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6
꼭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말 탓인지, 정하진은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몽롱한 눈을 몇 번 깜빡인 수호는 졸음을 참는 듯 어눌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으려 했다. 하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말하려고 시도하던 한지수는 이내 포기하곤 쓰게 웃었다.
“아……. 맞다……. 이건 일단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지……. 미안해요……. 정하진 에스퍼에게 이건 꼭 말하고 싶었는데……. 벌써 기억이 좀 흐릿하네요. 아마 안식의 신이 지웠나 봐요……. 그런데 기분 나쁘거나 딱히 신경 안 쓰이는 걸 봐선 제가 동의한 일 같아요…….”
“불쾌한 기분이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건 아마 한지수 가이드가 납득할 만한 협의를 거쳐 기억을 봉인했다는 의미 같군요.”
“으응……. 그런가 봐요. 분명 많은 대화를 했는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고, 지금도 하나씩 기억이 흐려지고 있어요……. 이게 실시간으로 이렇게 되기도 하나요?”
“예. 제 경험상으로도 자고 일어나면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제약이 풀리는 날이 오면 전부 기억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지수의 반응만으로 이유를 짐작한 정하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부드러운 시선으로 눈을 맞춘다. 지수는 다정함 넘치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함께 미소 지었다. 둘 사이에 파고들어 정하진을 부리부리하게 바라보는 토토만 아니었다면 아마 두 사람의 눈 맞춤은 더 길게 이어졌을 게 분명했다. 지수는 제 가슴에 치대는 토토를 토닥여 주며 끊겼던 말을 이었다.
“음,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드문드문 말을 잇다가 잠시 멈춘 지수가 힘겹게 침을 삼켰다.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을 본 정하진이 조심스레 빨대 꽂은 컵을 입가에 가져다준 덕에 몇 모금 입을 축인 지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좋은 이야기를 두 개 들었어요. 둘 다 희망적인 이야기였죠. 저랑 정ㅎ……, 윽……!!”
잘만 움직이던 혀가 갑자기 굳더니 거대한 압박감이 지수의 정신을 짓눌렀다. 언급해선 안 된다는 의미가 분명한 간섭이었다. 그 신호를 이해한 지수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이없어 고개 저을 힘도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몸이 피곤하고 늘어진 탓이었다.
“……이것도 말 못 하나? 어으…… 이것도 엄청 답답한 일이네요. 으음, 어쨌든……. 분명 좋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더 이상 입을 놀리게 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점점 인위적인 졸음이 눈꺼풀을 내리 끌었다. 간신히 선명해진 시야가 다시 뿌옇게 변하며 스르르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한지수의 상태를 파악하고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점점 눈을 깜빡이는 주기가 길어지는 지수의 자리를 편하게 살펴 준 그가 끌어 올린 이불 위를 느릿하게 도닥였다.
“말도 못 하게 좋은 소식을 들었나 보군요.”
“……맞아요.”
정하진은 제 앞에서 편안한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짓는 한지수를 보면서 그가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 한지수를 이리 편하게 만들어 줄 소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그게 진심으로 기꺼우면서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꾹꾹 쑤셔서 애써 담담하게 대꾸했다.
“한지수 가이드에게 좋은 소식이 생겼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네. 다른 것도 정하진 에스퍼에게 자세히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괜찮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지수 가이드에게 좋은 일은 저에게도 좋은 일이니까요. 그러니 마음 쓰지 마시고 편히 쉬시죠.”
흔들림 없는 확고한 말을 들은 한지수가 쏟아지는 졸음을 거부하지 못하겠는지 아예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지금껏 간절히 바랐던 진실을 알게 되었고, 그 진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퍽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정하진은 다시 잠에 빠지기 직전인 한지수를 바라보며 내심 안도했다. 한지수가 뭘 보고 들었는지 몰라도 후원자가 그의 기억을 유연하게 봉인해 주고, 지금 상황이 길어지지 않게 재우려는 배려가 오히려 기꺼웠다.
“……갑자기 또 졸리네요……. 계속 잤을 텐데…….”
“괜찮으니 더 주무시죠.”
“……좋아요……. 아, 정하진 에스퍼…….”
“예.”
“정하진 에스퍼에게 꼭 할 말이 있어요……. 깜빡하기 전에.”
“예. 뭡니까?”
정하진이 부드러이 묻자, 감았던 눈을 간신히 뜬 한지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고마워요…….”
“…….”
“고맙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것 같은데……. 정하진 에스퍼에게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해요…….”
잠시 말을 멈춘 한지수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눈가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물이 고여 온다. 정하진은 한지수가 제게 고마움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눈물짓는 이유를 눈치챘지만, 모른척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짧게 감정을 추스른 한지수가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요…… 정하진 에스퍼와 만나서……. 정하진 에스퍼가 제 옆에 함께 있어 준 덕분에…… 그래서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하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변화였지만,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그를 응시하던 한지수였기에 그 작은 반응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떨리는 그의 눈동자와 잠시 시선을 맞춘 한지수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주 많이. 이것마저 잊어버리기 전에 확실하게 말하고 싶었어요…….”
