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너의 파편 1
대체 무엇을 사과하는 걸까.
한지수는 자신이 지금 왜 그에게 이런 충동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동시에 지독하리만큼 진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내,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한지수 가이드, 진정하세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아냐, 다 내 잘못이야, 사과해야 해. 하진 씨, 미안해요. 내가, 내가 당신에게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하진 씨한테 그런 짓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러자 일순, 제게 달려든 한지수를 안고 도닥이던 정하진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가 당황한 걸 알면서도 지수는 제 입을 거쳐 나오는 말을 제어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다 망쳤어. 미안해요. 내가 나빴어. 내가 잘못한 거야. 정말 미안해. 내가 당신에게 이런 짐을 지우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어째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말해 두지 않으면 이 남자에게 다신 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지수는 쉬지 않고 제 속의 말을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대체 뭐가 이리 미안해서 이리 가슴이 아픈 걸까?
정하진의 목을 끌어안은 채 두서없이 사과하던 지수는 갑자기 의식이 바닥으로 훅 꺼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조금 전, 서울로 보이는 멸망해 가는 세상에 떨어질 때와는 또 달랐다. 압도적인 존재감의 개입에 자그마한 저란 존재가 그저 휘말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는지, 누군가가 지수의 의식을 강제로 재우려는 것처럼 인위적인 몽롱함이 번지며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잠식당할 것 같았다.
‘안 돼. 정신 차려. 기절하면 안 돼.’
지금 기절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자 마치 괜찮다는 듯이 다독이는 듯한 감각이 전신에 퍼지며 또 한차례 강하게 의식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싫어, 하지 마.’
한지수는 정신적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분명 저를 편하게 해 주려고 하는 건 분명한데, 순순히 따르기 싫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온전히 제 것이어야 마땅한 무언가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지수는 부드럽고도 다정한 손길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고집을 부리며 눈을 부릅떴다.
“헉……!”
순간, 전신을 짓누르는 것 같던 거대한 기운이 증발하듯 사라지며 또 다른 공간이 보였다. 자신을 꼭 끌어안아 주었던 정하진도 없었고, 정하율도 토토도 보이지 않았다.
‘우주?’
새카맣기도, 어쩌면 보랏빛이기도 한 고요의 공간을 채운 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과 쏟아지는 유성이었다.
“헉…… 허억……, 헉…….”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봐도 어디라고 정의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온통 이름 모를 별이 가득한 공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광활한 공간을 두리번거리던 지수는 비처럼 쏟아지는 유성우로 시선을 돌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것을 놓쳐선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바라보자, 추락하는 것이 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한 빛을 발하며 쏟아지는 것들은 수정의 파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파편 속엔 지수가 ‘내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하나의 파편이 지수의 뺨을 쏜살같이 스치고 지나가 끝없이 추락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파편이 지수의 귓가를 스쳐 지나간 순간, 파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 씨.]
파편에서 들린 건 한지수의 목소리였다. 지수는 제 목소리에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서며 벌써 저만치 멀어진 파편을 노려봤다. 제가 정하진을 부를 땐 언제나 ‘정하진 에스퍼’라고 부르곤 했지, 단 한 번도 ‘하진 씨’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우주 같은 이상한 공간에 오기 전, 저도 모르게 사과를 토해 내느라 그를 하진 씨라고 부른 순간…… 지수는 어떤 확신을 느꼈다. 언젠가 자신이 꽤 오랫동안 그를 하진 씨라고 불렀다는 기억에 대한 확신을.
이건 단순한 기시감이나, 익숙한 느낌이 아니었다. 한지수는 정확하게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잊고 있었다.
어째서?
대체 언제?
왜 난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온갖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와중에도 기억은 빠져나가고, 남은 조각은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다. 지수는 제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붙들려 애썼다.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제 몸을 스치며 추락한다. 저걸 다 붙들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방법을 몰랐다.
“내 기억이야…….”
지수는 이 공간이, 그리고 제 기억의 조각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것을 방치하는 이가 있다는 걸 알곤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 기억이야! 멋대로 가져가지 마!!!”
