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너의 파편 6
장소는 여전히 강재윤의 집이었지만, 조금 전과 달리 포근한 침실이 아닌 풍비박산 난 서재가 보였다. 한지수는 강재윤의 서재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으흐흑, 형……, 혀어엉……. 어, 어떡해, 이거……, 이거 어떡해……, 혀어엉, 이거, 이거 어떡, 어흐흑, 어떻게 해애애…….”
깨진 유리 조각을 움켜쥔 한지수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떨어진 피는 바닥에 흩어진 예쁜 색의 모래와 자갈과 말린 꽃을 적셨다.
‘…….’
지수는 그렇게 오열하는 한지수를 한참 바라봤다. 한지수는 계속 강재윤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유리 조각을 꽉 쥔 채 제 가슴을 퍽퍽 때리며 오열했다. 그러자 저 멀리서부터 빠른 속도로 날아온 김현아가 급히 착지하더니, 한지수의 양쪽 손목을 붙들며 말렸다.
“지수야, 너 뭐 하는 거야! 당장 여기서 피해야 해, 우선 이거 놔! 손 놔! 주먹 펴, 빨리!”
“누, 누나, 누나 이거, 이거 어떡, 어떡해, 이거, 흐윽, 이거, 재, 재윤이 형이, 으, 으으으, 흐어어어어엉…….”
“한지수! 정신 차려!”
김현아가 버럭 소리친 순간, 흠칫한 한지수가 눈물만 뚝뚝 흘리다 곧 오열하며 그녀의 품에 안긴다. 김현아는 이를 악물고 한지수를 안은 채 다시 날아올랐다.
지수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 장소는 이제 공중 던전이 터지며 사라질 것이다. 또 다른 한지수는 저와 달리 강재윤의 무엇 하나 간직하지 못했을 것이다. 먼지가 되어 사라진 이곳에 돌아와 봤자 건질 건 없었을 테니까.
그걸 떠올리고 나니, 문득 정하진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강재윤 에스퍼의 집에 가자고 한 이유는……. 한지수 가이드가 중요하게 여기는 물품을 챙기기 위해서입니다.
‘아…….’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괜한 걱정일 수도 있고. 제 걱정이 한지수 가이드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저 균열이 게이트화 되면서 강한 징후를 보인다면, 그래서 만에 하나 강재윤 에스퍼의 집까지 피해받는다면……. 그럼 한지수 가이드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어하고, 슬퍼할 것 같았습니다.
주제넘은 참견이라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 부디……. 중요한 물건이 있다면 지금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지수는 형태 없는 고개를 들어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하진 에스퍼, 당신은…… 전부 다 알고 있었구나…….’
그걸 깨닫고 나자, 가슴에 묵직한 바위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제게 접근한 의도부터가 불분명했지만, 지수는 그냥 내버려 뒀다. 처음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너무 힘들어서, 그냥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서 뭘 고민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나중엔 그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였다.
애초에 정하진과 지내는 동안 지수가 그에게 가진 의문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의아하다고 여겨 봤자 불안함보단, 단순하게 이 사람은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줄까? 이 남자는 대체 내 취향을 어쩜 이리 잘 알까?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러비스 자컨을 보고 공부했다는 어설픈 변명을 믿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정하진은 지수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부터 시작해 섣부르게 지수의 몸에 손대지 않고 늘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것 등등……. 사소한 것 하나부터 열까지 한지수라는 사람을 배려한 움직임이 몸에 배 있었다.
그래서 한지수는 정하진이 대단한 노력파라고 여겼다. 과거 정부 비공식적인 부서에서 근무했다고 하더니, 그래서 사람이 철두철미하고 눈썰미가 좋은가 보다 생각하며 넘겼을 뿐이었다.
‘……정하진 에스퍼, 당신은 한지수를 사랑했나요?’
질문을 받을 당사자는 이곳에 없지만, 그에 대답하듯 또 다른 편린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흐릿한 장면 속, 큰 코트를 덮고 조수석에 앉은 한지수가 잠이 덜 깬 상태로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한지수의 옆 운전석엔 정하진에 앉아 있었다.
한지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애정이 담기다 못해 철철 넘치는 게 확연히 보였다. 어찌나 한지수에게 집중하고 있는지, 외설스러운 말을 속삭일 뿐임에도 세상에서 더없이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지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장난스럽게 사과했다. 이렇게 몸에 힘 풀릴 정도로 심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분명 자제한다고 자제했는데 미안하다고 굳이 노골적인 언급을 담더니만 결국 한지수에게 어깨와 가슴을 한 대씩 얻어맞는다.
새빨개진 연인에게 얻어맞던 정하진은 그게 뭐 그리 좋은지 소리 내어 웃는다. 눈을 곱게 접으며 웃는 얼굴이 잘생긴 얼굴에 무척 잘 어울렸다. 기분 좋게 웃다가, 찌푸린 한지수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의 벨트를 풀어 주더니 그대로 품에 당겨 안고 미안하다 사과한다.