정하진의 목울대가 크게 아래위로 움직였다. 지수는 동요하는 그를 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피로한 탓도 있었지만, 제 앞에서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려는 그의 슬픈 얼굴을 제대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지금은 그리 슬픈 표정 지을 것 없다고 꼭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안식의 신과 맺은 맹약 덕분에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저 가까운 시일 내에 그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퇴원해 집에 돌아온 한지수는 바쁘게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움직이진 않았고. 제 방에 틀어박혀 어떤 일에 몰두했다.
한지수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심심함에 몸부림치던 정하율이 안으로 쳐들어갔다가, 선물만 한 아름 안고 나오는 걸 몇 번 목격한 정하진은 마침내 식사를 핑계로 지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됩니까?”
“쮜잇!”
“어,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연 정하진은 곧바로 방으로 들어서려던 계획을 철회해야 했다. 한지수의 방바닥엔 발 디딜 틈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수많은 물건이 널려 있었다. 던전에서 주로 사용하는 잡화와 포션, 그리고 소형 아이템부터 시작해 부피가 꽤 큰 방어 아이템이나 온갖 무기, 그리고 아이템이 아닌 물건들도 많았다.
“……갑자기 인벤 정리라도 하는 겁니까?”
“네. 인벤 대청소 중이었어요. 정하진 에스퍼도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가세요. 아, 하율아~!”
한지수가 방 밖을 보며 크게 정하율을 불렀다. 그러자 호시탐탐 한지수와 놀고 싶어 기회를 노리던 정하율이 와다닥 달려왔다.
“응, 형~!”
“하율아, 이거 가져가. 아, 이것도 줄게.”
한지수는 제 몸 오른편에 둔 가방 안의 아이템을 전부 정하율에게 넘겼다. 정하진은 그 안에 든 아이템이 못해도 A급 이상의 고급 포션 더미라는 걸 알았다.
“한지수 가이드. 하율이는 각성자가 아닙니다. 인벤토리가 없으니 이걸 다 넣어 둘 곳도 없고…….”
“그냥 가방에 들고 다니면 되죠. 아, 말 나온 김에. 하율아. 이거 쓰는 거 알려 줄게.”
정하율에게 주려던 가방에 손을 넣고 작은 파우치를 꺼낸 지수가 끈을 잡아당겨 안을 보여 주었다.
“헉? 뭐야!?”
제 손바닥보다 조금 큰 파우치 안에 잔뜩 들어 있는 포션을 본 정하율이 입을 쩍 벌렸다. 만족스러운 리액션을 본 한지수가 사과 크기의 포션 병을 하나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내부 공간에 확장 스킬이 걸려 있는 주머니야. 안에 이 정도 크기의 포션 마흔 개 정도 넣을 수 있어.”
“우와~ 혹시, 혹시 다른 것도 넣어도 돼?”
“응. 그런데 이 파우치 입구보다 큰 건 못 넣어. 아 그리고 인벤토리랑 다르게 보존력은 없어서 음식을 오래 넣어 두면 상해.”
정하율은 순수하게 감탄을 터트리다가 문득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 물음에 어깨를 으쓱인 지수가 방바닥에 널어 둔 물건들을 가리켰다.
“정리 중이야. 안 쓰는 물건이 너무 많아서. 이런 공간 활용 주머니는 인벤토리 어딘가에 많이 있으니까, 더 찾으면 또 줄게.”
“아니, 더 안 줘도 되는데…….”
“괜찮아. 안 쓰는 건데 뭐. 여기 상자 말고 꺼내 둔 아이템 중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아, 맞다. 이것도 하율이 주려고 빼 뒀어. 일회성 아이템이긴 한데, 비 내리는 날에 모자나 어깨에 붙이면 몸에 투명한 보호막이 생겨서 젖지 않아. 당연히 발도 안 젖고.”
“허억…….”
보호막 아이템을 한 사발 우수수 받은 정하율의 입은 여전히 쩍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정하율에게 이것저것 또 잔뜩 안겨 준 지수가 이번엔 정하진을 향해 물었다.
“정하진 에스퍼는 이미 다 가졌을 것 같긴 한데……,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아, 저 무기류 말인데요. 정하진 에스퍼가 저렙 던전에 들어가서 쓰는 건 어때요? 혹시 필요 없으면 그냥 평화 길드에 기부하려고요.”
아이템 경매장에서도 꽤 큰 돈 주고 구해야 하는 A+급 무기가 방바닥에 널려 있었다. 대부분 가이드나 힐러, 더 나아가 비각성자도 다룰 수 있을 만큼 가벼우면서 내구와 경도가 높은 권총 형태의 무기들이었다. 강재윤이 B급 가이드인 한지수를 염두에 두고 엄선한 무기다웠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하지만 평화 길드에 기부는 좋은 생각 같습니다. 에스퍼보단 가이드나 힐러가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힐러랑 가이드들이 사용하게 해 달라고 하려고요.”
한지수는 정하진이 거절할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곤 인벤토리에서 공간 확장력이 적용된 중간 크기 상자를 꺼내 무기들을 차곡차곡 넣고 상자 겉면에 ‘평화 길드 기부용’이라고 적었다.
“자동 부력 신발도 하율이 줄게.”
정하율이 신발을 받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며 바라보자 한지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형이 안 써서 주는 거니까 그냥 받아. 괜찮아.”
“으응. 형, 진짜 고마운데, 저기……. 형 혹시 어디 가? 갑자기 왜 이렇게 정리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