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34화 (134/172)

#134.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3

지수의 질문에 안식의 신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더니,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방만한 자세로 늘어져 앉았다. 깔끔하고 각 잡힌 옷과 달리 제멋대로 묶은 머리카락처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목과 허리에 안 좋을 것이 분명한 자세로 늘어져 앉은 안식의 신이 지수의 찻잔에 알아서 각설탕 두 개를 넣어 주며 말했다.

“내가 널 종종 부르던 그 공간 자체가 일종의 편법이었어. 차원의 틈새에 기운이 비틀리는 걸 역이용해 만들어 둔 치트키라고 해야 하나. 원래 우리 후원자들은 이런 분신의 모습이라도 너희 앞에 나타나면 안 되거든. 근데 거긴 모든 기운이 뒤틀린 곳이라 위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만들어 둔 공간이었는데…… 아까 펄이 소멸하면서 이목을 끄는 바람에 제대로 걸렸지 뭐야.”

“…….”

한마디로 그 순백의 공간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후원자들의 규칙에 어긋나는 공간이라는 말이었다. 지수는 아무렇지 않게 제 잘못을 술술 시인하는 안식의 신을 바라보다 복잡한 기분으로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었다.

“원래는 몇몇만 알고 있던 거라 위에서도 어느 정도 묵인해 줬거든. 근데 이제 그게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 앞으로 너 포함해서 내 피후견인들이랑 이렇게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 게 불가능해졌어. 그러니 혹시 네가 사고 치기 전에 빨리 선택할 수 있도록 미리 다 까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

“무슨 소린지 거의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저 사고 안 칠 거거든요? 돌아가면 착실하게 살 거예요.”

“음? 그래?”

“네.”

“흠…… 그럼 앞으로도 네가 극단적인 일을 벌일 생각은 없다는 거로 받아들여도 될까?”

“……!!”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가볍게 농담하듯 건넨 말치고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너무 묵직해서, 지수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안식의 신은 평소처럼 서글서글 웃는 낯으로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저와 시선을 맞춰 오는 그에게 괜히 눈치 보인 지수가 더듬더듬 변명하듯 대답했다.

“무, 물론……, 요즘 제가 제정신이 아니긴 했죠……. 좀 안 좋은, 극단적인 생각도 종종 하긴 했지만…….”

“역시 그랬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지만, 딱히 지수가 계획했던 모종의 일로 따지거나 혼내려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덕분에 안식의 신과 눈에 보이지 않는 상위 후원자들 아래서 긴장하려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던 지수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인 후 다짐하듯 말했다.

“그, 그래도 이제 안 그럴 거예요……. 앞으론 어떻게든 힘내서 살 거라고요.”

앞으론 제 정신 건강 상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호언장담하는 지수를 바라보던 안식의 신이 마카롱을 앞으로 밀어 주며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흐음……, 그래. 열심히 힘내서 사는 게 최고로 좋지. 그런데 말이야, 혹시 그렇게 힘내서 지구 말고 다른 별에서 살아 볼 생각은 없어?”

“……?”

지수는 자기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어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안식의 신은 지수 앞에 레몬색 마카롱을 몇 개 허공에 띄워 보내 주며 말을 이었다.

“환경은 지구랑 비슷하거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있는 별이고. 문명은…… 음…… 비슷한 수준이라고 쳐야 할까. 지구 문명과는 조금 다르긴 한데, 그래도 마법이랑 연금술이 발달한 곳이라 지내긴 편할 거야.”

“…….”

“인간 외에 다양한 종족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지. 지금으로서는 이주 행성으로 가장 적합한 평가를 받고 있어. 거기도 물론 옛날엔 지구처럼 풍비박산 난 적이 있긴 한데…… 내가 관리를 맡게 된 별이니까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거야.”

“……다른…… 다른 별로 가서 살라고요?”

“어. 그냥 생각을 묻는 거지. 아니, 그랬으면 좋겠어. 사실 권유하는 거야. 강력하게.”

“…….”

지수는 혼란했다. 그가 갑자기 왜 저런 제안을 하는 걸까. 안식의 신이 까탈하고, 성격이 조금 나쁘고, 종종 의뭉스럽게 구는 구석은 있어도 결코 제 피후견인에게 해가 될 제안을 하는 이가 아니라는 건 유명했다. 지수가 고민하며 그의 의중을 헤아리려는 듯이 열심히 머리를 핑핑 돌리고 있을 때, 안식의 신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선배님들이 지켜보는 중이라 내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뭐 네 기억은 여기서 나가기 전에 어느 정도 지울 거니까, 위에서도 그걸 감안해 줬으면 좋겠네. 대충 설명해 보자면. 네게 행성 이주를 권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거든. 제일 큰 건 지구라는 별은 균형이 좋은 별이 아니야.”

