 벌써 정리했는지 다시 돌아온 정하율 역시 두 사람 사이에 앉아 함께 정리를 도왔다.
세 사람이 토토의 훈계를 들어 가며 열심히 분류하고 정리한 덕분에 늦은 오후, 한지수의 인벤토리 정리가 끝났다.
“형, 끝났어?”
“응. 이제 대충 끝났다. 어휴, 이거 또 언제 다 보내지?”
“평화 길드에 요청해 가져갈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하겠습니다. 기부처 배송은 제가 따로 업체를 부를 테니 이제 식사합시다.”
“으아아~ 배고파! 지수 형, 토토야~ 밥 먹자!”
“쮜이잇!”
쭉 기지개 켠 정하율이 먼저 일어나더니 토토를 품에 안고 방을 나갔다. 한지수는 그런 정하율과 토토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오래간만에 평온한 오후였다.
* * *
점심 메뉴는 정하진이 직접 만든 이름 모를 라자냐 비슷한 요리였다. 지수는 다진 고기와 치즈가 듬뿍 들어간 게 제 취향이라 즐겁게 먹었지만 그래도 중간에 김치를 찾았다. 정하율은 어려서 그런지 딱히 김치가 없어도 잘 먹었는데, 정하진이 무를 절여 만든 피클을 슬그머니 옆에 덜어 주자 금방 비웠다.
토토는 피클이나 김치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주요리만 공략하느라 바빴다. 배가 불러 더 먹지 못할 상태가 되었는데도 볼주머니에 꾸역꾸역 수납하는 걸 보니 저녁 메뉴가 퍽 마음에 든 것처럼 보였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다소 늦었지만 단란했던 점심 식사 이후 토토는 거실에서 정하진과 운동을 시작했고, 지수는 정하율과 소파에 기대 눕다시피 앉아 TV를 봤다. 토토가 정하진과 혹독하게 칼로리를 태우는 사이, 정하율은 한지수의 품에 기대다시피 누워 찰싹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토토가 중간에 몇 번 불만스레 울었지만 제 집사가 응원해 주자 금세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
딱히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저녁은 정하율이 갑자기 감자탕이 먹고 싶다며 노래를 불러 급히 검색한 곳에서 외식했다. 브리즈번에 위치한 감자탕집에서 뼈를 뜯던 지수는 문득 이 메뉴도 오랜만에 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어야겠네.’
지수의 생각이라도 읽은 건지, 깔끔하게 발골을 마친 정하율이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형, 내일은 불고기 먹고 싶어.”
불고기 소리에 오목눈이 새로 변한 토토가 반응하며 날갯짓했다.
“삐삣!”
“토토도 찬성이지? 형은, 아, 아니! 누나는?”
대화는 한국어로 하고 있어도 번역 아이템이 흔한 세상이라 누가 알아들을지 모르는 상황. 지수가 김지수 가이드로 변한 상태다 보니 습관적으로 형이라 부르다 놀란 정하율이 급히 누나라 고쳐 불렀다. 다섯 살 정도 꼬마로 변한 정하율과 토토가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통에 작게 웃은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고기 좋지. 들어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갈까요?”
“좋습니다. 불고기도 하고 달걀찜과 된장찌개도 하죠.”
“와~ 좋아요.”
“찬성~!”
“삐삐삣~!”
과거 러비스 팬이었던 정하율이 메뉴 조합을 용케 눈치채곤 정하진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였다. 제 형의 노력이 가상하다고 칭찬해 주는 것 같은 반응을 본 지수는 또 조용히 웃으며 새로운 뼈 발골을 시작했다.
국물이 넉넉한 불고기와 차돌 된장찌개, 그리고 명란을 풀어 만든 달걀찜 조합을 듣고 있자니, 러비스 활동 시절 형들과 함께 각자 자신 있는 메뉴를 하나씩 만들어 먹던 시절이 절로 떠올랐다.
올해 초, 정하진이 처음 이 메뉴로 밥을 차려 주었을 땐 마냥 슬프고 신기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조금 놀랍게도 마음이 슬프지 않았다. 형들이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컸지만, 예전처럼 호흡이 답답해지며 가슴과 눈가를 찌르는 극심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신기한 일이었다. 예전엔 이렇게 조금씩 나아지면 스스로가 너무 밉고, 이렇게 괜찮아지면 안 될 것 같고, 나만 살아남아서 이렇게 잘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안식의 신 덕분에 제 마음을 덮고 있던 우울의 장막이 걷히고 나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땐 주변에서 아무리 좋은 말로 위로해 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만 잘한다는 생각에 짜증스러운 나날이 더 많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들은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행하다고 여겼으니까…….’
내색하진 않았지만, 당시엔 분명 저런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모두가 대격변 때 소중한 이를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었으니까, 모두가 똑같이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자신이 가장 괴롭다고, 이 괴로움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던 날들이 민망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잊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수는 이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래 자기 자신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에 조용히 미소 짓다가도 안식의 신이 했던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그동안 네가 느낀 우울은 사실 온전히 네 것이 아니었어. 대부분 저 녀석의 파편이 섞여서 더 크게 발생한 거라……. 아마 넌 이제 괜찮을 거야. 저 녀석은 내가 최대한 케어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수는 제 앞에 음울한 낯빛으로 앉아 있던 반투명하고 어린 자신을 떠올렸다.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에 빠진 티가 났는지, 옆자리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정하율이 고개를 기울이며 바라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은 지수는 별다른 말을 하는 대신 큼지막한 뼈를 정하율의 앞접시에 덜어 주며 웃어 보였다.
‘……쉽지 않겠지만, 너도 괜찮아질 거야. 분명히.’
확신한 지수가 맞은편에 앉은 정하진을 흘긋 봤다. 식사 내내 지수를 바라보고 있던 그였기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지수는 그에게 살포시 웃어 보이곤 결심을 굳혔다.
오늘 그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