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조우 6
정하진도 나름대로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애석하게도 재윤을 자기 방식대로 이끌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제 나름대로 생존 방식을 확립한 채였다. 그동안 겪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간 불신이 심각했으며,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려는 자들에게 자비가 없었다.
자신이 세운 도덕적 잣대에 반하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면 대화로 교화를 시도하기보단 즉결 처분을 주장했는데, 그럴 때마다 재윤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을 종종 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말 역시. 그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선택까지 책임져야 그룹 생존에 더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정하진은 재윤의 비틀어진 정신머리를 어떻게든 고쳐 보려 했다. 단순하게 네가 가진 힘으로 걸리적거리는 걸 다 죽이기만 할 거냐고. 방해물을 제거하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겠냐 묻기도 했고, 너보다 더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땐 어쩔 거냐며 회유하기도 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재윤의 방식처럼 정하진이 그를 힘으로 찍어 눌러 보기도 했다. 어떤 작용인지 몰라도 정하진이 그보다 강한 것이 사실이었으므로. 그를 억압한 상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네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을 때, 재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당신이 내 사람들까지 데려가서 잘 돌봐 주겠죠.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정하진은 이 남자가 왜 자꾸 제게 혼자 접근하는지, 왜 제 그룹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벌리고, 그들에 관해 알려 주는지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내가 보험이다……, 이겁니까?”
“보험이라기보단 일방적으로 제가 부담을 주는 거겠죠?”
“…….”
“내게 문제가 생기면 난 지금까지 만나 본 인간 중 가장 강한 당신에게 사람들을 맡기고 안심할 수 있을 거고. 당신도 평범한 사람들이 나 같은 인간과 지내는 것보다 본인과 지내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
“있잖아요. 그렇게 안 들리겠지만, 이거 부탁 맞아요. 당신처럼…… 나보다 강한 사람이 더 많이 생길지도 몰라요. 그럼 나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고.”
“…….”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우리 지수 좀 지켜 주세요. 지수는…… 지수는 내가 없으면 진짜 혼자가 되거든요……. 뭐, 겸사겸사 다른 사람들도 같이 데려가 주면 더 좋고.”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참고로 당신의 극단적인 방식만 바꿔도 적을 덜 만들게 될 겁니다. 아군이 많이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지도……. 하지만 애초에 우린 각자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죠. 난 당신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금 힘들게 돌아가는 길이더라도 당신 사상이 올바르고 이상적이라는 것도 알아. 그게 이 망해 가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 만하게 바꿀 수 있다는 것도.”
“그걸 알면서 당신은 왜…….”
“나도 당신처럼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라 자만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선택은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치명적인 실패가 되어 돌아왔어요. 내가 쓰레기에게 베푼 동정과 아량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치고 겪지 않아도 될 끔찍한 일을 겪었어. 내가 단호하게 처리했으면 그런 일 겪지 않아도 됐었겠지.”
“…….”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것들은 명백하게 내 잘못이었어요. 한 번이 아니고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으니까. 그럴 때마다…… 남은 피해자들을 수습하고 우리 그룹으로 데려올 때마다 난 사과도 하지 못했어……. 내가 그 새끼들이 용서 비는 걸 믿고 살려 두지만 않았어도…… 그냥 그때 죽여 버렸으면 당신들에게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고백하지도 못했어…….”
짧은 침묵 끝에 재윤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지금도 내가 자기들 구원자라고 여겨. 내가 개같이 멍청하게 굴어서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고…… 내 등신 같은 선택 때문에 아직도 매일 밤 자다가 비명 지르며 일어나게 된 건데…….”
재윤의 눈빛은 지독하리만큼 담담하면서, 한편으론 슬퍼 보였다. 정하진은 과거 그가 희망을 꿈꾸며 베푼 아량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자세히 듣진 못했으나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선 그런 일도, 아닌 일도 모두 빈번했으니까.
이 남자는 단지 저런 안 좋은 우연을 자주, 많이 겪었을 뿐이겠지. 그게 속에 쌓이고 쌓여 이 남자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으리라. 지나간 시간이 오로지 흉터로만 남은 남자의 현실이 그저 안타까웠다. 정하진은 이 남자가 왜 이리 극단적으로 구는지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했다.
그걸 알기에, 섣부르게 그를 설득하는 대신 시간을 두고 조금씩 바꿔 보고자 결심했다. 재윤과 반대로 정하진은 사람은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자기 잘못을 인지하고 있다면,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정하진은 재윤이라는 남자를 정말 바꾸고자 했다면, 철저하게 가르쳤어야 했다고 크게 후회했다. 정하진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 참극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정하진이 제 그룹 사람들 문제에 집중하던 어느 날이었다. 재윤은 단신으로 중형 마트 건물을 점거하고 지내는 대형 그룹 하나를 몰살시켰다. 약탈을 일삼는 세력이었으나, 그 안엔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버티는 약자들도 있었다.
