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너의 파편 4
지수는 한참 폭소하다 갑자기 차분해진 펄을 질린 얼굴로 바라봤다. 그가 웃을 때마다 이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 무너질 것처럼 방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는데, 조금만 더 웃어 댔다면 제 몸이 다 터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지금 이렇게 저와 마주하고 있는 펄의 모습은 본체가 아닐 터였다. 후원자들이 현현할 때 드러내는 모습은 인간으로 치면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 정도의 존재감일 뿐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니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 티끌이나 다름없는 상태일 텐데, 그런 존재가 웃음을 터뜨린 것만으로도 공간이 흔들리고, 전신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라니…….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후원자의 본체가 재채기라도 잘못하면 인간 수십만 정도는 의도치 않게 죽일 수 있다는 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고막이 얼얼하다 못해 욱신거렸다. 이쯤 되면 귀에서 피가 나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지수는 할 수만 있다면 제 위장이 멀쩡한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펄이 웃을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전신을 관통했던 감각 때문에 괜히 찝찝했다.
지수가 얼얼한 귀를 꾹꾹 누르고, 배를 쓰다듬으며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펄을 쳐다봤다. 그는 이제야 지수의 상태를 깨달은 듯이 과장되게 놀라며 말했다.
“오, 이런……, 미안하네. 자제했어야 했는데, 그대에게 한 방 먹은 게 유쾌해서 나도 모르게……. 내 실수니, 사과하겠네.”
“…….”
지수는 그가 사과하든 말든 빨리 대답이나 했으면 했다. 하지만 펄은 곤란하다는 듯이 팔짱 낀 채 자기 팔뚝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데, 대답 전에 먼저 이 말을 해 두고 싶군.”
“……뭔데요?”
“세상엔 가끔 그저 시간을 조금 흘려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진실도 있는 법이네.”
“…….”
“모처럼 소중한 기회인데, 그럼 너무 아깝지 않겠나? 그러니 다른 질문을 해 보는 건 어떻겠나. 사실 이렇게 조언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큰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말이네.”
그 말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강재윤의 생사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걸까?
혼란한 마음에 지수의 눈동자가 떨렸다. 펄은 그런 지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듯이 행성을 기울였다. 비록 눈은 없지만, 지수는 그가 지금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뭘 관찰하려는 걸까?
무엇이 궁금한 걸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차라리 다른 걸 물어보라는 압박인 걸까?
하지만 펄은 조금 전 ‘또 다른 그대’라는 말을 언급했다. 계속 빙빙 돌리며 질질 끌었던 대화로 미루어 봤을 때, 저 언급은 그가 일부러 힌트를 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또 다른 한지수’가 존재하냐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게다가 존재하면 어떠한가. 그가 계속 강조한 대로 제 기억이 아니라면 주면 그만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제 것도 아니라는데 딱히 집착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지수는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껴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당당하게 행성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재윤이 형의 생사가 가장 궁금해요. 만약 형이…… 돌아올 수 없다고 해도……. 그래도 알고 싶어요.”
“…….”
강재윤이 사라지고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지수는 강재윤이 던전과 사라진 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부분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었다.
매일매일 그의 생사를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울고, 힘들어하고, 그러다 괜찮아지고, 괜찮아진 자신에게 신물을 느끼고, 다시 울고, 그리워하고, 그러다 또 자신을 보살펴 주고 힘이 되어 주려고 노력하는 정하진과 토토를 보며 조금씩 회복하고의 반복이었다.
강재윤이 없는 삶은 지수에게 무의미에 가까웠다. 지금도 약으로 억누를 뿐이지, 당장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쑥 치솟아 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수는 힘닿는 데까진 버티고 싶었다.
회피 성향이 강한 제가 어째서 그런 힘든 길을 가려고 선택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버틸 만큼 버텨 보고 싶었다. 어쩜 이건 제 의지라기보다 자길 가만 놔두지 않는 토토와 정하진에게 휩쓸린 탓인지도 몰랐다.
‘나도 참 잘 휩쓸리지……. 지금도 그래. 저 토성 같은 초월자가 몇 마디 했다고 흔들리는 거 봐. 그래도…….’
지수는 마음을 굳혔다. 죽을 때까지 강재윤을 그리워하더라도,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이미 그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벌써 마음에서 떠나보내고 있었지만.
“그럼 질문은 결정했나?”
나지막한 물음에 지수가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정했어요. 사실 알고 싶은 건 너무 많아요. 당신들……, 후원자들이 다 알면서 말해 주지 않는 게 너무 밉고, 너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당신들이 계속 말하는 어떤 규칙 때문이라면, 이해할게요. 그러니 이거 하나만 알려 줘요.”
