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4
이번 힌트는 과했던 건지, 겨우 잠잠해진 하늘이 다시 불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궁----
어딘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에 움찔 어깨를 떤 지수가 의자 등받이를 잡은 채 몸을 숨기듯 숙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안식의 신이 씨익 웃는다. 자연스러운 웃음이 아닌, 부러 누군가를 흉내 내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지수는 저 표정을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저렇게 얄미운 얼굴로 저를 놀리던 사람이 다름 아닌 김현아였으므로. 지수는 눈앞에 김현아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듯하여 의자 등받이에 이마를 쿵 박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갑자기 강렬한 빛과 함께 세상에서 증발한 평화 그룹 장남.
김현아 에스퍼의 큰오빠 김현우.
당시엔 그가 갑자기 증발한 현상을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치부했지만, 대격변 이후 현재에 와서는 던전에 삼켜진 게 아니냐는 의견이 종종 나오곤 했다. 지수가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강재윤처럼 말이다.
‘다른 별에선 살 수 있지만, 지구에선 살 수 없는 후원자……. 날 때부터 후원자가 아니었던 안식의 신…….’
들은 내용을 하나하나 곱씹다 보니, 그가 한 말이 모두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후원자의 선배와 후배……. 지구에서 살지 못하면……, 내가…… 신경 쓸 사람…….”
중얼중얼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슬며시 들자, 지수의 결론을 기대하는 듯한 얼굴의 안식의 신이 보였다.
“안식의 신, 당신의 후배가…….”
목이 메어 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를 들은 안식의 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어질 말이 뭔지 이미 안다는 듯이. 하지만 보다 확고한 답을 원하는 지수는 그 얼굴을 보면서도 조심스레 되물었다.
“재윤이 형이에요……?”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안식의 신이 위를 한번 흘긋하더니, 마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어.]
그 순간.
콰과과과과과광----!!!
우주가 쪼개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또 그의 얼굴에 입 마개가 씌워졌지만, 안식의 신은 아이처럼 천진하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아이고, 저 양반들 진심으로 화났네, 이번엔 좀 크게 혼나겠다~.” 낄낄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시야가 번쩍번쩍 요란하게 점멸했다. 눈을 아무리 질끈 감아도 강렬한 빛이 눈꺼풀을 찌르듯 파고들어 지수가 양손으로 눈을 급히 가렸다.
쿠르르르-!
세차게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가슴이 쿵쿵 울렸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섬광과 이 공간을 찢을 것 같은 굉음 탓도 있겠지만 이토록 벅차게 심장을 울리는 건 아마도…….
‘만날 수 있어……!’
콰드득-! 쿠과과과--!!
‘재윤이 형을 만날 수 있어!’
펄에게서 강재윤의 생사를 듣고, 어쨌든 이 넓은 우주 어딘가에 살아 있는 걸 알았으니 그거로 됐다고, 살아 있으면 된 거라고 위안 삼으려던 게 조금 전이었다. 그런데 그를, 강재윤을 만나 함께 살 수도 있다니. 천지가 요동치든 말든 지금 지수에겐 오직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언젠가 죽기 전 꼭 그를 만나고 싶다고 바란 건 사실이지만, 진짜 만나게 될 줄은, 게다가 이렇게 빠르게 기회가 올 줄은 몰랐기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지수는 숨이 벅찰 만큼 요란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심호흡을 반복했다.
“흐으…….”
눈을 감았음에도 시야는 여전히 번쩍이고, 끊이지 않고 들리는 굉음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귀가 찢어질 것처럼 너무 아파 절로 신음이 새어 나오는데도 지수의 입꼬리는 경련하듯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하…… 아하핫…….”
지수가 느끼는 고통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이건 꿈이 아니라고, 모두 현실이라고 일깨워 주고 있어 오히려 고통이 기꺼웠다. 평소라면 겁먹고 움츠러들 만한 굉음이 지금은 흥겨운 축하 세레모니처럼 들렸다.
“아이고~ 거, 어르신들. 애 잡겠습니다. 진정하시죠. 이쪽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깐족거리는 안식의 신의 목소리 이후로 세상을 쪼갤 것 같은 소리가 뚝 멈췄다. 눈을 꾹 누르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자 번쩍이던 강렬한 빛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평범한 우주 공간 같은 곳으로 돌아온 모습에 엉거주춤 의자에 앉으니, 몇 개째인지 모를 입마개를 뜯어 버리는 안식의 신이 보였다.
“저 양반들 취향이 참…… 그러하다. 그러해. 아주 이때다 싶어서 이딴 거 들이대는 거 봐라.”
“…….”
확실히 가죽으로 만들어진 큰 개가 쓸 법한 입 마개는 실제로 입을 막을 용도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제일 취향 더러운 변태들이 저 위에 있다며 투덜댄 안식의 신이 발 근처에 떨궈 둔 입마개를 발로 툭 밀어 저 멀리 날렸다.
“하여간에. 이주를 권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거야. 지구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네가 원하는 녀석과 여생을 보내게 해 줄 수 있다는 거지.”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제가 어떻게 해야 거기에 갈 수 있어요? 안식의 신, 당신이 보내 주는 건가요?”
