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30화 (130/172)

#130.

조우 7

그의 실종 소식을 들은 날부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무거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이따금 그가 불쑥 생각나곤 했다. 남들과 다른 힘이 있다는 이유로 모두를 지키려 했던 남자이자 제 그룹에 속한 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막중한 부담감 때문에 늘 지쳐 보이면서도, 아이들에게만큼은 웃으며 다가갔던 청년이.

겉으론 ‘난 지수만 있으면 돼요.’, ‘여차하면 지수만 데리고 튈 건데요.’, ‘지수가 저 사람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으니까 겸사겸사 같이 지켜 주는 거죠.’ 툴툴대곤 했지만, 나름대로 정을 주고, 그들이 잘못되면 자책하기도 하던 강재윤을 떠올리고 있자니, 자연스레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우리 지수 좀 지켜 주세요. 지수는…… 지수는 내가 없으면 진짜 혼자가 되거든요……. ’

하필 저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 순간, 평화 길드에서 강재윤의 실질적 사망 처리를 발표하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한지수 가이드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악성 댓글, 스토킹 등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뉴스도 함께.

정하진은 정하영과 함께 강재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보다 더 거슬리는 건, 한지수를 향해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비난을 듣는 한지수는 무슨 말을 듣는 건지도 모른다는 듯이, 그저 멍하니 구석에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당시 한지수는 단순히 지쳤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였다. 눈엔 초점이 없었고, 어떻게 앉은 자세를 유지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퍼석한 상태였다. 하다못해 언데드 몬스터가 저 사람보단 생기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화 길드에서 시선을 피해 쉴 수 있도록 다른 곳으로 보내려 했지만, 한지수는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켰다. 상주로서 조문객을 맞이하는 일까진 못해도, 여길 지키는 게 제 할 일이라는 듯이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모두가 한지수에게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정하진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꽃을 헌화하고, 그를 위해 진심을 담아 향하는 이 없는 기도를 올렸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청년이 부디 영원한 안식을 얻고, 그 안식 속에서 평안하길 바라면서.

“야. 한지수 가이드 소식 들었어?”

“아니. 무슨 일 있어?”

한지수. 근래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두들겨 패는 이름 석 자였다. 대격변 이후 인터넷을 전혀 하지 않는 정하진도 알 정도로 여러 매체에서 한지수를 까고, 까고 또 깠다. 심지어 공중파 언론마저 이런 사태를 다루며 한지수를 향한 공격을 멈추게 하기보다 기름을 부어 대고 자극적인 방송을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신경 쓰이던 차, 정하영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온 걸 보니 새삼 심각한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정하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최악의 소식을 들을 준비를 했다. 정하영은 짜증 가득한 어조로 한지수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피로 누적으로 쓰러졌다고 발표하긴 했는데,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입원 중이래. 현아가 진짜 열받았어. 사람도 새로 구하더라.”

“어떤 사람?”

“한지수 가이드 옆에 붙여 둘 가드. 한지수 가이드가 현아한테 제법 중요한 사람이잖아. 어중이떠중이 말고 제대로 지켜 줄 만한 사람을 구하더라고. 난 네가 했으면 좋겠는데, 어때?”

“…….”

“너 어차피 지금 백수잖아. 당분간 프리 일 쉬고 저 사람 곁에 있어 줘. 그럼 네 마음도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

“……내 마음이, 뭐? 난 지금 편한데?”

정하영의 제안은 정하진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하영은 태연하게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너 저 사람 신경 쓰고 있잖아. 아니, 강재윤을 신경 쓴다고 해야 하나? 둘이 나름 친한 거 아니었어?”

“……!!”

“뭘 놀라? 네가 매번 수상하게 빠져나가는데, 그 녀석이랑 만나는 거 보고 그냥 뭔가 있나 보다 하고 묻지 않았을 뿐이야.”

정하영과 잠시 눈을 맞춘 정하진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친하진 않았어.”

“……네 성격에 퍽이나 정 안 줬겠다. 분명 정도 주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아껴 줬겠지. 그러다 뭐 때문인진 몰라도 걔한테 멘탈 다 털리고 털레털레 돌아온 거 내가 모를까 봐?”

“…….”

나름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정하영은 여러 면에서 저보다 나았다. 살면서 정하영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 없었던 정하진은 진지하게 고려했다. 제 쌍둥이 말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신경 쓰였다. 차라리 소식이 들리지 않으면 몰라도 온갖 곳에서 그를 쉬지 않고 매도하는 터라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내가 무서운 건 죽는 게 아니에요. 내가 죽고 나서…… 혼자 남겨진 지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그게 너무 무서워…….’

