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조우 4
생존자들을 건물에 붙어 있는 작은 창고로 옮겨 간호하던 정하진은 마음이 복잡했다.
패딩 입은 남자는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어떤 면은 또 지극히 평범했다. 크게 다쳐 의식 잃은 이 남자를 너무 걱정하느라 손을 벌벌 떨어 댔던 거다. 그리곤 흔들리는 눈동자로는 연신 쓰러진 남자의 상태를 훑으면서도, 그는 정하진에게 부탁했다. 제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잠시 봐 달라고 말이다.
정하진은 이 남자가 혼자 의사를 데리러 다녀오는 이유를 곧장 알 수 있었다. 다른 그룹에 비해 신기할 정도로 약자가 많은 그룹이었다. 그나마 덩치가 좀 있다고 해도 중고등학생 또래에 성인은 젊은 여성들과 노인 비중이 높았다.
‘노약자가 너무 많아……. 성인도 힘을 못 쓸 것 같은 사람이 대부분이고.’
물론 여성이라 해서 무조건 약한 건 아니었다. 정하영만 해도 저처럼 특수부대 출신에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베테랑 요원이었으니까. 다만, 이 그룹의 여인들은 어떻게 봐도 정하영과 전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전력을 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나마 전력이 될 만한 인원은 30대 미만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둘, 피투성이가 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기절한 남자가 전부였다.
아니, 솔직히 쓰러진 남자는 전력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옷을 둘둘 껴입었는데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가냘픈 체형이었다. 이 험한 산 중턱까지 이들을 어떻게 다 데려왔는지 의문일 정도로, 그동안 마주친 다른 그룹과 비교하면 최약체 팀이었다.
중장년층으로 보이는 남자 세 명과 몸이 탄탄해 보이는 여자 한 명은 건물 벽을 부수고 들어온 도마뱀 몬스터를 상대하다 이미 요절했다. 열악한 그룹 상황을 파악한 정하진은 쓰러진 남자의 상태를 확인하며 부상자를 살폈다.
기절한 채 숨을 색색 몰아쉬는 남자는 몬스터 피를 뒤집어쓴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치료하고 나서 얼굴이라도 닦아 줘야겠다고 생각한 정하진의 손길이 바빠졌다.
이들을 치료하고 돕는 동안 정하진은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패딩 입은 남자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고, 아끼고 있었다. 그가 혼자 나간 게 너무 걱정된다고, 늘 그가 그룹을 보살피느라 힘쓰고 있는데, 그 부담을 혼자 지게 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특히 아이들이 그를 굉장히 좋아했다. 정하진에게 다가온 아이들은 ‘재윤이 형 어디 갔어요? 또 혼자 나갔어요?’, ‘재윤이 오빠 언제 와요?’ 연신 질문을 던지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남자의 이름까지 알아 버렸다.
아이들의 계속되는 채근에 정하진은 곧 올 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행스럽게도 난감한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업혀 온 의사는 바로 창고로 들어오지 못하고 건물 밖에서 요란하게 구토했다. 음식이 귀한 때인데도 저리 게워 내는 걸 보니, 여기까지 오는 길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간신히 진정한 그는 가방에 급하게 챙겨 온 기색 역력한 도구들을 꺼내고 귀한 소독약을 아낌없이 썼다. 정하진과 정하영에게 사람보다 약이 귀하니 제발 다치지 좀 말라고 쨍알쨍알 잔소리하던 의사가 지금은 저리 벌벌 떨며 치료하는 걸 보니…….
“…….”
정하진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협박이라도 한 거냐. 추궁하듯 계속 바라보자 그가 먼저 일어나 다가왔다.
“치료할 동안……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해요.”
“……좋습니다.”
그렇게 정하진은 남자와 그들이 원래 머물던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안에 있던 시신을 한데 모아 둔 걸 본 남자가 정하진을 향해 말했다.
“그…… 일단, 고맙습니다.”
“…….”
“그리고 도착했을 때 다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서 대충 둘러댔어요. 당신들 일행 몇 명이 크게 다쳤는데 이동할 상황이 아니라 의사를 데리러 왔다고.”
“예.”
“그리고 그쪽이 말한 대로 동생분에게만 말해 뒀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태평한 대답에 남자의 눈이 조금 움찔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나타나 정하진 이름을 대고 의사만 데려갔으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여길 수 있다 말하며 물었다.
“진짜 괜찮겠어요? 보니까 그쪽 그룹은 남자가 좀 많던데. 그놈들 중 대충 몇 명이나 저쪽에 가담했습니까?”
“대충 네 명 정도 남았습니다.”
“…….”
