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너의 파편 7
그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지수가 형태 없는 몸을 여기저기 돌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자, 저 멀리, 까마득하게 먼 곳 어딘가에서부터 제게 다가오는 하얀 점이 보였다.
“……지율아?”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부름을 들은 건지, 새하얀 점이 점점 더 맹렬하게 달려오기 시작한다. 작은 점이 조금씩 더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멀었다.
지수는 제 의지를 저 머나먼 지점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이동이 불가능했다. 육체 없이 정신만 이곳에 묶인 기분이었다. 부디 저 존재가 길을 잃지 않고 제게 곧바로 달려와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지율아, 형 여기에 있어.”
어쩜 저것도 저 한지수가 가진 기억의 일부분일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동생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형은 여기에 있으니 이리 오라고 말하고 싶은데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초조하게 다가오는 하얀 점을 응시할 수만 있을 뿐.
그러나 맹렬하게 달려오는 하얀 점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 지수는 그게 제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잘못 들었나 봐.’
못내 아쉬웠지만, 지수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 제게 와다다닥 달려오는 작은 햄스터 역시 너무도 사랑하는 존재였기에, 제 몸이 이곳에도 존재한다면 환하게 웃어 주며 무릎을 굽히고 앉아 양팔을 벌려 반기고 싶었다.
‘토토야, 아빠 여기에 있어.’
형태도 없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데도 제 집사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듯, 정확하게 한 방향으로 달려온 토토가 힘차게 점프해 지수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쮜이잇-!”
“……!!”
토토가 제 가슴에 달려와 안긴 순간, 존재하지 않던 육신에 따스함이 번지며 한지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토토야……!”
몸을 되찾아서인지 목소리도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쮜잇! 쮜이잇!”
지수의 품에 안긴 토토는 몸을 마구 치댔다. 정수리를 가슴에 퍽퍽 박기도 하고, 앞발로 지수의 옷자락을 마구 할퀴다가 움켜잡고 얼굴을 비비는 내내 서럽게 울었다. 저만 두고 잠들었다고, 아니. 기절했다고 원망이라도 하려는 건지, 몹시 격한 움직임이었다.
“아하하, 토토야, 아이고, 아빠 옷 다 찢어지겠네.”
“쮜에에엣!”
게다가 토토의 눈가는 눈물로 젖어서 털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던전 투어 도중 갑자기 발작하듯 쓰러졌다가 그대로 까무룩 기절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지수는 제가 또 얼마나 잠든 건지 몰라 미안한 마음에 토토를 양손으로 감싸 들고 뽀뽀하며 사과했다.
“미안해, 토토야. 우리 토토가 아빠 깨우러 왔구나. 아빠 이제 일어날게. 같이 가자.”
“쮜에엥!”
힘차게 대답한 토토는 지수의 볼에 격하게 뽀뽀하며 중간중간 깨물기를 반복했다. 어찌나 단단히 심통 났는지, 이건 풀어 주려면 꽤 걸리겠구나 싶었다.
잠시간 격렬하게 치댄 토토가 지수의 몸에서 뛰어내리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나 싶더니, 돌아보고 지수가 잘 따라오나 확인하듯 코를 씰룩였다. 지수가 바로 토토의 꼬리에 닿을 듯 말 듯 다가서자 다시 와다닥 달려가 뒤를 돌아보길 반복한다.
“토토야, 계속 가. 아빠가 토토 계속 따라갈게.”
“쮯!”
지수는 제 앞에서 씰룩거리는 푸짐한 골든 햄스터의 엉덩이를 따라 걸었다. 둘이 걷는 동안에도 등 뒤에선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유성우의 폭포처럼 쏟아졌다. 토토와 어느 지점까지 걸어온 지수는 제 의식이 곧 현실로 돌아갈 것을 예감하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미련이 남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저 기억의 주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네가 어떤 선택을 했든 괜찮다고.
너도 노력 많이 했을 거라는 걸 세상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이해한다고.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든 살아 보려 해. 솔직히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거기까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래도…… 너도, 나도. 우리 둘 다 편해졌으면 좋겠다.’
수신인이 불명확한 메시지를 보내듯, 칠흑의 공간에 제 생각을 남겨 둔 지수가 다시 돌아섰다. 그리곤 몇 걸음 앞에 멈춰서서 저를 지켜보는 작은 털 뭉치를 향해 다가갔다.
앞장선 토토를 따라 조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천천히 걷고 있자니, 발을 뗄 때마다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자 마치 불순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머리가 맑아지고,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던 고질적인 슬픔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한다.
기이한 일이었다. 강재윤이 사라진 후 계속 달고 살았던 터라,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미미한 두통이 사라졌다. 머리가 맑다 못해 더없이 상쾌한 기분이었고,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묵직한 무게감 역시 증발했다.