재윤이 먼저 약탈을 일삼는 그룹의 존재를 언급했을 때, 정하진은 같이 날을 잡고 그 안에 있는 약자들을 먼저 구조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들은 힘이 없어 강자들에게 제 의견 하나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버티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 불쌍한 사람들부터 안전하게 구하고 나서 네 마음대로 날뛰라고 말이다.
당시 재윤은 못마땅해했지만 이내 그 의견에 동의하듯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하진은 재윤이 조금씩 제 의견을 들어 준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나중에 날을 제대로 잡아 구조 계획을 세워 보자고 했다.
그리고 정하진의 이 안일한 판단은 전원 멸살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참혹한 현장을 본 정하진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그답지 않게 격분해 물었을 때. 재윤은 괴로워 보이는 눈빛과 벌벌 떨리는 손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울부짖었다.
“지금 같은 세상에, 남을 짓밟고 빼앗아 도둑질한 것으로 자기들이 배부르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들은 약자라도 살려 둬선 안 돼! 동정의 대가가 어떤지 당신도 겪어 봐서 잘 안다며! 그런데도 또 쓸데없이 희망을 걸어서 무고한 희생자가 나올 만한 일을 택하겠다는 거야!?”
“…….”
정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주장에 말문이 막혀서가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해도 이 남자를 교화하긴 어렵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막한 벽에 부딪힌 느낌에 모든 의욕이 상실됨과 동시에 극심한 피로와 좌절이 밀려왔다.
정하진의 눈빛을 본 재윤은 나라고 처음부터 이랬을 줄 아냐고, 내가 당신처럼 그런 사람들을 안 주워 봤을 것 같냐고.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아냐고 울분을 토하듯 흐느꼈다.
그런 인간들은 처음엔 반성하고 자기들이 저지른 짓에 괴로워할지언정, 또 배가 고파지면 남의 것을 빼앗는다. 피해자에게 죄책감을 느껴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기 피는 보기 싫어서 남의 피를 보는 게 ‘저런 인간’들이다.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를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정당화하고, 남의 피와 살로 삶을 연명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런 방식으로나마 자신의 생존에 감사하는 이들은 절대로 교화할 수 없다는 게 재윤의 의견이었다.
정하진은 규칙을 유지하기 위해 ‘오염’된 사람들을 처리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재윤을 더는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 희생의 기준을 재단하는 게 너 자신이라면 그건 오만함일 뿐이라는 것도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하진은 앞으론 이곳에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채 남들 몰래 둘이 접선하던 장소에서 떠났다. 양쪽 그룹 모르게 인연을 이어 왔던 둘 사이는 이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로도 몇 번 재윤이 정하진 그룹 주변을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정하진은 재윤의 기척을 무시하고 만나 주지 않았다. 아직 앳되기에 교육의 기회가 있으리라 착각했던 청년을 볼 때마다 치미는 분노와 허탈감, 강한 연민이 동시에 휘몰아쳐서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심 그가 자기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매번 당신, 당신 하며 꼬박꼬박 건방지게 툴툴대는 것 같아도, 이런 시대에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형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도.
그렇기에 더욱 심란했다. 그리고 그가 저지르는 짓을 진심으로 막고자 한다면 유혈사태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결국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과한 중책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피로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이 앳된 남자에게 벌써 정이 들어 버린 탓이었다.
그렇게 둘만의 인연은 끊어졌다.
약간의 세월이 지났다.
그 오랜 시간, 벙커에 숨어 있던 이들이 땅 위로 나와 정부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기 시작하자, 생존자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올바르게 돌아가게끔 만들기 위해 각자가 노력하는 시간도 쏜살같이 흘렀다. 그렇게 겨우 문명을 되찾아가기 시작한 시기.
정하진은 ‘재윤’의 맨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그를 알아봤다. 그리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내심 굉장히 놀랐다. 그가 동생 정하율이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리다는 거였다.
각성자끼리 공식적으로 처음 모인 자리에서 강재윤은 정하진을 모른 척했고, 정하진 역시 그를 모른 척했다. 이미 서로를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둘은 초면인 것처럼 굴었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 했다.
정하진은 이거로 됐다고 여겼다. 세상이 다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때 있었던 일은 가슴에 묻고 지내면 된다고. 자기가 신경 쓸 일은 얼마 전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게 된 동생 정하율을 보살피는 일뿐이라고 말이다.
동생 정하율을 치료할 방법을 찾고, 동생이 깨어났을 때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세상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제 할 일이라 여기고, 제게 주어진 시간을 오직 동생과 세상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정하진은 강재윤이 던전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