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32화 (132/172)

#132.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 1

강재윤이 한지수의 행방을 물은 순간 희망을 노래하던 목소리는 끊기고 침묵이 가라앉은 틈 사이로 비탄과 절망이 빠르게 번졌다. 인류가 구원받지 못할 것을 강하게 예감한 찰나, 서넛 정도 되는 소수의 각성자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허공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각자 후원자에게 구제 대상으로 선택받은 이들이었다. 후원자로부터 온 메시지를 읽은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강재윤의 눈치를 살폈다. 강재윤은 그런 이들의 반응과 정하진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했다. 그리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들은…… 다 알고 있었어?”

누구에게 건네는 질문인지 몰라도, 명백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분노라는 단어 하나론 표현이 부족할 만큼 깊은 감정의 파동이 묻어나는 음울한 읊조림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정하율은 저도 모르게 정하영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벌벌 떨기 시작했고, 정하영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정하진을 바라봤다.

제 동생들을 본 정하진은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강재윤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그러려 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이들을 살려 달라고 삶을 구걸하려 했으나 분노한 조율자를 앞에 두고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와 강한 허탈감이 모두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기운을 갈무리한 강재윤이 몰려든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눈길을 주며 물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쉬운 질문을 할 건데, 정직하게 대답해야 할 겁니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잔뜩 겁에 질려 호흡할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숨을 뱉는 사람과 공포에 질려 주저앉아서도 조율자를 감히 보지도 못하고 고개 숙인 사람도 많았다.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무감한 눈으로 훑은 강재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수, 가이드 한지수는 어디에 있나요?”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강재윤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한지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지끈-

제 인생에 가장 두려웠던 순간 중 하나를 떠올리자 골이 욱신거렸다.

누구나 그렇듯 정하진 역시 살면서 많은 일을 후회하고, 과거로 돌아가 돌이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란 일이 많았다. 하지만, 조율자로 강림한 강재윤과 조우한 순간만큼 뼈저리게 후회했던 날은 없었다.

정하진은 그날 이후 모든 날 동안 같은 생각을 곱씹으며 후회했다.

만약 그가 오래전 남몰래 저를 찾아오던 어린 청년을 보듬어 주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도록 이끌고, 꾸준히 가르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과 가치가 뭔지 알려 주고자 노력했다면…….

그때 자기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일어났다 하더라도 조금은 다른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극심한 피로감을 느낀 정하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병실은 여전히 고요했다. 정하율은 소파에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색색 잠든 그대로였고, 토토 역시 한지수의 곁에……,

“……토토?”

없었다.

토토가 없어졌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정하진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얌전히 한지수 곁에 찰싹 붙어 잠들어 있어야 할 털 뭉치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 병실을 둘러보고 협탁 서랍도 열어 보고, 침대 밑도 확인했지만, 그 어디에도 토토는 보이지 않았다.

“…….”

정하진은 침착하게 주변 기운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덩치는 작아도 누구보다 또렷했던 특유의 기척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후원자가 부른 건가……?’

토토가 사라지려고 부스럭거렸다면 제가 못 느꼈을 리 없었다. 그러니 토토가 아무런 기척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면 후원자가 부른 탓일 터였다. 가까스로 상황을 유추한 정하진이 차분하게 토토가 누워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푸짐한 털 뭉치가 누웠던 자리엔 둥그스름하게 눌린 시트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가져가 대보자 아직 온기가 느껴졌다.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기척도 내지 않고 증발한 걸 보니 예상대로 후원자의 부름으로 사라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의아했다. 후원자는 보통 그 대상의 ‘의식’을 소환했다. 이렇게 육체까지 전부 소환하는 일은 제가 알기론 없었다.

단 한 번. 피후견인 구제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아…….”

피후견인 구제.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속이 더 꾹꾹 쑤셨다. 정하진은 과거에 겪었던 끔찍한 미래를 떨치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피로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자연스레 토토가 있던 빈자리로 시선이 갔다.

토토가 사라졌다고 이리 놀라 심장이 뛰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토토에게 꽤 정을 주고 나름대로 의지했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털 뭉치가 잠시 자리 비웠을 뿐인데, 그 빈자리가 느껴질 만큼 허전했다.

‘토토 너도 고생이군.’