해사하게 웃는 정하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지수는 그의 품에 안긴 한지수를 바라봤다. 풀어진 얼굴은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강재윤과 있을 때와 딱히 다르지 않은 모습은 지수에게 있어 낯설기도 하고,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하진의 미소가 그 모든 것을 녹일 만큼 충만한 애정을 담고 있어서, 이 기억이 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저릿했다.
‘미치겠네…….’
지수는 종종 그가 제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다가도, 말하지 못하고 목 졸린 사람처럼 괴로워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엔 그저 사레가 걸렸나 보다 했지만,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고, 그때마다 정하진의 눈에 짙은 슬픔이 스쳤던 걸 떠올리자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제 예상이 맞다면 정하진은 아마 눈앞의 환하게 웃는 저 남자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자신과 저 앞에 보이는 한지수가 다른 것과 별개로 말이다.
막연하게 모종의 계약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게 많은 남자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그 계약의 중점이 ‘한지수’라는 존재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당신이 한지수를 사랑했다면…….’
정하진 또한 얼마나 기구한 인생인가. 행성 머리 펄이 말했던 것처럼 이 기억은 제 것이 아니었다. ‘한지수’의 것이지만 동시에 지수의 것은 아니었다. 이제 막 스러져 흩어지기 시작한 환영 속의 한지수를 사랑했던 남자.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똑같지만 명확히 다른 사람을 눈앞에 둔 채 아무것도 내색하지 못하면서도 어쩜 그리 헌신할 수 있었을까. 어쩜 대용품 같은 것이었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평상시의 그를 생각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가 저를 대용품으로 여겼다면, 그저 ‘한지수’를 대신할 같은 사람으로 여겼다면 이리 맹목적으로 헌신만 할 게 아니라 관계에 변화를 원했을 것이다. 적어도 소멸한 파편에서 보인 것과 같은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하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지수라는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었다. 지수의 생활에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게 했으며, 그를 향해 쏟아지는 공격을 전부 보지 못하게 막아 주고 보호해 주었다.
보호.
그래, 보호.
그는 지수를 보호하려 했다. 때론 다소 과보호하려는 게 확연히 느껴지기도 했지만, 워낙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그런 거라 여겼다. 하지만 막상 까 보니 그는 한지수라는 사람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헌신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할 게 분명한데……, 제 헌신에 상응하는 결과를 바라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지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대체 뭘 바라냐고. 하지만 어차피 제약에 묶여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아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 앞으로 재윤이 형만 생각하며 살아갈 텐데…….’
강재윤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자신은 평생을 그를 기다리며 살 것이다. 설령 한지수가 늙어 죽을 때까지 그가 귀환하지 못해서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지수는 강재윤을 매일 기다릴 게 분명했다.
강재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고 웃고 떠들지 못해도, 이 넓은 우주 어딘가에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강재윤과 나눈 추억을 하나둘 꺼내 그 행복했던 순간들로 연명하듯 평생을 버텨도 상관없었다.
그저 어딘가에서 각자 살아가며 서로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지수의 삶을 지탱할 원동력이 되어 줄 테니까.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지수는 깨달았다. 어쩜 정하진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그걸 인지하는 순간 환영이 다시 파편으로 돌아와 칠흑으로 추락한다. 안식의 신이 열심히 일하는 중인지 아까보다 더 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져 내린다.
까마득한 심연으로 추락하는 파편들을 집어삼키는 저 흑(黑)의 공간은 어떤 곳일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굳이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와는 달랐다. 어째서인지 저곳은 제 영역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미안해, 안식. 고집부려서 내가 일을 좀 키운 것 같네. 그런데 안식도 아무 설명 못 들은 내 입장이었다면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해해 줘.”
지수는 이 세계 어딘가에서 분명히 제 말을 듣고 있을 안식의 신에게 사과했다.
사실 여전히 의문은 많았다. 하지만 지수는 집착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자신이 가장 알고 싶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얻었으니까. 게다가 아까 펄이 끔찍한 몰골로 소멸한 것도 신경 쓰였다. 그게 아무리 분신이더라도, 지성을 지닌 존재가 제 질문 하나 때문에 바스러지는 건 더 겪고 싶지 않았다.
약간이나마 상황은 파악했으니, 이제 슬슬 나가고 싶었다. 제 것이라며 뺏기기 싫어 집착했던 것이 무색하게, 이젠 저 기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나니 더 훔쳐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지나간 일을 제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고, 지금으로서 고민되는 건 정하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정도였다.
“……그것도 아닌가. 안식. 여기서 나가면, 내가 본 것들 전부 기억할 수 있어? 아니면 또 내 기억을 지울 거야?”
자신의 것이 아니니 흘려보내라던 펄의 말이 신경 쓰였다. 여기서 보기만 하고 기억을 가지고 깨어날 수는 없는 걸까? 기억 삭제는 후원자들이 자주 하는 짓거리다 보니 지수는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혹시 지울 거면 형에 대한 부분은 지우지 말아 줄래? 그건 내 기억이 맞잖아?”
강재윤의 생사만 기억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
형아.
“……!!”
너무도 그리운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