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2
한지수를 만난 덕분에 알게 되었다. 사랑은 한 가지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이의 곁에 반려로서 머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이젠 안다.
비록 서로의 눈을 맞추지 못하고, 손도 잡을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 사랑이 어딘가에서 행복하길 바라며 줄곧 그리워하는 것 또한 사랑의 형태 중 하나였다.
물론 한지수의 곁에서 함께할 수만 있다면 정하진은 무엇이든 할 터였다. 하지만 자신이 곁에 머무르는 것보다 한지수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루트가 있다면, 그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그러니 한지수의 곁에서 남은 생을 함께 걷는 이가 꼭 자신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정하진이 바라는 건 그저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거였다. 달리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가슴에 품었던 간절하고도 소박한 소망을 되뇌고 있자니, 눈을 감았는데도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정하진의 눈에 한지수의 가슴 위로 모여드는 작은 빛이 보였다.
빛이 모일수록 점점 둥그렇고, 조금씩 푸짐해지더니 익숙한 형태를 띠며 증발하듯 흐려졌다. 정하진은 빛이 사라진 자리에 털푸덕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털 뭉치를 향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장난스레 말했다.
“토토, 나 몰래 어딜 놀러 갔다 온 거지?”
“쮜, 쮜잇!”
눈을 몇 번 깜빡인 토토가 지금껏 놀고 온 게 아니라는 듯이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토토의 시선이 제 집사의 손을 잡은 정하진의 손으로 옮겨 갔다.
“으쮯?”
토토의 왼쪽 눈이 가늘어지더니 수염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앞발이 주먹으로 옹송그려지는 것을 본 정하진이 흠칫하며 손을 놓으려는 순간, 생략 부드러운 손이 정하진의 긴 손가락을 조심스레 잡아 왔다. 가녀린 손길에 놀란 정하진이 한지수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잠든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한지수 가이드?”
“쮜이?”
조심스레 불러 보자 한지수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이후 다른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의아함에 토토를 바라본 정하진은 토토 역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토토. 네가 한지수 가이드를 데리러 다녀온 게 아니었나?”
“쮜, 쮜잇. 쮯. 쮜이잇!”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토토가 한지수의 가슴팍에서 턱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앞발로 한지수의 턱을 야무지게 찹찹 때리기 시작했다.
“쮜! 쮜이!”
토토의 반응을 살핀 정하진은 한지수를 지켜봤다. 토토가 돌아왔을 땐 깰 기미가 보인다 싶더니 이젠 다시 푹 잠든 것 같았다. 숨이 느리고 고른 데다가 무엇보다 한지수가 ‘이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쮜, 쮜잉, 쮜이잉!”
정하진은 안절부절못하는 토토를 조심스레 집어 손바닥에 올려 두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침착하라는 의미로 차분히 규칙적으로 쓰다듬자 토토의 귀가 바짝 누웠다.
“진정해라, 토토. 후원자가 한지수 가이드에게 더 남길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쮜이…….”
정하진의 손바닥 위에 자리 잡고 엎드린 토토가 제 집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따라왔으면서, 어디서 한눈을 판 걸까. 분명 발맞춰 걸으며 잘 데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억울하고 울컥한 기분이 치민 토토는 저를 쓰다듬던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 * *
“으음……. 이상하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한지수가 주변을 둘러봤다. 토토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제 앞에 있었는데, 홀로 빛을 내며 사라지더니 지수 혼자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분명 토토를 따라가면 깰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상태 창을 불러 봐도 기본 시스템 확인만 가능할 뿐이고, 이 공간에 대한 정보는 무엇 하나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안식의 신이 접촉해 오겠지 싶어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지만, 후원자를 만날 때마다 전신을 감싸듯 맴도는 특유의 따스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요? 안식? 안식의 신? 여기 없나?”
이미 몇 번이고 불러 본 이름을 다시 언급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이럴 거면 토토를 굳이 여기까지 보내 준 이유가 뭔가 싶었다. 씰룩거리는 털 뭉치를 열심히 따라가고 있었는데, 저만 여기 남아 버렸으니 먼저 돌아간 토토가 뒤따라오지 않는 집사 때문에 걱정할 것 같아 덩달아 초조해졌다.
“어휴……. 토토가 걱정하겠는데.”
안식의 신이 듣는지 안 듣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 공간이 그가 관장하는 곳이라면 자신의 말이 전해질 거라는 믿음에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자, 지수는 조금씩 차오르는 불안을 미뤄 두며 마음을 차분히 먹으려 애썼다.
