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36화 (136/172)

#136.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5

두 한지수 모두 말이 없었다. 큰 한지수는 어린 한지수를 보고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상태였고, 어린 한지수는 놀란 것보단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둘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자, 안식의 신이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했다.

“너도 얘가 어떤 녀석인지는 알겠지?”

“…….”

그 말에 어린 한지수가 세상 모든 우울함을 다 담은 얼굴로 큰 한지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꼭 기분을 파악하려는 듯이 보였는데, 한지수는 이마를 짚고 말았다. 저 표정. 저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도 자신의 것 그대로였다.

“이게 무슨…….”

패닉 상태나 마찬가지였지만, 지수는 저 아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기억의 주인이겠지. 그러니까 정하진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그 한지수.

그런데 대체 왜 어린아이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것도 반투명해 유령처럼 보이는 모습이라니. 의아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안식의 신이 알아서 설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린 여러 시간 선에서 꽤 오래 저 녀석의 파편을 모았어. 하지만 각자 시간 선에서 모은 파편들을 아직 전부 합치지 못해서 지금은 겨우 저 정도 모습으로 구현이 가능한 거고.”

“파편…….”

“그래. 파편. 아까 네가 본 것. 네가 집착했던 그거.”

“…….”

“쉽게 말해서 파편이라고 부르고 있긴 한데,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혼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어. 영혼이 어떻게 조각나는 건지 설명하자면 무척 길어서 묻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그래도 어떻게든 물어볼 거 아니까 간략하게 설명할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내 말 끊지 말고 들어라.”

“…….”

애초에 말을 끊는다고 끊겨 줄 신도 아니면서……. 그의 말을 잘라먹을 생각도 없었지만, 작은 지수를 만나고서는 중간에 딴지 걸 힘도 없어진 지수가 입을 꾹 다물고 끄덕였다.

“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죽으면 해당 우주의 육체에 깃들었던 영혼은 조각조각 나서 다시 우주로 빠져나오게 돼. 그대로 우주를 유영하다 이 별, 저 별에 안착하기도 하고 하나의 우주가 소멸할 때까지 유영만 할 수도 있어.”

전부 알아들은 건 아니었지만 지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래서 그의 말을 끊는 대신 일단 경청하기로 했다.

“어딘가에 안착한 영혼의 조각은 그 별에 존재하는 자연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다른 생명에 깃들어 지적 생명체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어. 그게 동물일 수도, 인간이나 다른 종족일 수도 있는 거고.”

“…….”

“보통은 그렇게 온 우주를 누비며 순환하며 살게 돼. 워낙 잘게 쪼개져서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어쩌다 전생을 떠올리게 되는 종족도 있어. 인간이 대표적이지. 인간은 영원한 안식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좀 특이한 존재거든…… 음, 한마디로 미련이 철철 넘치는 종족이야. 그래서인지 다른 종족보다 영혼의 조각이 크게 쪼개지는 편이고.”

“…….”

“그렇다고 크다는 게 진짜 엄청 큰 건 아니고, 다른 종족의 경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만 한 크기로 쪼개진다면 인간은 모래 알갱이 크기 정도랄까. 하여간 모으는 게 꽤 오래 걸리고 힘들어. 특히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강해서 다른 시간 선의 자신에게 안착하려 할 경우엔 더 거둬 가기 힘들고.”

“…….”

“이 녀석의 영혼의 파편들이 네 시간 선과 또 다른 시간 선에 섞여 들어가서 그걸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제거해야 했거든. 지금도 또 다른 내 인형들이 열심히 작업하고 있어. 어쨌든 네게 섞여 들어간 이 녀석의 파편도 이제 거의 다 추출해서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 지구 시간으로 하루 이틀이면 다 제거할 거야. 다른 시간 선의 파편과 전부 합치면 얼추 완전해질 거고. 물론 유실된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어쩔 수 없고.”

“어, 음…….”

자신과 눈앞의 어린 한지수가 있었던 시간 선 외에 또 다른 시간 선이 또 있다는 건가. 정보가 담긴 범주의 차원이 아득해 차마 질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저 녀석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힘든 일을 기어이 해낸 녀석이거든. 덕분에 혼만 남고 육체는 없어져 버렸어. 사실 쟤의 혼도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흩어진 채 우주에 섞여 들어가게 놔두고, 여기저기 흩뿌려지게 방치하려고 했었는데…….”

그가 말끝을 흐리자 두 한지수가 모두 안식의 신에게 시선을 옮겼다. 안식의 신은 양쪽의 한지수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고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어떤 인간에게 빚이 있어서, 그 인간에게 빚을 갚고자 얘를 좀 이용해 보려 해. 후원자가 피후견인에게 빚을 지면 나중에 몇 배는 더 힘들게 갚아야 해서,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갚으려고. 그러니까 너희가 날 위해 협조 좀 해 줘. 한마디로 나 편하자고 너희를 좀 이용하려는 거란다.”