“…….”

고민은 짧고, 결심과 행동은 빨랐다.

* * *

정하진은 한지수의 가드이자 페어 에스퍼가 되길 자처했다. 한지수는 처음엔 그런 정하진을 쉽게 곁에 두지 못했지만, 적어도 밀어내진 않았다. 아니, 누군가를 밀어낼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정하진이라는 사람을 거절하지 못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정하진은 묵묵히 한지수의 곁을 지켰다. 그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으며, 한지수가 원하는 거라면 그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뭐든 해 주려 노력했다. 굳이 제 노력을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한지수는 사람의 노력을 외면할 만큼 무심한 성격이 못 됐다.

처음엔 그저 하루하루 버티던 한지수도 어느덧 정하진을 보며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다정다감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밴 성격이다 보니, 힘든 와중에도 자신을 배려하는 정하진을 위해 조금씩 기운을 차리며 그가 건네는 말에 짧게나마 대꾸하는 일이 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꽤 긴 시간을 함께하며 조금씩 천천히 가까워졌다. 처음엔 모종의 책임감과 마음에 남겨진 부채감으로 한지수의 가드를 자처했던 정하진은 그와 함께 보내는 나날이 조금씩 순수한 즐거움과 행복으로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은 함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정신적으로 많이 취약해진 한지수를 치료하기 위해 현대 의학과 정신계 에스퍼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시도했다. 그 과정 동안 정하진은 묵묵히 한지수의 곁을 지켰다. 다행스럽게도 한지수는 천천히,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던 중 병원 관계자의 정보 유출로 한지수가 기억 삭제 스킬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너 혼자 다 잊고 편해지려 하는 거냐며 한지수를 또 과도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스킬 덕분에 한지수는 슬퍼하지 않았지만 의아해했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나를 맹목적으로 미워하는 걸까? 객관적인 시각으로 궁금해하고,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지수에게 걸려 있는 암시 스킬에도 영향이 생겼다. 결국 정하진은 동생 정하율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한지수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안정적이었다. 정하진은 한지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한지수 역시 그러했다. 이때부터 정하진의 인생은 본격적으로 동생 정하율과 한지수 중심으로 돌아갔다.

동생이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정하진은 이를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언젠간 동생이 다시 눈뜰 것을 믿고, 한지수와 함께 동생을 기다리며 두 사람의 추억을 쌓았다.

우린 앞으로 더 괜찮아질 거라고.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방심한 탓일까. 인간의 선한 면을 믿었던 정하진은 이번에도 자신의 믿음을 후회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한지수를 비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종합해 보면 ‘이유 없음’, ‘목적 없음’에 가까웠다. 그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물어뜯을 대상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도, 마치 그게 자기들의 사명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타인을 공격해 댔다.

뉴욕에서 지내는 동안 정하진은 늘 그렇듯 미국형 파파라치에게 꽤 시달렸다. 문제는 그중 몇몇은 정하진보다 한지수를 찾아내기 위해 파파라치인 척하며 그를 스토킹했다는 거였다.

정하진은 인간이 이렇게까지 악의적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어느 정도는 예상도 했었다. 하지만 정하진은 자기가 그들의 맹목적인 악의로부터 지수를 충분히 방어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 오만은 한지수가 변신 아이템을 사용해 공원을 산책하러 나간 어느 날,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다. 파파라치 행세를 하며 수개월 동안 지독하게 스토킹하던 무리가 마침내 정하진의 거처를 알아내자 변신 아이템을 감지하는 장치를 사용해 한지수로 추정되는 이들 모두에게 어떤 ‘선물’을 뿌렸던 것이다.

“저기요, 무료 꽃 받아 가세요. 선물이에요.”

“저희가 이번에 새로 개량한 꽃이거든요. 마음이 편해지는 주문이 걸려 있어요.”

“90초밖에 못 쓰지만 예쁜 꽃 받아 가세요~!”

예쁜 수정으로 만든 꽃을 나눠 주던 젊은이들을 본 한지수는 경계했지만, 해사하게 웃으며 무료로 나눠 드리는 선물이라는 선량한 말씨에 속아 아이템을 받았다. 투명한 유리처럼 예쁘게 반짝이는 수정꽃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한지수가 그 아름다운 꽃을 어루만진 순간.

[대상에게 적용된 모든 정신계 스킬이 일시적으로 해제됩니다. 지속 시간 9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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