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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는 이제 그만 쉬고 싶다-119화 (119/172)
  • #119.

    너의 파편 3

    머리가 있어야 할 위치에 행성이 있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몸은 또 인간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또 옷소매와 장갑 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데없이 등장한 투명 인간에 놀란 지수가 주춤주춤 엉덩이로 뒤로 물러나며 신음했다.

    “……으, 읏…….”

    말로 표현 못 할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아니, 단순히 압박감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지수는 명백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저 행성 머리가 마음만 먹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자신이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어째서 그런 명확한 이미지가 떠오른 건지 모르겠으나, 이 또한 행성 머리가 지수에게 보내는 무언의 압박일지도 몰랐다. 지수는 차마 그를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두려웠다. 눈앞의 존재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너무도 두려워서, 차라리 기절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만큼이나 극심한 공포가 밀려왔다.

    벌벌 떠는 지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행성 머리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한 행동이었지만, 고개 숙인 지수의 눈엔 들어오지 않았다.

    행성 머리는 천천히 지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아니, 행성을 가까이 기울였다. 오묘하고도 은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띠가 지수의 정수리를 스치며 간지럽혔다. 그 감각을 간지러움이 아닌 소름으로 받아들인 지수가 어깨를 움츠린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흐음……. 이거 참……. 미안하군. 그대처럼 작은 존재 앞에 나의 파편을 드러낸 건 오랜만이라. 이제 좀 어떤가?”

    퍽 중후한 목소리가 미안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떠냐니, 뭐가? 의아함을 품은 순간, 지수의 전신을 옥죄는 것 같던 거대한 압박감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행성 머리가 제게 보이던 적개심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부정적인 모든 감각까지 전부.

    “허억……, 헉, 허억…….”

    그렇게 행성 머리가 뒤로 조금 물러선 후에야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헐떡이며 제 목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내내 몸을 옥죄던 압박감이 사라져 해방감이 찾아왔지만, 지수는 여전히 굳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차마 눈앞의 존재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가 너무도 거대한 존재라는 게, 자기 같은 한낱 미물이 똑바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게 너무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빌딩보다 높은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걸 지켜보며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황이 이보다 나을 것 같았다.

    “이런, 이런.”

    극심한 공포에 잠식당한 지수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행성 머리가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내 다시 사과하겠네. 많이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아무래도 그대는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군.”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수의 마음이 순식간에 평온해졌다.

    “아…….”

    더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아도 될 것 같은 그런 친근함이 샘솟았다. 이런 친밀함이라면 마음 편하게 그를 볼 수 있어야겠지만, 지수는 여전히 손을 벌벌 떨었다. 이렇게 제 기분을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그의 힘을 몸소 느끼고 나니 오히려 안도감보다는 불쾌감이 더욱 커져 입술을 깨물며 치미는 감정을 눌러야만 했다.

    “그대는 참 여러모로 반항이 심하군. 그냥 받아들이면 편해질 것을……. 뭐, 이 또한 인간이 가진 장점 중 하나인 강력한 방어 기제겠지. 하지만 자네 고집 때문에 내가 아끼는 어린 신이 고생하는 걸 보고 있자니, 그건 또 탐탁지 않아.”

    그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지수가 여전히 고개 숙이고 있자, 한층 더 나긋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은 말할 기분이 아닌 것 같으니, 먼저 나를 소개하겠네. 내 이름은 펄. 몇몇 별의 관리자라네.”

    별의 관리자라니. 지수는 그가 우주의 개념이니 뭐니 어려운 이야기를 꺼낼까 싶어 긴장했지만, 이어진 소개는 다행스럽게도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그대의 후원자 안식의 신의 멘토……, 아니, 아니지. 그럼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정정하지. 난 안식의 신의 친구라네.”

    펄이 안식의 신과 친구 사이라고 정정했지만, 지수의 뇌리엔 멘토라는 단어가 더 남았다.

    “멘토…… 그럼 안식의 신보다 상위의 후원자라는…… 의미인가요?”

    “하하, 후원자라……. 나도 먼 옛날엔 후원자 노릇을 하던 때가 있었지. 지구에도 일시적이지만 도움 준 적이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후원자가 아닐세. 물론 내가 아끼는 어린 신의 부탁으로 가끔 대리 후원할 때도 있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 가끔이 아닌데……? 아, 이건 중요하지 않으니 넘기도록 하지. 중요한 건 지금 자네 상태야.”

    “내 상태…….”

    “그래. 아주 안 좋아. 자네가 자기 것이 아닌 파편에 생각 이상으로 집착하는 바람에 안식의 신이 바빠졌어. 이 자리에 자신의 의지를 한 조각도 보내지 못할 정도로 말일세. 그러니 포기하고 놓아 보내도록 하게.”

    “무슨……,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눈앞의 초월자에 대한 여전한 두려움 속에서도 지수는 그가 하는 말에 강한 반발심과 불만을 느꼈다.