다소 다급하게 묻는 지수에게 그가 손을 내젓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휙 그었다. 그러자 은은한 빛을 머금은 종이가 한 장 테이블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지수는 그게 계약서라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집어 들었다.
어떤 조항이 있을지, 다른 별로 가는 조건이 뭘지 궁금함에 바로 눈동자를 굴린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지수의 미간이 확 좁아지며 눈이 가늘어졌다.
“이, 이게 뭐야…….”
“뭐긴. 상호 협의를 위한 간단한 계약서?”
“……신……체…… 포기 각서가…… 간단한 계약서라고요?”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녹은 목소리였지만, 안식의 신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도 태연한 반응에 혹시 저가 잘못 본 건가 싶었던 지수가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내렸다.
다시 봐도 변한 건 없었다. 계약서 제일 윗줄엔 한글로, 그것도 시뻘건 색의 굵은 글씨로 <신체 포기 각서>라고 쓰여 있었다. 장난인가 싶어 밑에 달린 조항을 읽어 보니, 말 그대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대신 이 신체를 포기한다는 내용에 대한 동의 사항만 네 가지나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거기 다 써 있긴 한데, 말로 설명할게. 그편이 빠르니까. 일단 네가 다른 별에 간다면 그 몸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살게 될 거야. 아, 걱정하지 마. 내가 네 겉모습을 똑~같이 본떠 만든 인형에 혼을 착! 안착시켜 줄 테니까.”
“아, 아니, 잠시만요. 전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요…….”
“말이 인형이지, 사람과 똑같아. 지금 날 봐. 평범한 사람과 다른 점 있어? 구분되지 않지?”
“그건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애초에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지금 이 몸이 인형이라곤 하지만, 몸속엔 보통 사람처럼 장기도 있어. 너처럼 이 피부 속엔 근육도 있고, 뼈도 있고, 혈관을 타고 피도 흘러. 심장도 계속 뛰고 있지. 즉 너랑 똑같은 사람이야.”
“아니……, 아니, 왜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해요? 그냥 이대로 가면 안 되는 건가요?”
“으음, 뭐, 네 몸 자체를 아예 옮기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이주를 제안한 별에선 이런 인형을 수십, 수백 개를 만드는 것도 가능한데, 애석하게도 지구에선 제약 때문에 인형을 만들 수 없거든. 그러니 제약을 덜 받는 곳에서 아예 새롭게 몸을 생성하려는 거지. 참고로 새 몸이면 장기랑 근육도 새것이고, 관절도, 연골도 다 새거다? 갓 태어난 코어 근육을 아무 노력도 없이 가질 수 있다는 거지. 지구인들 이런 거 좋아하잖아?”
“……!!”
순간 혹한 지수가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돌리려다 정신 차리고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좋은 것만 주겠다고 하는 게 영 수상했다. 안식의 신 정도 되는 후원자가 저리도 달콤하게 유혹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니, 그건 분명 솔깃한 이야기지만. 애초에 제 몸으로 뭘 하려고 그러는 건데요? 굳이 지구에 제 몸을 남길 필요가 있나요? 갑자기 사라지면 안 돼서 그러는 거면 제가 뒷정리 잘할게요. 그리고 실종 처리하게끔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이유 말고 네 몸을 지구에 둬야 하는 사정이 따로 있거든. 곧 그 부분도 설명할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안식의 신이 재킷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지수는 그가 보란 듯이 기울여 준 시계의 화면이 일반적인 시계가 아니라 작은 우주를 품고 있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시계 속엔 푸른 달과 붉은 달, 그리고 지구처럼 푸름과 녹음이 가득한 별이 보였다.
묘한 아름다움의 생동하는 별과 숲을 지켜보던 중, 붉은 달이 은은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의미가 뭔진 몰라도 긍정적인 신호인지 그가 시계 뚜껑을 닫고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빈 의자를 응시했다.
“아직 다 모은 게 아니라 조금 예상과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네.”
“…….”
뭐가요? 라는 질문 대신 지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건너편 빈 의자로 고개를 돌렸다. 의자엔 여전히 아무도 없었지만, 금세 무언가 희미하고 흐릿한 일렁임이 나타났다. 처음엔 도통 무슨 형태인지 가늠할 수 없었으나 조금씩 희끄무레한 연기 같은 게 모이더니, 이내 사람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마치 눈코입 없는 반투명한 마네킹 같은 모습이었다. 점점 체격을 키운 형태는 곧 대략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체형으로 굳어지더니, 느릿하게 이목구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수는 저 마네킹 같은 흰 존재에 점점 색이 입혀지고, 눈, 코, 입이 제대로 갖춰지기 전부터 상대를 알아봤다.
“……!!”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구현이 끝나자, 음울한 얼굴로 지수와 안식의 신을 번갈아 보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안식의 신은 손가락을 휙 움직여 아이 앞에 놓인 찻잔에 우유를 따라 주고 마카롱 접시도 둥실둥실 띄워 보내며 말했다.
“서로 인사부터 할까? 자. 이쪽은 한지수.”
“…….”
“…….”
“너도 인사하렴. 저쪽 한지수에게.”
“…….”
“…….”
안식의 신의 소개에 어른 한지수와 여전히 조금 반투명한 상태의 어린 한지수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