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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25화 (125/172)

#125.

조우 2

“…….”

“…….”

“없어?”

“……사…….”

“사?”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성이었는데도 잔뜩 겁먹은 일곱 명의 남자들은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카운터 위의 남자는 침 튀겨 가며 제발 살려 달라 애원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대답이나 하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자기 어필이 쏟아졌다.

“저, 저요! 힘세고 등산도 잘합니다!”

“저, 저, 저, 저는! 저는 힘깨나 씁니다!!!”

“저, 저도 등산이 취미입니다!!! 주말에 직원들 데리고 자주 갔을 정도로 좋아합니다!!!”

마지막 말을 들은 남자가 일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오, 직원들? 혹시 부하 직원들이랑 간 거야? 사장님이셨어?”

“예, 예! 회사 부하 직원들과 정상까지 가고 하산하면 야유회도 할 정도로 체력이 좋습니다! 제가 사람도 많이 다뤄 봐서 쓸 일이 많으실 겁니다! 그리고, 크허억!”

갑자기 열변하던 남자의 이마가 찢어지더니 피가 뿜어져 나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바로 옆 하관만 남기고 세상 하직한 남자처럼 머리가 터지진 않았다.

“소중한 주말에 직원들 불러내서 등산이 웬 말이야. 미친놈인가?”

“어흑!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 주세요!”

“뭐, 어쨌든 산 잘 탄다 이거지? 그럼 다들 이 가방이나 메.”

혀를 찬 남자가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카운터 밑에 두었던 약이 가득 든 가방 네 개를 공중에 띄워 올렸다. 그리곤 벌벌 떠는 남자들의 발아래 하나씩 내려 두었다. 실로 기함할 광경이었으나 누구도 순수한 놀라움을 터뜨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나머지 셋은 가져온 가방에 약 채워. 저 뒤로 돌아가면 선반에 라벨로 표시된 것들 있어. 거기에 보면 해열제, 진통제, 항생제 있으니 그거 위주로 챙기고, 자리 남으면 영양제 같은 거로 채워. 5분 준다. 실시.”

세 명의 남자가 갑자기 속박에서 풀려났다. 그들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정하진을 지나쳐 선반 뒤로 달려가더니 가방에 약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남자는 무료하다는 듯이 카운터에 비치된 포도당 캔디를 하나 까먹다가 정하진에게도 하나 던졌다.

무의식중에 받아 든 정하진은 남자의 눈치를 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겉보기엔 분명 사람인데,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사람 같고 아니고를 떠나서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너무도 두려웠다. 살면서 누군가가 이토록 두려운 일이 있었던가? 그저 저 인간이 제 앞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다 떨렸다.

온갖 일 다 겪은 저도 이 정도이니 제 일행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지를 적시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으니까. 남자가 결박을 풀어 준 건지 나머지 네 명이 주섬주섬 가방을 멨다. 그리곤 이를 딱딱거리며 정하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정하진에게 고개 돌린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안 가세요?”

“…….”

“챙길 거 다 챙겼으면 가세요. 저놈들은 제가 알아서 부려 먹을 테니까.”

정하진은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사실 저들을 두고 가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저들의 역겹고 혐오스러운 계획을 들은 이상 살려 두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 남자가 더 큰 문제로 느껴졌다.

제 직업 탓일까?

아니면 생존 본능이 경고를 미친 듯이 울려 대고 있어서 그런 걸까?

정하진은 이 남자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지금 떠나지 않으면, 호의로 보내 주려던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 남자의 정체가 대체 뭔지 모른 채로 저 혼자 돌아가는 거였다. 고민하던 정하진과 시선을 맞추던 남자는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럼. 당신도 도와줘요. 힘 좋아 보이는데, 가방 하나쯤은 더 들 수 있겠죠?”

“……예.”

정하진은 순순히 그가 건네준 가방을 받아 들고 약을 챙겼다. 이후 그는 남자들에게 묵직한 가방을 두 개씩 건넨 후 앞장서 걸었다. 남자가 저 앞에 있음에도 일행들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에 떨며 남자를 따라 걸을 뿐이었다.

한 시간 정도를 걷다 보니 그가 말한 산이 나왔다. 정하진은 대번에 그들이 있을 만한 위치를 짐작했다. 정하진이 알기로 이 산 중턱엔 산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교대하거나 점검할 때 쓰는 직원 전용 산장이 있었다. 산에서 다친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추고 있으니, 아마 거길 거점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숨 헉헉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편히 숨 쉬는 건 정하진과 남자뿐이었다. 그렇게 꽤 오래 산을 타는가 싶더니, 어느 정도 올라오자 남자가 멈췄다. 그는 일행들의 가방을 모두 한곳에 내려 두라고 지시했다.

정하진은 제 몫의 가방은 등에 메고 나머지 가방을 건넸다. 끌려온 남자들은 가방을 전부 내려놓고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꽤 올라왔으니 여기서 보내 주려는 걸까? 기대 반, 걱정 반인 눈으로 남자를 살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눈앞에 일렬로 선 면면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말했다.