소중한 기억인지, 잊고 싶은 기억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은 ‘한지수’의 기억이었다. 또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파편에서 그리운 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수야. 형 왔어.]
화들짝 놀란 지수가 파편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강재윤의 목소리를 담은 파편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추락해 까마득한 공간으로 사라졌다.
“형……?”
그러자 이번엔 또 다른 파편이 스치며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수 씨. 잠이 안 와요?]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정하진의 목소리를 담은 파편 속에서 그의 얼굴이 언뜻 비쳤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수에게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남자의 얼굴을 담은 파편이 추락한다.
“……하진 씨.”
그를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소리 내어 말한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지수의 감정이 아니었다. 저 파편이 담고 있는 감정이었다.
미안하고, 애틋하고, 아프고, 괴롭고, 외롭고, 슬펐다.
그리고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온갖 기억이 제 몸을 스칠 때마다 선명한 감정이 느껴졌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기억의 조각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수는 제 기억을 붙들 수 없다면 쫓아가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제 몸은 이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직 저를 스치고 추락하는 저 유성우 같은 기억의 조각들만이 밑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지수는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끊임없이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나의 슬픈 파편이 스치고, 기쁜 파편이 스치고, 좌절한 파편이 스칠 때마다 누군가가 감정의 격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게 느껴졌다.
마치 저 파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네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제 몸을 안아 주는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졌지만, 지수는 그 무한한 애정을 거부한 채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지금 날 지켜보고 있지?”
분명 누군가 이 공간을 주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수는 아마도 그 대상이 안식의 신이라고 확신하며 말했다.
“안식의 신. 당신이지?”
대답은 없었다. 그런데도 지수는 계속해서 말했다.
“안식! 이게 다 뭐야!? 왜! 왜 멋대로 이걸 분리하려는 거야!? 내 기억이잖아! 전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건 한지수의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지수’의 기억이었다. 지수는 또 하나의 파편이 스쳐 지나갈 때 언뜻 보인 장례식 장면을 눈에 담으며 확신했다. 파편에 비친 한지수는 먹물처럼 시커먼 상복을 입고, 강재윤이 환하게 웃는 사진이 끼워진 액자를 품에 안은 채 멍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걷고 있었다.
“…….”
한지수는 강재윤의 장례식에 변신 아이템을 사용해 참석했었다. 모든 장례 절차는 김현아가 손을 써 평화 길드에서 진행했다. 그러니 이건 제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수는 저 파편이 스치고 지나간 순간 그날의 슬픔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한지수를 비난했다. 네 탓이라며 손가락질하고 달걀을 던지려는 이도 있었다. 평화 길드 에스퍼들의 저지로 달걀 세례는 면했지만, 지수의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네 탓이야.
‘나도 알아.’
전부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어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통탄함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저를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이들이 뱉는 말에 동감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을 칼로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다.
이 영정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이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국가적 손실’이라는 말, ‘고작 너 하나 때문에’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한지수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고 있었다.
‘이건…… 내 기억이…….’
파편이 멀어져 가며 심연에 흡수되자, 죽을 만큼 아팠던 가슴이 점차 진정됐다. 이건 제 기억이 아니었다. 물론 인터넷상에서 저런 말을 하는 글을 본 적은 있지만, 저런 식으로 제게 소리치며 달려든 사람들은 없었다.
“……기억 조작? 설마 지금까지 뇌 치료라고 하고, 내 기억을 전부 조작한 거야?”
강재윤의 장례식이 끝나고 지수는 폐인처럼 살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땐 이미 병원이었다. 사실 병원에서 깨기 전, 그러니까 저 폐인 같은 상태로 잠만 자던 나날의 기억도 흐릿하고 불명확했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잠든 채 지냈던 기억은 당연히 없었으니, 최성훈 교수가 제 기억을 조작했다는 게 가장 그럴싸한 가설처럼 느껴졌다.
“진짜 기억 조작인가?”
여전히 대답하는 이는 없었지만, 지수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SS급 에스퍼 정하진이 갑자기 제게 다가온 것도 이해가 됐다. 만약 조작된 기억, 그러니까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그가 함께 있었고, 그와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아냐. 그건 말이 안 돼. 그게 사실이라면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났어야지…….’