‘뭐. 생각이 있으니 붙잡아 뒀겠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탓에 주변을 훑어보던 지수는 이 우주 같은 공간이 마냥 새카만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떤 곳은 보랏빛이 짙었고, 또 다른 곳은 푸르스름한 빛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점점 남청색으로 바뀌는 곳도 있었다. 실로 다양한 색이 어우러져 안온한 어둠을 표현하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퍼져 있는, 별이 가득한 은하수에서 부드러운 빛이 쏟아지고 있어 딱히 무섭지도 않았다. 주변을 살피던 지수는 문득 계속 쏟아져 내리던 기억을 담은 유성우가 더는 보이지 않음을 눈치챘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볼까 잠시 고민하던 지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 공간의 주인을 호출해 보기로 했다.
“저기요.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요.”
누가 들을지 몰라도 일단 열심히 떠든 덕분인지 어딘가에서 기척이라 부를 만한 기운이 느껴졌다. 존재감을 드러낸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 돌린 지수는 언젠가 본 적 있는 사람을 보고 안도했다.
치렁치렁한 장신구가 가득 달린 정장을 입고, 긴 머리를 대충 묶은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만난 적이 있지만, 기억에서 억지로 지워졌던 모습을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고 조금은 신기하기도 했다. 분명히 이 사람을 만나 차도 함께 마셨었는데 그 기억을 모두 조작당해 잊고 있다가 다시 이렇게 떠올리게 되다니.
“……남의 기억을 너무 멋대로 주무르는 거 아니에요?”
불평 반, 농담 반 섞어 말하니 다가온 그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 모습이 제가 잘 아는 사람과 확연하게 겹쳐 보였다. 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떠올리게 되었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는데, 지금은 이 남자가 누군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아……. 그땐 왜 못 알아봤지?”
주어 없는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안식의 신이 피식 웃더니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못 알아보게끔 조작했으니까.”
“와, 진짜 무섭네. 또 뭘 조작했어요?”
“셀 수 없이 많은 걸 조작했지. 이 공간을 벗어나면 아마 이 대화의 대부분도 잊게 될 거야. 지금 네 깨달음도. 그러니 애써 기억하려 하지 말고. 중요한 이야기부터 나누지.”
“그래요. 왜 절 여기에 붙들어 뒀어요? 나 때문에 바쁜 거 아니었어요?”
그 물음에 안식의 신이 잠시 위를 올려다봤다. 지수 역시 그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는데, 우주 같은 공간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왜요……, 위에 뭐라도 있어요?”
“응. 내 수를 봐주는 건 여기까지니, 편법 작작 쓰라고 나를 압박하는 대선배님들이 저 위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계셔.”
“…….”
그 말에 지수는 눈을 깔았다. 안식의 신보다 더 상위 존재들이라면 밉보여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다소곳한 자세로 서자 그가 소리 내 피식 웃는다.
“그렇게 각 잡을 거 없고. 일단 앉지.”
안식의 신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지난번처럼 허공에 의자와 테이블이 생겼다. 테이블 위엔 먼저 가졌던 티타임 때처럼 온갖 다과와 찻주전자가 있었는데,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찻잔이 세 개. 의자도 세 개라는 거였다.
“……누가 또 와요?”
“곧. 먼저 앉아.”
의자에 앉은 지수는 빈자리에 앉을 이가 누굴지 궁금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혹시……, 혹시……. 간절한 마음으로 단 하나의 후보를 추리고 있을 때, 주전자가 동동 허공에 떠오르더니 알아서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눈이 아주 반짝반짝한데, 아쉽게도 네가 기대하는 녀석은 아니니까 헛물켜지 말고.”
실망할 게 뻔히 보여 배려 차원에서 해 준 말인데도 제가 원하던 이가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자 입술이 삐죽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순식간에 뚱해진 지수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은 안식의 신이 피식 웃었다.
“원래 이 대화는 조금 더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아까 네가 봤던 행성 머리가 괜한 짓을 하는 바람에 윗분들께 들켜 버려서…….”
“아, 음……. 그분 괜찮으신 거 맞죠?”
제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져 사라진 이가 조금 신경 쓰였던 차였다. 그러나 안식의 신은 그 정도면 손톱 끝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조금 갈라진 수준이니 괜찮다며 외려 혀를 찼다.
“하여간에 행성 머리가 만든 찌꺼기가 부서지는 바람에 이쪽으로 시선이 쏠렸어. 그래서 내 편법 중 하나가 까발려졌고.”
“……편법이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