아마 저와 토토 말고도 안식의 신이 심어 둔 또 다른 존재가 모두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하진은 다시 잠든 지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토토를 굳이 데려간 걸 보면 지수가 곧 깨어날 것 같았다. 평화로운 그의 얼굴을 보다 보니 좀 전의 걱정이 잊지 말라는 듯 불쑥 솟았다. 후원자에게 불려 간 한지수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보고 있을지 몰라 괜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뭔가 알게 되었다는 거였다. 던전에서 의식을 잃기 전 자신을 부른 호칭도 그렇고, 두서없이 뱉었던 말을 곱씹어 보면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한지수가 깨어났을 때, 만약 그가 직접 겪어 본 적 없는 과거와 미래를 알아냈고, 그에 따른 진실을 묻는다면 애석하게도 정하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도 큰 제약이 걸려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피해를 감안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꼭 해 주고픈 말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당신은 그저 너무 성실하고, 남 탓을 할 줄 모를 만큼 착하고, 너무 쉽게 용서하는 다정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다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이는 제 곁에 없었다.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린 제 속을 다시 헤집는 현실은 슬픔보다도 아픔이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온갖 서러움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혼자 청승 떠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고,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운동이라도 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어려워 그저 한지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둑한 조명이 내려앉은 고요한 병실에서 사색에 잠겨 있으니, 문득 안식의 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모든 걸 다 희생하고 헌신해도 그 마음은 보답받지 못할 거야.’

안다.

‘사랑했던 사람을 그저 지켜만 보다가 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건 네게 있어 꽤 힘든 일이 될 거고.’

그것 역시 안다.

‘그래도 할 수 있다고 자신해? 정말 실패하지 않을 수 있어?’

정하진에게 있어 한지수는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마 넌 두 가지를 이루고자 노력하겠지. 하지만 네가 바라는 것 중 하나는 이뤄지지 않을 확률이 커. 그러니 큰 그림에만 집중해.’

정하진은 굳이 그 말을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안식의 신의 예상은 틀렸다. 정하진이 바라는 미래는 한지수와 예전처럼 다시 사랑을 나누고, 행복을 속삭이는 일이 아니었다. 정하진은 잠든 한지수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곤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맴돌던 가이딩이 제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안식의 신,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던전 입구를 지키던 에스퍼의 몸에 설치된 캠에 녹화된 한지수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렸다. 평소 힘없이 울던 모습, 울다 울다 기어이 눈물이 말라 버린 후엔 공허한 눈으로 창가에 앉아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퀭한 모습, 그렇게 힘들면서도 착실하게 매일매일 가이딩을 해 주던 성실함. 그의 모습은 지금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제 어깨에 기대앉으면 보이는 둥근 정수리는 언제나 잔머리가 한두 가닥 서 있었고, 카페에 가면 늘 창가 구석 자리를 선호했다. 추운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미지근한 물을 억지로 먹일 때는 얼굴을 구기며 혀를 내밀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입맞춤의 의사를 물었을 때 놀라 동그랗게 뜬 눈은 정말 어여뻤다.

한밤중에 공원을 산책할 땐 이유는 모르겠지만 늘 높은 턱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싶어 했었다. 손을 잡고 지탱해 주니 비틀거리면서도 즐겁게 걷던 천진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맞잡은 손바닥 사이에 맴돌던 간질간질한 장난스러운 가이딩이 덩달아 떠올랐다. 발을 헛디뎌 제 품에 떨어질 때 와락 끌어안으면 품 안에서 환하게 웃던 모습은 손바닥을 간질이는 기억의 부록처럼 따라왔다.

그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건지, 눈가가 시큰거리며 아프다 못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한지수가 제게 웃어 줄 땐 바람에서 싱그러운 향기가 나는 것 같았고, 가슴부터 전신으로 따스함이 번지곤 했다.

분명 똑같은 밤하늘을 보고 있어도 한지수의 밤하늘엔 별만 가득했지만, 정하진의 밤하늘엔 알록달록 아름다운 불꽃이 펑펑 터지고 있었다.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세상이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하겠지.

아팠던 기억, 슬펐던 기억, 고통스러웠던 기억, 사랑이 충만했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멋대로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그 모든 기억을 죽을 때까지 홀로 끌어안고 살아갈 생각이었다.

‘내가 한지수 당신에게 바라는 건 하나야.’

한지수가 홀로 던전에 입장하던 모습이 또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정하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한지수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다시금 각오를 다짐했다.

‘난 당신에게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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