안식의 신이 손을 쓴 걸까, 누군가 제 어깨를 도닥여 주고 등을 부드럽게 밀어 주는 것만 같았다. 나쁜 건 다 여기에 두고 가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귓가에 따스한 바람이 스쳤다. 제 내면이 이리도 고요할 수 있었다니……,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 보는 평온함이었다.
“후아아…….”
단전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후련하게 터져 나왔다. 가슴이 시원하다 못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대로 잠시 멈춰 서서 제 가슴을 부드러이 누르고 있으니, 앞서가던 토토가 다시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쮜이?”
“아무것도 아냐, 토토야. 가자.”
“쮜잇-!”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 * *
조명이 은은한 병실.
잠든 한지수의 곁에 주렁주렁 달아 둔 최상급 수정을 체크한 정하진이 소파에 풀썩 앉았다. 간병인 전용 침실에서 잠시 자라고 해도 거절한 정하율은 꾸벅꾸벅 졸다 3인용 소파에, 토토는 한지수의 곁에 누워 색색 잠든 지 오래였다.
아까 동생에게 덮어 준 담요가 그대로 얌전하게 있는 걸 확인한 정하진은 다시 한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던전 투어 도중 한지수가 갑자기 쓰러지고 벌써 8일이 지났지만,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속이 쓰리군.’
그간 계속 걱정하고 신경 쓴 탓인지 속이 불편하다 못해 쿡쿡 쑤셨다. SS급 각성자가 되어도 정신적 피로도에 따라 신체가 반응하는 걸 보니, 새삼 자신도 아직은 인간성을 잃지 않았구나 싶었다.
“후우…….”
짧게 한숨 뱉은 정하진은 오랜만에 제 속을 아프게 만든 원인 한지수를 조용히 응시했다. 세상 편히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제 마음도 편해져야 하는데, 불쑥불쑥 걱정이 치솟아 또 마른세수를 하고 만다.
정하진이 염려하는 건 한지수의 건강이 아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후원자가 멋대로 한지수의 의식을 불러낸 듯했으니까. 의사도 따로 건강엔 지장이 없다고 했고. 그가 걱정하는 건 공황 상태에 빠졌던 한지수가 정신 차렸을 때, 제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다 망쳤어. 미안해요. 내가 나빴어. 내가 잘못한 거야. 정말 미안해. 내가 당신에게 이런 짐을 지우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안식의 신 말대로 설마 기억에 혼선이 생긴 걸까. 그렇다면 큰 문제였다. 그건 여기 제 앞에 누워 있는 한지수가 가져선 안 될 기억이니까.
후원자가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싶긴 했으나, 그들이 무작정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딱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제 속만 답답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정하진은 한지수가 깨어났을 때, 제게 어떤 질문을 할지 알 수 없어 더욱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가 제게 과거를 묻는다면, 현재 자신은 진실을 들려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당신에겐 무엇 하나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약속했는데…….’
물론 그 약속을 했던 당사자가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하진에겐 똑같은 한지수였다. 이 세상에 정하진이라는 존재로 태어나 가족 외 처음으로 관심과 연민, 그리고 진심 어린 애정을 느꼈던 오직 한 사람.
“…….”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한지수를 떠올리던 정하진은 상념 사이를 비집고 떠오르는 또 다른 걱정거리에 한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지수가 잠든 그 며칠 사이 지구라는 별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내에서는 어떻게든 쉬쉬한 모양이지만, 최근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다른 국가에서 지구와 똑같은 문명을 갖춘 던전이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결국 말이 새고 말았다. 던전 속 어떤 국가는 인류가 좀비로 변해 있었고, 반면 다른 국가는 사람이라곤 인간형 몬스터조차 없는 곳도 있었다.
이와 같은 소식이 퍼지자 인류는 두려움에 물들기 시작했다. 지구와 똑같은 모습을 한 저 불길한 던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고, 혹시 멸망한 지구의 미래를 보여 주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심심치 않게 나왔다.
결국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각국에서 조사단을 파견하려 했지만, 지구와 똑같은 환경 조건을 갖춘 던전은 무언가를 연구할 새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제대로 공략을 진행하기도 전 그대로 증발하듯 말이다.
이런 특징은 정하진이 이미 과거에서 겪었던 미래를 통해 알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후원자들이 ‘파편’이라고 부르는 저 던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보다, 그 이후에 나타날 것들이었다.
원래라면 저 파편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후, 끔찍한 재앙과 그 재앙을 잠재울 존재들 역시 이 땅에 내려왔어야 했다. 후원자들이 재앙을 막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실어 별에 강림시키는 존재 ‘조율자’들이.
“…….”
조율자를 생각한 순간, 정하진은 이마를 짚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인물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강재윤…….’
까득-
이가 갈리고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 뛰었다. 정하진은 강재윤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처음으로 제대로 봤던 날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했다. 깊은 숲에 쭈그리고 앉아 무심한 얼굴로 제가 시험 삼아 죽인 인간들의 시체를 관찰하던 감정 없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