“그 균형이 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별은 의지가 있어. 지구도 의지가 있고. 제 몸을 갉아 먹는 해충을 줄이기 위해 앞으로 더 많은 일이 일어날 거야. 더 많은 던전이 터지고, 공략하기 힘든 만큼 높은 등급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과거보다 훨씬 심각한 전염병도 돌게 될 거라는 소리지.”

“……!”

“다른 문제도 있는데, 지구는 이미 한 종족이 별의 대부분을 장악한 상태라, 분쟁이 나기도 쉽고, 새로운 종족이 뿌리내리기 힘든 상태라고 할 수 있어. 동족 혐오라는 말 알지? 어느 날 강인한 힘을 가진 존재가 나타날 경우 이렇게 단일 종족만이 남은 별은 자멸할 확률이 높아져.”

“…….”

“아, 참고로 이건 지구만 그런 게 아니라 한 종족이 장악한 별이라면 대부분 이런 특성을 가지게 돼. 그 종족이 얼마나 현명하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뿐이지. 지구는 수천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98% 이상 자멸을 향해 가는 별이라, 위에서도 다른 종족의 씨앗을 더 퍼트리지 않고 있어.”

“…….”

“반면 내가 네게 권한 별은 다양한 종족이 많이 사는 곳이야. 정말 작고 먼지 같은 나약한 종족부터 시작해서 지구의 L급보다 강한 종족이 한 별에 어우러져 살고 있지. 인간도 물론 많고. 하지만 그 별의 인간들은 지구와 조금 달라. 미지를 두려워하는 건 같지만, 지레 겁먹고 배척하기보단 서로를 알아 가려 노력하고, 어떻게든 화합을 중시하려는 경향이 강해.”

“화합…….”

“그래. 화합. 그래서 그 세계에는 지구와 다르게 수많은 신도 중간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어. 물론 힘이 너무 강한 신은 본체로 강림하지 못하지만, 나나 펄처럼 작은 인형을 만들어서 함께 살아가기도 해. 그리고 그게 균형이 좋은 별이란 증거지.”

“허어…….”

순 처음 듣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그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잠시 정리하던 지수는 복잡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며 마카롱을 씹었다. 고민하며 마카롱을 세 개쯤 먹은 지수가 작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구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 별에선 우리가 후원자라고 부르는 존재들도 안식의 신 당신처럼 분신……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다른 모습으로 평범한 사람 사이에 섞여 산다는 건가요?”

“맞아. 그 힘의 차이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균형 조율이 가능한, 유연한 세계라는 거지.”

“……음, 그래요……. 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도 대놓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식의 신이 위를 흘긋 보더니 지수에게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곤 “네가 잘 아는…….” 하고 운을 뗀 순간, 파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큿!”

“……!!”

지수의 눈에도 확연히 보인 전류가 번쩍이며 안식의 신의 정수리를 스쳤다. 마치 누군가 적당히 하라는 듯이 번개 꿀밤으로 적당히 경고를 준 듯한 느낌이었다. 공기 중에 흐르는 분위기를 느낀 지수는 당황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안식의 신 정도 되는 후원자도 저렇게 혼나는구나 싶어 당황스럽기도 했고, 저도 덩달아 혼날까 봐 괜히 다소곳하게 자세를 다잡게 되었다.

“아오, 진짜……. 더럽게 치사하게 구네. 이걸 어떻게 돌려 설명하냐고! 아, 댁들도 평소에 답답해했으면서, 나한테 이러기야? 아오! 지들 일 아니라고 뻗대는 거 봐라, 저거!”

지수는 허공에 빽빽 소리 지르는 안식의 신을 보며 심란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정말 위에 있는 존재들이 무서운 게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신랄한 불평을 마구 쏟아 냈다.

“내가 뭐 심각한 정보를 흘린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제자가 얘한테……! 읍!”

쿠과과과광-! 콰앙-!!

갑자기 천둥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안식의 신이 얼굴에 개나 찰 법한 입 마개가 씌워졌다. 굉음에 기겁한 지수가 벌떡 일어나 한 걸음이라도 멀어지고자 의자 뒤에 서자, 안식의 신이 입 마개를 거칠게 뜯어내며 성질을 냈다.

“아 좀! 좀 봐 달라고! 일단 얘가 듣고 선택한 다음에, 과한 것만 골라서 지우면 될 거 아냐!”

그러자 허공에서 들리던 쿠르르릉- 우르르릉- 하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후욱, 후욱…… 에이 씨. 면 구기게. 하여간에…… 하여간에, 잘 듣고 생각해 봐.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지구에서 살지 못하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기에 내가 굳이 이런 꼴을 겪어 가며 설명하려는 것 같은지.”

“…….”

“넌 이미 내가 누군지 눈치챘지. 그렇다면 내가 날 때부터 후원자라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도 알 거야. 지금 저 위에서 내가 또 편법을 저지르지 않을까 감시하는 선배들이 있다는 건 뭐를 의미할까? 그건 바로 내게도 후배가 있을 수 있다는…….”

……쿠르르릉.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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