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31화 (131/172)

#131.

조우 8

“아…….”

기억 저편에 묻어 둔 추억, 상처, 고통, 슬픔, 분노 그 모든 것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한지수의 뇌를 잠식했다.

여러 고명한 정신계 에스퍼가 힘을 합쳐 최대한 뇌에 무리 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봉인한 기억이었다. 대상이 어떻게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의식 저편으로 겨우겨우 몰아 넣고 힘겹게 잠가 두었던, 생명력을 좀먹는 우울함의 결정체가 터진 댐처럼 한순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지수가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하자, 꽃을 나눠 주던 이들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그중 한 명은 확신과 기쁨이 가득 찬 얼굴로 다가와 한지수를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한지수 가이드 맞죠?”

심지어 그들은 한지수가 주저앉아 머리를 붙잡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인터넷에 생중계하며 킬킬댔다. 드디어 진짜 한지수를 찾았다며, 여기에 비겁하게 숨어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며 그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여러분, 이게 혼자만 편해지려고 받는 기억 삭제 스킬의 부작용입니다. 스킬이 해제되면 이렇게 길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괴로워해요. 그러니 정신계 스킬 받을 땐 꼭 조심하셔야 해요, 아셨죠?”

깐족거리며 멘트를 떠드는 이도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오열하는 한지수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낄낄대며 즐거워하는 이도 있었다. 도대체 그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왜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건지, 이렇게 해서 그들이 얻는 게 대체 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내내 봉인해 두었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한지수는 결코 괜찮아질 수 없었다.

이후 정신계 에스퍼들이 다시 한지수의 기억을 봉인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터져 버려 너덜너덜해진 상처로 가득한 정신을 후유증 없이 봉합하는 건 불가능했다. 슬픔을 흘려보내는 법을 잃어버린 한지수는 그 모든 절망을 끌어안고 소멸 직전 던전에 입장해 외로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저 날로부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지구에 2차 대격변이 일어났다.

1차 대격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등급 측정 불가 괴물이 허공을 찢고 나타났다. 새롭게 출현한 괴물은 현존하는 각성자만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져서 모두가 그 괴물을 ‘재앙’이라 불렀다.

재앙이 나타날 때마다 비각성자와 동물은 물론이고 수많은 각성자가 파리처럼 목숨을 잃었다. 다시 찾아온 인류의 절멸 위기였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각성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지구에 피후견인을 둔 후원자들이 귀띔해 주고, 격려해 준 것처럼 곧 그들을 구원해 줄 ‘조율자’가 이 땅에 강림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악착같이 버티고, 또 버텼다.

“조금만 더 버텨! 재앙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지 못해! 그러니 재앙을 공격하지 말고, 사람들이 최대한 멀리 도망치도록 도와!”

“재앙이 없는 곳으로 도망쳐! 안 보이게 숨어! 최대한 멀리 도망가며 버텨!”

“힘닿는 대로 달려요!”

“계속 이동해야 살아요! 도망치세요! 곧 조율자가 강림할 거예요!”

“후원자가 조율자는 오직 지구를 구하기 위해 긴 세월 힘을 쌓은 존재라고 했어! 그러니 다들 희망을 잃지 마!!!”

사람들은 아직 이 땅에 강림하지 않은 조율자를 찬양하고, 오직 지구를 구하기 위해 다른 세계의 시간으로 2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힘을 키웠다는 존재의 강림을 기원했다.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버티던 정하진 역시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의아했다. 제 후원자들은 다른 이들의 후원자와 달리 조율자가 곧 지구를 구원해 줄 거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정하진은 그들이 워낙 바쁜 후원자들이라 그럴 거라 여겼다.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어도 애써 외면하며 최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동생과 사람들을 챙겼다.

신출귀몰하는 재앙을 피해 힘겨운 피난이 이어졌다. 재앙은 인류를 노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치 이 별을 멸망시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무자비한 재앙 아래 인류는 마지막 피난처에서도 쫓겨나 벼랑 끝으로 몰렸다. 이번에야말로 인류는 절멸하게 될 거라는 절망이 굳어지려던 찰나, 후원자들이 말했던 ‘조율자’가 드디어 이 땅에 강림했다.

모습을 드러낸 조율자는 눈부실 만큼 찬란한 존재였다. 후원자에게서 희미하게 느꼈던 자애로움이 강하게 뿜어져 나와 온몸이 빛에 휩싸여 있는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웠으며, 무의식중에 경배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정하진을 비롯한 SS급 에스퍼조차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했던 재앙을 홀로 제압했으면서도 그 어떤 힘도 쓰지 않은 것처럼 여유로운 조율자의 모습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후원자들이 말했던 조율자가 강림했다며 기뻐하고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조율자의 얼굴을 알아본 정하진은 다른 이들처럼 환호하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저 얼굴을 알아본 순간, 정하진은 알게 되었다. 제 후원자들이 다른 후원자와 달리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이유를.