“…….”
지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진실을 원했다. 비록 이 질문이 낭비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알고 싶은 건 이거 하나면 충분했다. 지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윤이 형은 살아 있나요?”
“…….”
울렁울렁 요동치는 마음과 다르게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펄은 잠시 말없이 지수를 응시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 행동이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난 이미 충분히 했다는 듯이 보였다.
“흠, 그렇게 결정했군. 어쩔 수 없지.”
“…….”
“듣던 대로 고집이 만만치 않아. 뭐, 그래도 직접 선택한 길이니만큼, 내 성심성의껏 알려 주도록 하겠네.”
그 순간, 펄의 행성 머리에 쩍-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그의 왼쪽 어깨와 팔 역시 금이 가더니 그대로 갈라지며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 이건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이 정도는 감수했으니. 이 모습은 더 못 써먹겠군.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지……. 쯧. 어쨌든, 이 파편이 사라지기 전에 답변부터 하겠네.”
행성 머리를 내내 맴돌던 고리가 마치 금가루처럼 공중에 흩뿌려지며 소멸하기 시작한다.
“그대의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그렇다’ 이네.”
“……!!”
쩌적- 쩌저적-
“이런, 이제 한계군. 위에서 많이 격노한 것 같은데…….”
콰드득-
행성 머리가 점점 부서지며 조각조각 떨어져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의 왼팔과 왼쪽 다리 역시 수백 조각으로 쪼개졌다. 그대로 분리된 파편이 아득히 먼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순백의 공간마저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르르릉- 쿠르르르르릉-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지수의 눈에 불안함이 보였는지, 펄은 안심하라는 듯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된 거, 남은 페널티까지 내가 가져가겠네.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어차피 버리게 된 조각이니 남은 힘으로 자네에게 선물을 하나 더 주도록 하지.”
“…….”
“계속 말했듯 그대 것이 아니네. 그러니 거둬 가는 걸 거부하지 말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게.”
“뭘……, 뭘 지켜봐요?”
마음이 혼란했다.
강재윤이 살아 있다니.
그런데 뭘 더 알려 준다는 걸까?
이번엔 펄의 오른쪽 육체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만들어 낸 허상이라 해도 한 존재가 소멸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너무도 끔찍해서, 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의 인간의 여린 모습 때문일까? 펄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대로 눈을 감고 있게나. 나의 어린 신이 그대에게서 떼어 가는 게 무엇인지 구경할 수 있게 도와주지.”
“…….”
“그러니 꼭 기억하게. 내가 그대를 위해 힘깨나 썼다는 것…….”
펄이 말을 제대로 맺기 전, 끔찍한 균열 음이 퍼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두려워 눈을 뜰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이대로 이 세계가 무너지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함께 소멸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어깨를 움츠린 순간. 따뜻한 기운이 전신을 감싼다. 놀라 저도 모르게 눈을 뜨자 순백의 공간이 무너지는 게 보였다. 지수의 발밑까지 전부 다 깨져 부서져 내리는데도 지수는 멀쩡히 서 있었다.
누군가가 저를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널 보호해 주겠다는 듯이 감싸 안고 보듬어 주는 것 같은 따스함이 전신을 부드럽게 뒤덮었다.
“아…….”
이상했다. 주변은 온통 다 깨어지고 소멸하고 있는데, 마음이 평온했다.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하고 눈앞의 새하얀 공간이 무너지며 다시 꿈에서 본 우주와 같은 곳으로 바뀌는데도 두려움은커녕 반가운 기분마저 들었다.
이 감정을 뭐라 해야 할까. 확고한 신뢰? 자신은 괜찮을 거라는 안심? 어째서인지 몰라도 지수는 이 세상 그 무엇도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 같은 든든함을 느꼈다. 누군지 몰라도 감히 볼 수조차 없는 어떤 미지의 존재가 제게 이토록 애정을 퍼부어 주고 있었으니까.
마음이 안정되자 시야를 가득 채운 유성의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지수는 더는 그걸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안식의 신이 뭘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도, 펄이 말한 대로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그 순간, 조금 큰 파편 하나가 지수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게.
펄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지수는 얌전히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파편이 보여 준 기억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더는 우주 같은 공간이나 쏟아지는 유성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떤 광활한 자연이 보였다. 하늘은 핏빛이었으며, 눈앞엔 넓은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두리번거리던 지수는 넓은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
혼자 망연한 얼굴로 핏빛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는 한지수.
또 다른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