남자는 차분하게 대화하는 것 같으면서도 초조한지 계속 창고 쪽을 흘끔거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그리곤 제 의지와 관계없이 잘게 떨리는 손이 짜증 났는지 손을 세차게 털어 내며 말했다.
“제가 도와줄게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것들 데리고 연습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제 동생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아…….”
정하진은 저보다 실력 뛰어난 정하영을 믿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정하진을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정하진은 그 모습이 마치 일부러 태연한 척하려고 보이는 여유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그러다 제 생각을 깨닫곤 흠칫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습관처럼 이 앳된 남자를 불쌍히 여긴 자신이 한심해서 애써 속을 가다듬고 있자니, 남자가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 쪽도 분위기가 좀 다르던데…….”
“제 여동생 말입니까?”
“네. 당신도 그렇고 여동생도 그렇고 확실히 느낌이 달라요. 그러니 당신들도 나처럼 변할 수 있겠지. 사람 같지 않은 존재로…….”
그 말을 들은 정하진은 남자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얻고자 마음을 다스리며 물었다.
“전조 같은 건 없었습니까?”
“글쎄요. 워낙 일상과 거리가 먼 환경이었잖아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그냥 어느 날부터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고, 가끔 엄청 아프기도 하고, 두통이 미친 듯이 세게 오기도 하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고……. 그런 날이 반복됐는데, 한번 진짜 크게 앓고 나니 싹 다 나아졌어요.”
“그때부터 힘을 쓰게 된 겁니까?”
“아뇨. 그땐 몰랐어요. 이런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그런데 사람들 상대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죠. 내 몸이…… 너무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더라고요.”
“…….”
“집어 던지면 날아가고. 걷어차면 뼈가 부러지고, 속에 든 게 전부 터지고 나중엔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힘이 주체가 안 됐는데, 문득 이상한 걸 하나 깨달았어요…….”
“무엇이 말입니까?”
남자는 정하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한 구석에 모아 둔 시신들을 공중에 띄웠다. 그리곤 무너진 벽 밖으로 내보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정하진도 남자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시신들을 한곳에 조심스레 내려 두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먹이 바닥을 쥐어 패 억지로 구멍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다소 무식한 방법이지만 그렇게 여러 개의 구멍을 만든 남자가 시신들을 하나하나 구멍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정하진은 남자가 사람을 묻는 동안 그의 눈을 살폈다. 그의 눈빛에서는 슬픔보다 피로함이 더 짙게 묻어 나왔다. 흙을 덮어 묻은 남자는 주변에 몬스터 시체를 대충 흩뿌렸다. 시신 냄새를 맡은 산짐승들이 얕은 무덤을 파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몬스터 사체를 대충 내려 둔 남자가 쓰지도 않은 손을 탁탁 털어 낸 뒤, 퍽 늦은 대답을 했다.
“더는 괴물이 무섭지 않더라고요. 이것들이 떼로 덤벼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이런 하찮은 것들에게 도무지 질 것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남자의 눈은 몬스터 시체를 향하고 있었다. 정하진은 그의 눈빛으로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파악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이했다. 아무리 힘이 있다 한들 무섭지 않을 수 있나? 이 괴이한 것들이? 정하진 역시 별별 일을 다 겪었지만 몬스터를 상대할 땐 늘 두렵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저 지켜야 할 것이 있어 묵묵히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을 뿐, 항상 당장 죽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언제나 동생을 생각하며 살아남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많은 몬스터를 처치했어도 정하진은 여전히 몬스터가 두려웠다.
“믿기 힘들죠?”
“……상상이 안 됩니다.”
“그래요. 당연하죠. 나도 지리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벌벌 떨며 견뎌 왔었는데……. 지금은 뭐라 해야 하나……. 아, 그래. 파리나 모기 같아요. 무섭진 않고 귀찮은 거. 딱 그 수준.”
“…….”
“그리고 내 예상인데.”
남자는 정하진의 앞으로 다가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당신도 곧 그렇게 될 거 같아요.”
“…….”
“그리고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긴 한데. 당신은 분명히…….”
잠시 말을 멈춘 남자는 여전히 정하진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패딩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입술을 달싹이는지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정하진은 남자가 주는 압박감에 짓눌릴 것 같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히?”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하진은 제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더 짙어진 걸 느끼고 이를 꽉 물었다. 어마어마한 기백이었다. 말로 설명 불가한 기운. 사람이 이런 기운을 내뿜을 수 있다는 초자연적 현상이 너무도 두려웠다. 그리고 이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자길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만일지 모르겠지만, 두려움과 동시에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꼭 지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정하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눈을 찌푸린 남자가 혀를 차며 말을 맺었다.
“……분명히 나보다 강할 것 같아. 짜증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