“내가 관상을 잘 아는 건 아닌데. 아무리 봐도 얘네가 개과천선할 것 같진 않단 말이지.”

“……!!”

“사, 살려 주신다고!”

“내가? 언제?”

“히익!?”

“자, 잠깐만요! 여, 여기까지 짐 들고 오면…….”

“살려 줄 생각이 없었는데,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아, 거기 당신은 돌아가세요. 이것들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남자들의 얼굴에 절망이 깃든 순간, 정하진과 눈을 마주친 한 소년이 무릎으로 기어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하, 하진이 형! 형 제발! 제발 나 좀 데려가요!”

“…….”

“혀, 형, 제가! 제가 하율이랑 많이! 친하잖아요! 네!? 제가 하율이 아플 때 간호도 해 주고 그랬잖아요, 형, 제발……!”

“…….”

정하진은 차마 뭐라 말하지 못했다. 제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 소년은 동생 정하율보다 몇 살 위인 고등학생으로, 본인 말대로 제 동생에게 퍽 상냥하게 굴던 녀석이었다. 눈만 내놓은 남자는 자기 좀 데려가 달라고 울부짖는 소년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니 쟤는 그걸 왜 저 사람한테 부탁한대? 나한테 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자 이번엔 정하진의 바지를 놓고 남자를 향해 넙죽 엎드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세요! 제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소년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년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검지 끝으로 이마를 꾹 눌러 고개를 들게 하며 재차 물었다.

“왜 대답을 못 해?”

“어흑, 어흐흑, 제발, 제바알…….”

“야. 말을 해야 내가 고민이라도 해 볼 거 아냐. 응?”

나머지 남자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조용히 굳어 있었다. 정하진은 그들이 약국에서처럼 결박당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까와 다른 게 있다면 입까지 틀어 막혔는지 모두 목 막힌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꺽꺽대고 우는 소년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이상한 애네……. 너 아까 나 만나기 전엔 세상 다 가진 새끼처럼 얼굴 되게 좋아 보였어. 어린 놈의 새끼가 뭘 그리 기대했는지, 아주 광대가 여기까지 올라왔더라?”

“으흑, 제발, 으흐읍……, 자, 잘못, 잘못했어요, 저, 저얼대로 나쁜 짓 안 할 테니까, 제발…….”

“그리고, 야. 너 아까 깐족거리면서 저분한테 뭐라 했어? 실~실~ 쪼개면서 ‘화연이 누나는 두고 걔섀얘~’ 이러지 않았어? 내가 분명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마음속으로 화연이 아니라 하영이라고 홀로 정정한 정하진은 저 말을 다시 들으니 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저 어린 녀석조차 저들과 이미 합을 맞추고 역겨운 일에 가담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니. 새삼 떠올리니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정하진은 바로 떠날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저들을 곱게 죽일 것 같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그들이 쓰레기라고 하더라도 정하진은 최소한 인도적으로, 그리고 뒤탈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휘둥그레진 눈을 보니, 정하진이 마치 이들을 살려 달라고 할까 싶어 당황한 듯이 보였다. 남자들 역시 마지막 희망을 보듯 정하진을 향해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정하진은 그들의 눈빛을 무시한 채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자들은 제가 처리하게 해 주십시오.”

“흐읍……!”

“읍읍!”

“……혀, 형!”

“오…….”

눈을 몇 번 깜빡인 남자가 포박한 이들을 한 번, 정하진을 한 번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더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별로 놀라지도 않던데……. 사람 좀 죽여 보셨나요?”

“……제 그룹의 일이니, 제가 뒤탈 없이 처리하고 싶을 뿐입니다.”

정하진의 말을 들은 남자들의 얼굴에 절망이 번졌다. 쭈그리고 앉은 남자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제가 얘네들로 연습할 게 좀 있거든요.”

연습. 그 단어를 이해한 이들의 얼굴이 각자 허옇게, 또는 퍼렇게 질렸다. 남자는 그들의 공포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알잖아요? 요즘은 괴물보다 사람 상대가 더 까다로운 거. 내가 힘 조절 잘못해서 문제 생기면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라.”

“…….”

예상대로 그는 이들을 곱게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하진은 차마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죽음 앞에선 모두 인도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쉽게 떠날 수도 없어 입술만 달싹였다. 그런 모습이 퍽 불만스러웠는지, 남자가 짜증스레 혀를 찬 순간이었다.

“……큭!”

정하진의 사지에 큰 중압감이 내려앉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틀어 봤지만, 손과 발이 단단한 바위에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남자의 눈치를 살피자, 몸이 붕 떠오르며 그의 등 뒤에 차분히 안착했다. 직접 겪고도 믿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이었다.

“그러니까 숨통은 직접 끊어야 찝찝하지 않을 것 같다~ 이거죠?”

“그게, 큭, 아니라…….”

“그럼 내 연습이 끝나고 부탁할게요. 거기서 지켜봐요. 딱 보니 이런 쪽으로 지식이 좀 있는 분 같은데, 지켜보다가 조언해 주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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