* * *

“쮸우……. 쮸우우……. 쯋……, 쮜히익!?”

꾸벅꾸벅 졸던 토토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길 벌써 네 번째. 보다 못한 정하진이 토토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토토. 여기서 편히 누워서 자라. 한지수 가이드가 깨면 깨워 줄 테니까 일단 자.”

“쮜이잇…….”

조그마한 눈에 졸음을 바리바리 달고 졸려 죽겠으면서도 고집스럽게 고개 젓는 토토를 보고 작게 한숨 쉰 정하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네가 버틴다고 한지수 가이드가 일찍 깨어나는 것도 아니니, 일단 좀 자고…….”

“쮜에엑!”

잔소리는 그만하라는 듯이 토토가 정하진의 손가락을 냅다 깨물었다. 원래도 자기주장이 강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왜 이리 고집인지 모를 일이었다. 정하진은 토토가 제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게 방치한 채 한지수를 응시했다. 누가 봐도 편하게 잘 자고 있는데 이 작은 햄스터는 뭐가 그리 걱정스러워서 이러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쮜이, 쮜이잉.”

정하진의 손가락을 다 씹은 토토가 그의 손에서 폴짝 점프해 한지수의 침대에 착지했다. 그리곤 베개 위로 올라가 제 집사의 볼을 찹찹 때리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정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토토를 강제로 떨어뜨리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한지수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

“……!!”

다시 잠잠해지나 싶더니, 곧 또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본 토토가 흥분해 집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쮜, 쮜잇! 쮜이잇!”

“……한지수 가이드?”

정하진 역시 조심스레 한지수를 불러 보았다. 저를 부르는 둘의 목소리를 인식한 건지 한지수의 눈꺼풀이 천천히 느릿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으음…….”

“쮯! 쮜잇!”

“한지수 가이드. 정신이 듭니까?”

그 물음에 반쯤 내리뜬 눈으로 주변을 쭉 둘러본 지수가 다시 눈을 감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쩍쩍 갈라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응…… 네에……. 토토가 저를 데리러 왔던 걸 보면, 제가 좀 오래 잤나 봐요…….”

이제 막 깨서 기운 없는 와중에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눈 뜨자마자 저리 눈치 보는 모습을 본 정하진은 고개를 저으며 부러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다지 오래 자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8일 차입니다. 하율이에 비하면 잠깐 존 거나 다름없죠.”

진지한 어투로 건넨 농담을 들은 한지수가 힘없이 푸흐흐 웃는다. 어찌나 기운이 없는지, 보는 이가 다 기력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정하진은 그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걸 지켜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 없습니까?”

“음, 네. 괜찮아요. 그냥 목이 좀 많이 칼칼하고…… 허리도 뻐근하고, 눈도 뻑뻑해서 잘 안 보이긴 하는데…… 나아지겠죠.”

“쮜, 쮜잉…….”

괜찮다는 사람치고 불편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목소리도 쩍쩍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아무리 습도 조절을 최적화했어도 긴 잠의 공백을 대신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정하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료진 호출 버튼을 눌렀다.

“오늘 오전 회진 때도 몸에 이상은 없다고 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다시 검사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검사라는 말에 한지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름 확고한 불호 표현을 인지한 정하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리 수정으로 몸을 유지했다고 해도 정확한 건 의료진이 확인할 일입니다.”

“어으으…… 어째 평생 받을 검사를 최근 몇 달 동안 다 받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 말에 토토가 수염을 떨며 웃었다. 정하진은 여전히 웃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얼굴로 한지수의 푸념을 들어 주었다. 그렇게 한지수의 상태를 파악하며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의료진과 힐러가 도착했다.

의사와 힐러가 각자의 방식으로 한지수의 건강을 체크하고, 힐러의 지시에 따라 그의 조수들이 주변에 걸어 둔 수정 몇 개를 치웠다. 그리고 다른 수정으로 교체를 진행하는 동안 의사는 한지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현 상태를 확인하더니 고영양 주사를 권했다. 덕분에 이것저것 교체하고 바꾸고 다시 주렁주렁 매다는 등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의료진과 힐러가 돌아간 후 편한 자세로 누운 한지수의 시야에 새삼스레 정하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변함없이 잘생긴 남자의 얼굴은 제 기억에 남은 마지막 모습에 비해 야위어 보였다. 고작 8일이라고 해도 그동안 맘고생을 심하게 한 기색이 역력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많이 걱정했죠?”

“후원자가 불렀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래도 걱정되더군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한지수는 그를 응시하다 곧 망설이듯 입술을 오물거렸는데, 그 습관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잘 아는 정하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들었던 시간이 긴 걸 보면, 후원자와 꽤 오래 대화한 것 같습니다만.”

“……네. 맞아요. 안식의 신이랑 꽤 긴 대화를 했어요. 그리고…… 전 어떤 것을 결정해야 했어요…….”

“그게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그의 질문을 들은 지수가 힘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정하진 에스퍼에게만큼은 꼭 말해 주고 싶은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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