정하진은 저 조율자가 소문처럼 오직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이백여 년의 시간 동안 힘을 키웠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을 환호하게 만든 저 눈부신 존재, 이토록 아름답고 강한 절대적인 존재는 유감스럽게도 지구를 구하기 위해 그 오랜 세월을 버틸 이가 아니었다.

지구의 존속보다 오직 한 사람과의 조우를 그리며 이백여 년의 시간을 견뎠을 존재. 그 하나의 바람만을 그리며 긴 세월을 눈물로 버텼을 존재임이 분명했기에,

“아…….”

정하진은 미래를 그리며 희망을 노래하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끝을 예감하고 절망했다.

조율자는 긴 세월 가슴에 묻어 두었던 단 하나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인류는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 별엔 조율자가 찾는 빛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저들에게 닥칠 미래를 깨달은 순간,

띠링-

[안식의 신으로부터 다이렉트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ㅅㅜ락

오타가 섞인 짧은 메시지.

대체 무엇을 수락하라는 것일까.

혼란한 마음에 정하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바로 근처에 있던 김현아 역시 메시지를 받은 듯이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둘 다 안식의 신의 피후견인이라 같은 메시지를 받은 것 같았다.

정하진은 반사적으로 정하영을 확인했지만, 제 동생에게선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급한 대로 김현아와 서로 받은 메시지의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려는 찰나, 이번엔 안식의 신이 아닌 다른 후원자가 보낸 긴급 메시지가 도착했다.

띠링-

[푸른 달의 신이 당신을 1차 구제 대상으로 지정했습니다.]

* * *

이 메시지는 일방 제약(조항 수정 불가)이 적용된 메시지입니다.

지구 행성 구제 실패 확률 98.73%로 관측되어 피후견인 구제를 제안합니다.

구제 수락 즉시 후원자가 지정한 가장 가까운 소행성 ‘필리스’로 육체와 정신이 모두 전송됩니다.

수락 시 다시는 지구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구제 제안은 양도할 수 없습니다.

1차 구제 대상자가 구제 거절할 경우 즉시 구제 대상 자격이 박탈되며, 2차 대상자에게 구제 자격이 주어집니다.

1차 구제 대상자는 2차 구제 대상자를 알 수 없습니다.

2차 구제 대상자는 1차 대상자가 거절할 때까지 자신이 구제 대상자인 것을 알 수 없습니다.

* * *

[수락 / 거부] - 남은 시간 00:29:59

내용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어려웠다. 아니,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후원자가 제안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정하영은 아무런 메시지도 받지 못한 듯이 보였다. 애초에 각성자가 아닌 정하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 김현아가 근처에 있던 자신의 부모님이자 평화 길드의 길드장, 부길드장에게 다가가 애써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두 분 혹시 후원자한테 메시지 새로 받으신 거 있어요?”

두 사람 모두 없다는 말을 들은 김현아는 알았다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부모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일단 어디 가지 말고……, 아니. 두 분 모두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조용히 정하진과 김현아의 반응을 지켜본 정하영이 정하율을 업은 채 불안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동생에게 정하진은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후원자에게 뭐 메시지 온 거 없어?”

“…….”

그 물음에 정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절망의 연속이었다. 정하진은 저도 모르게 정하영의 어깨를 잡은 정하율의 손을 감싸며 침음했다.

“……하율아…….”

“형?”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정하진의 모습에 정하율의 눈빛 역시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그때, 주변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시야가 점차 밝아지는 것만으로도 정하진은 누가 다가왔는지 알 것 같아서 더 절망스러웠다.

“조율자가……!”

“헉, 저 얼굴은……!!”

“조, 조율자…… 조율자가…… 우와아악! 강재윤 에스퍼! 강재윤 에스퍼어어억!”

“으아아아! 강재윤 에스퍼가 돌아왔다! 강재윤 에스퍼가 왔어! 그가 돌아왔어!”

“강재윤 에스퍼어어!”

그를 알아본 이들이 벌 떼처럼 우르르 달려갔다. 땅에 내려선 조율자 강재윤은 자애로운 미소를 유지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김현아를 먼저 발견하곤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고, 다음으로 정하진과 정하영 그리고 정하율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정하영과는 김현아와 마찬가지로 눈인사를 했지만, 정하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강재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정하진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강재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윤의 시선을 따라 세상에 나타나선 안 될 악마를 마주한 것 같은 하진의 얼굴을 본 이들은 정하진이 많이 놀라서 그런 것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들은 모두 희망에 차 있었다. 조율자가 강재윤이라니. 그가 이토록 강한 힘을 각성해 돌아왔다니, 우린 모두 살았다며 섣부른 희망을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재윤만큼은 정하진의 저 얼굴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눈치챈 듯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물었다.

“지수는?”

“…….”

작은 목소리였지만, 청력이 뛰어난 에스퍼들은 강재윤의 질문을 선명히 들었다. 모두가 놀라 헛숨을 삼키거나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반응만 보더라도 답을 알 수 있었지만, 강재윤은 재차 물었다.

“지수는 어디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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