    파편이란 조금 전 폭포처럼 쏟아지던 유성을 말하는 걸까? 전부 제 기억이라고 확신하기엔 조금 석연찮은 부분이 많긴 했지만, 어쨌든 ‘한지수’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 행성 머리는 그게 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자네 것이 아니네.”

    “…….”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다. 울컥했지만, 겁이 나 차마 내색하진 못한 지수가 이를 꽉 물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네. 물론 기억 속에서 또 다른 그대를 보았으니 믿기 힘들겠지만.”

    “…….”

    또 다른 그대?

    지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펄은 장갑 낀 손으로 지수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은 궁금해 괴로울 정도겠지. 묻고 싶은 것도 많을 거고. 하나…… 안타깝게도 우린 언급할 수 없다네. 그게 이쪽 세계의 규칙이니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군.”

    “…….”

    “그래도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겠어. 지금처럼 자네가 자꾸 사소한 것에 집착할수록 상태는 안 좋아질 걸세. 지금 그대의 뇌는……, 아주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기능을 못 하게 될 정도로 과열된 상태거든.”

    “…….”

    “그 작은 머리로 버텨 보겠다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다 무의미한 싸움이네. 그러니 흘려보내고 편해지게.”

    지수는 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만을 늘어놓는 그는 계속해서 속 시원하게 말해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혼잣말처럼 주절주절 말을 쏟아 냈다. 지수는 여전히 불만스러웠으나, 한편으로 의아했다.

    초월적인 존재가 굳이 말을 저리 빙빙 돌려 가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거기로 미치자, 그가 했던 말 중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말들이 뇌리를 스쳤다.

    몇몇 별의 관리자.

    또 다른 그대.

    이쪽 세계의 규칙.

    “…….”

    분명 ‘한지수’의 기억인데도 불구하고 시간대가 맞지 않는 기억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지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또 다른 나……라는 건, 평행 세계 뭐 그런 개념인 건가요?”

    그 질문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펄이 처음으로 조용해졌다. 지수는 여전히 그가 겁났지만, 용기 내 말을 이었다.

    “난……, 똑똑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주의 개념이나 그런 건 잘 몰라요. 영화 같은 데서나 봤을 뿐이지만……. 그런데, 난 분명히 봤어요. 내가……. 내가 다른 삶을 살았던 기억을.”

    “…….”

    “그런데 자꾸 내 기억이 아니라고 강조하니까……. 그게 내 기억이 아니라면…….”

    또 다른 나의 기억이냐고 차마 묻지 못했다. 지수의 머리로는 자신이 또 존재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게 아직은 힘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한지수’의 존재를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펄은 고민하듯 팔짱 낀 채 제 팔뚝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러더니 행성을 살짝 기울이며 지수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범위를 좁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물어보겠나?”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지수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불만이 가득한 불경한 눈빛을 본 펄이 작게 웃었다.

    “하하, 이거 참, 쉽지 않군.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단순한 질문을 하라는 의미였네. 그러면 단답 정도는 하도록 하지. 물론 그조차도 이치를 거스르는 행위라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가 아무래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네.”

    “뭐든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있게 질문하면…… 정말 대답해 줄 건가요?”

    “하나 정도는 힘써 보겠네. 그러니 나의 소중한 친구가 아끼는 별을 지닌 인간이여, 다시 질문해 보게.”

    그가 한 말을 곱씹은 지수는 자신이 지금 가장 알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오로지 YES와 NO 둘 중 하나로 답변이 가능한 질문…….

    ‘한지수’의 기억이 ‘나’의 기억이 아니고, ‘내 것’이 아니라면. 내가 보고 느끼고 일부를 기억하고 있는 저 한지수는 대체 누구인가? 만약 또 다른 자신이라면 그의 기억이 왜 제 기억에 섞여 들어온 건가?

    하지만 이 질문들은 절대로 단답으로 해답을 얻어 낼 수 없었다. 펄의 앞에서 잠시 고민하며 가장 궁금하고, 가장 알고 싶었던 이야기를 정리한 지수가 머릿속에서 질문을 굳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윤이 형은 살아 있나요?”

    “…….”

    일순, 팔짱 낀 채 내내 제 팔뚝을 두드리던 장갑 낀 손이 우뚝 멈췄다.

    행성 머리와 한지수 사이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지수의 질문은 간단명료했지만, 펄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든 대답해 준다고 했으면서, 왜 대답하지 않냐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흐하하하핫-!”

    “……!!”

    행성 머리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그저 웃기만 하더니, 이젠 배까지 잡고 상체를 숙이며 꺽꺽 숨이 넘어가도록 웃기 시작했다. 한참 실컷 웃어 재낀 펄은 눈도 없으면서 눈이 있을 법한 위치를 손가락으로 훑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이런……. 내가 한 방 먹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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